개혁개방 40주년: 대련 금보신구 경제활력으로 충만되여
2018년 08월 16일 15:40【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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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넷 조문판: 7월 25일, 기업의 ‘일처리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취지를 둔 료녕 대련 금보1호 ‘즉시 처리’전용라인이 정식 운행되였으며 동시에 사회에 기업에서 요구가 있기만 하면 반드시 “사사건건 회답하고 락착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대련 금보신구는 2014년에 설립된 동북의 첫 국가급 신구이다. 현재 신구의 5대 기능단지의 하나인 대련경제기술개발구는 국무원에서 비준한 우리 나라 첫 국가급 경제기술개발구로 대련의 경제기술개발구 건설 초기에 이곳이 설립한 항목추진센터는 고효과봉사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외상이 이곳에 와서 착공항목을 신청보고하면 항목추진센터에서 도장 하나만 찍으면 된다.
30여년전의 항목추진센터로부터 오늘의 ‘즉시 처리’전용라인에 이르기까지 대련 금보신구라는 이 땅에서 개혁혁신의 정신은 시종 변함이 없었다. 2017년 4월 10일, 중국(료녕)자유무역시험구 대련구역은 이곳에서 제막을 했고 금보신구는 다시 한번 발전의 새로운 시작점에 서게 되였다. 지난해 지역총생산액은 2100여억원으로 우리 나라 동북의 대외개방의 창구로, 경제활력이 충만된 곳으로 되였다.
하나의 초석, 개혁개방의 유전자를 심다
대련 금보신구 중측도로인 금마로 중간구간에 있는 하나의 대리석에는 ‘기초(奠基)’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있다. 1984년 10월 15일, 대련 경제기술개발구가 이곳에서 정초식을 가졌다.
“정초식 날에 북소리가 하늘에 울려퍼지고 당지 민중대표와 300여명 중소학생들이 참석했다. “ 그 때 8살 밖에 안되였던 소학생 맥영철은 그중의 한사람이였다. 그 때 그는 영문을 몰랐고 개발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날부터 그는 개발구와 함께 성장했다. 한채 또 한채의 고층건물이 건설되고 길이 점점 더 넓어졌다. 맥영철도 개발구에서 순조롭게 고중, 대학을 졸업하고 개발구에 남아 일하게 되였다.
“초석을 묻은 것은 사실상 개혁개방의 유전자를 심은 것이다.” 69세의 진병무는 당시 대련경제기술개발구지도소조 판공실의 사업일군으로 정초식 전의 관련 준비사업을 맡았었다. “새롭고 들어보지도 못한 개발구를 건설하는 데서 전통적인 기구설치로는 안된다. 특별한 일은 특별하게 처리하고 새로운 일은 새롭게 처리해야 한다.” 투자자들에게 잘 봉사하기 위해 개발구는 ‘즉시 처리’판공실을 내오고 기업이 반영한 문제, 요구에 대해서는 우에 보고하고 아래에서 의논할 필요가 없이 즉시 처리하게 했다.
2014년 6월, 국무원에서는 동북에서 첫번째, 전국 열번째로 되는 국가급 신구-대련금보신구를 설립했는데 대련개발구, 대련보세구, 금사탄국가관광휴가구 등 개방선도구가 포함되였다. 당초 3평방킬로메터로 시작되여 지금은 2299평방킬로메터로 되기까지 개혁개방의 유전자는 다시한번 확장되기 시작했다.
“국가급 신구로서 반드시 기구가 간소화되고 운행이 효과적인 관리체제와 운행기제를 다그쳐 구축해야 한다.” 료녕성당위 상무위원, 대련시당위 서기 담작균은 이렇게 소개한다. 신구 관리위원회 기능부문은 15개로 대폭 축소되였고 인원편제도 317명으로 감소, 기구인원편제는 30% 간소화되였다.
지금의 맥영철, 그는 한창 사업의 황금기에 처해있다. 그는 대련금보신구상무국에서 투자유치사업을 책임지고 있다. 그는 이렇게 소개했다. 대련금보신구는 대련에서 처음으로 “목록외에 권리가 없고 대청밖에서 심사비준하지 않으며” 은행지점에서 기업등록을 대리해주는 ‘정은협력’, ‘전 과정 인터넷 처리, 심사비준시 비대면” 등 혁신조치를 앞장서 내놓았다.
통계에 따르면 2017년, 대련금보신구 신규증가 시장주체는25399개로 동기대비 47.3% 성장했으며 신규증가 기업은11878개로 동기대비 48.87% 성장했다고 한다. 819개 기업이 외지로부터 대련 금보신구에로 입주했다. 기업가들은 ‘투자’로 금보신구의 투자환경에 찬성표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