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5월 22일발 인민넷소식(기자 임영화): 한락연 탄신 120주년에 즈음해 중국미술관에서 주관한 '전장활화(典藏活化)' 시리즈 전시 '비단의 길 무지개—한락연 탄신 120주년 중국미술관 소장 한락연작품전(丝路飞虹—韩乐然诞辰120周年中国美术馆藏韩乐然作品展)'이 2018년 5월 19일부터 7월 3일까지 진행된다. 이번 전시는 20세기 40년대 '비단의 길 문화' 탐색조류를 배경으로 하여 한락연의 작품 150여점을 전시하는데 '혁명과 예술인생', '비단의 길 고고학', '비단의 길 사생' 등 세개 부분으로 나눠 한락연의 혁명예술인생을 전시하고 한락연선생이 중화민족 문화와 중화민족의 해방을 위해 한 공헌을 기린다.
이날 전시에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원 주임이며 중앙통일전선부 원 부부장인 리덕수,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원 전문위원 테무얼(부부장급), 중국인민해방군 공군대교 리광남, 한락연의 딸 한건립, 로일대 혁명가 후손 및 저명한 화가 추기규, 중국미술관 책임자들, 중국사회과학원 박건일, 리성일 등 연구원, 연변주당위 선전부 원 부장 리흥국과 룡정시당위 선전부, 룡정시당안국, 중국조선민족사학회 한락연연구전문위원회, 룡정한락연연구회 관계자들과 북경 조선족 각계 인사들이 참가했다.
중국미술관 관장 오위산의 소개에 따르면 1952년에 한락연의 미망인 류옥하 녀사가 135폭의 한락연 유작을 무상으로 국가에 기증했다고 한다. 이후 중국미술관은 한락연선생을 위해 여러번이나 개인전시를 개최했고 한국과 중국 오문,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도 전시되여 한락연선생의 예술창작과 심미리상이 널리 전파됐다고 한다.
한락연은 1898년 길림성 연길현 룡정촌의 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미술계 최초의 공산당원이고 통일전선사업을 책임진 지하공작자이기도 했다. 이 두가지 신분외에 한락연은 학자이기도 했는데 그는 키질석굴의 력사문화자료를 계통적으로 발굴, 연구하고 정리한 첫사람이기도 하다. 한락연은 세가지 신분으로 자신의 짧지만 전설적인 인생을 보냈는데 이는 예술인생이기도 하고 리상으로 가득찬 혁명인생이기도 했다.
혁명가로서의 한락연은 1919년에 벌써 룡정에서 반일시위에 참가해 항일활동을 시작했다. 192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24년 당조직에 의해 동북으로 파견되여 가장 일찍 동북의 당을 건설한 지도자중 한명으로 되였다. 동북에서 그는 사진관과 미술 교사라는 신분으로 정보소를 세우고 중국공산당 제6차 대표대회 대표들을 쏘련으로 보내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염보항도 한락연의 영향하에 중국혁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류학하는 동안 그와 기타 청년들은 함께 양호성을 향항으로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귀국후 그는 전지(战地) 취재, 연설 발표, 선전화보 제작 등 여러가지 형식으로 항일 및 선전활동에 참가했다. 서북 고찰기간은 한락연 예술창작의 고봉이였다. 이 시기에 그는 중국공산당 서북해방의 전기 준비사업을 맡아 감숙, 청해, 신강 각지를 돌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관심하고 어떻게 서북 각 민족간의 관계를 증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또한 서북 국민당 군정요원들의 통일전선사업을 비밀리에 전개하기도 했다. 1947년, 한락연은 항공사고로 생을 마감했으며 중국인민공화국이 창립된 후 렬사로 추인되였다.
가장 일찍 예술고고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한락연은 툴판, 쿠처, 카스 등 여러 곳의 고적을 발굴했는데 우리 나라에서 키질석굴을 발굴하고 연구하고 정리한 첫사람이기도 하다. 키질고찰기간 한락연은 석굴벽화의 화려한 색감과 류창한 라인에 근거해 창조적으로 유화 혹은 수채화로 모사를 진행해 키질석굴의 다양한 예술특색을 생동하게 환원시켰다.
예술가로서 한락연은 일찍 상해미술전문학교 서양화학부에서 공부했다. 1929년, 프랑스로 류학간 후 그곳에서 전문적으로 회화를 공부했다. 귀국후 그는 예술을 무기로 항일전쟁에 참가했다. 1945년후 그는 서북 각지를 전전하면서 예술창작으로 현지인의 풍속습관, 생활상태를 가장 진실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해 서북지역의 자연풍모를 생동하게 그림에 담았다. 이 시기는 한락연의 창작이 가장 집중되고 풍부하며 성과가 가장 많은 시기로서 대량의 작품을 남겼다. 이런 작품들은 가볍고 거침없는 필치를 사용했으며 해살이 가득한 그림들은 그의 랑만주의성향을 체현했다. 근대 최초의 비단의 길 예술의 탐색자로서 한락연의 예술창작에는 력사의식과 현실주의 정신이 체현되였다. 이는 20세기 상반기 진보의 예술사조를 대표하는바 그의 예술에 대한 탐색은 중국 예술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당대 예술가들도 이로부터 큰 계발을 받고 있다.
전시가 끝나고 진행된 간담회에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원 주임이며 중앙통일전선부 원 부부장인 리덕수는 오늘 전시가 개최되기까지 미술관의 많은 노력이 깃들어있다면서 전면적이고 계통적이며 심층적이고 생동하게 예술의 형식으로 한락연의 일생을 반영해 가장 권위적인 전시회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성, 혁명성, 예술성, 인민성과 혁신성 등 네가지로 나눠 한락연을 작품을 평가했다. 정치성과 혁명성이라고 하는 것은 한락연이 공산당에 가입한 후 초심을 잃지 않고 사명을 명기하면서 혁명에 일생을 바쳤기 때문이고 예술성이라고 하는 것은 서방예술과 중국예술을 결부해 새로운 예술풍격으로 진실하게 당시의 모습을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민성이라고 하는 것은 한락연이 당시 서부 인민들의 생활모습을 그림에 담아 그들의 생활상황과 민족풍습을 반영했기 때문이며 혁신성이라고 하는 것은 혁명사업을 하든 예술사업을 하든 그가 혁신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국미술관 한락연 작품 전시회 관련 정보 링크: http://www.namoc.org/zsjs/zlzx/201804/t20180427_31863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