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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고개”의 정암(亭岩)산성

김호림

2015년 10월 30일 15:12【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정암산성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연길에서 도문을 지나 양수진까지 약 50㎞, 이어 양수진에서 산성 기슭의 정암촌까지 10㎞ 정도 더 들어가야 했다. 마을 북쪽에 있는 정자 같은 둥그런 바위가 금방 손에 닿을 듯 지척에 보였다. 후문이지만 정암산의 이름은 이 때문에 붙여졌으며, 정암촌 역시 이 정암산의 유래를 따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산성을 지척에 두고 잠깐 주춤해야 했다. 양수진에서 살고 있는 동창이 홀로 산행에 나서는 필자를 극구 막아 나섰던 것이다. “혼자서는 어림도 없어. 성벽은커녕 산을 오르는 길도 찾지 못해.” 그의 말에 따르면 정암산은 산세가 험하고 골이 깊어서 초행자는 자칫 성곽의 이마빼기도 만지기 어렵단다. 동창은 나중에 현지 토박이인 자신의 자형 이덕호(59세)씨를 안내인으로 찾아줬다.

우리가 탑승한 택시는 마을 동쪽의 대로를 따라 그냥 산속으로 더 들어갔다. 기재에 따르면 이 길은 훈춘에서 왕청 지역으로 통하는 천년의 고도(古道)라고 한다. 고도(古道)는 지난 세기 80년대만 해도 울퉁불퉁한 수레길이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왕모래를 깐 국방도로로 되어있었다. 마을을 1㎞ 정도 벗어났을까, 정암산은 수풀이 울창한 분위기로 성큼 눈앞에 다가왔다. 차에서 내리자 이덕호씨는 정자 바위로 오르는 방향이 아닌 북쪽 산골짜기로 통하는 길에 들어선다. 그에 따르면 정자 바위는 해발고가 400여m에 불과하지만 톺아 오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고 한다. 언제인가 그도 정자 바위 쪽을 선택해 산을 오르다가 비지땀을 동이깨나 흘렸다고 한다. 보아하니 안내자가 없었더라면 오후 내내 엉뚱한 곳에서 허둥거릴 뻔 했다.

“노인들이 그러시는데 광복이 나던 해 일본군이 이 산성에 들어와서 진을 쳤다고 하네. 왕청 쪽에서 진격해오는 소련군을 막을 심산이었나 보네.” 이덕호씨가 말 주머니를 주섬주섬 풀어놓는다.

그때 많은 일본 군용차량이 정암산성으로 진입했다고 한다. 정암산성에 무슨 물건이 얼마 들어갔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렇든 말든 근대의 일본군까지 이 산성을 이용했다면 천혜의 군사요충지가 틀림없다.

산골짜기에 들어선지 얼마 안 되어 산세가 갑자기 급하게 뻗어 내리고 높다란 참나무 숲이 빼곡하게 깊어진다. 애들의 머리통만한 돌덩어리들이 수풀사이에서 무더기로 보였다. 골짜기를 따라 도란도란 흘러내리던 물줄기는 이곳에 와서 돌 틈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림짐작에도 성곽에 이용했을 자재는 산에 가득한 듯 했다.

문득 이덕호씨는 걸음을 멈추더니 참나무 밑 부분을 발길로 툭 찼다. “이건 산짐승이 누워있던 자리구먼.”아닌 게 아니라 참나무아래에 깔린 두툼한 낙엽더미에는 우묵한 자리가 패어 있었다. 옛날 정암촌에는 늑대가 동네어구까지 어슬렁거렸다고 한다. 지금도 정암산에는 여전히 멧돼지며 노루가 뛰어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니 웬 일인지 산을 오르느라고 땀벌창이 된 몸에 싸늘한 기운이 뻗친다.

500m쯤 올라가자 드디어 산중턱에 돌로 쌓은 산성의 모습이 삐죽이 나타났다. 천년의 이끼가 덮인 성곽 위로 나무 사이를 꿰뚫고 햇빛이 가느다랗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수풀을 헤집고 어렵사리 산성의 한 모퉁이에 다가섰다.

바람소리에 우수수 흔들리는 나무 가지들이 환영처럼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어디선가 함성을 지르며 내닫는 무사들의 창과 방패가 번뜩이는 듯 싶다. 솔직히 천년의 산성에는 한그루의 나무, 한조각의 돌에도 고혼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잠깐 다리쉼을 하고나서 계속 산등성이를 허위허위 올라갔다. 이윽고 높다란 바위가 나타나 숨을 톺으며 기어올랐더니, 금방 현훈증이 일어난다. 10여m 높이의 아스라한 절벽이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이 바위의 너비는 고작 서너 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덕호씨는 평지를 걷듯 어느새 저만큼 앞쪽에 멀어진다. 그를 불러 세우기가 뭣해서 네발걸음으로 간신히 바위를 건넜다. 방금 산행에 자신 있노라고 동창에게 오기를 부렸던 게 생각나서 낯이 달아오른다.

서쪽 산성은 이 절벽 바위에 이어서 쌓았는데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누워 있었다. 성곽의 문터 자리와 부근의 참호 자리가 확연하게 보였다. 이덕호씨에 따르면 산등성이에 있는 이 산성 유적지는 변화가 거의 없다고 한다.

정암산성은 불규칙적인 삼각형 형태로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되었으며 둘레의 길이가 약 2.5㎞ 되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중 동북부의 성벽은 700m, 서쪽성벽은 800m, 남쪽성벽은 800m 정도인데, 어림잡아 약 500m 길이가 되는 절벽에는 낮은 곳만 골라가며 돌을 덧쌓고 있었다. 성내에는 동문, 북문, 서문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남쪽성벽의 문터에는 골짜기 사이의 길을 따라 길옆에 돌로 쌓은 군사시설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훼손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성곽 아래쪽의 펑퍼짐한 곳에 너비 2,3m의 웅덩이가 보였다. 삼태기 모양이었으며 바깥쪽으로 홈 채기가 패어있었다. 학계에서는 이런 웅덩이를 온돌에 불을 지피던 구덩이라고 보는 게 통설이다. 온돌이 놓인 이런 곳은 병영 터로 보고 있다. 정암산성에는 병영 터가 30여 곳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성곽에는 많은 병력이 상시적으로 주둔했다는 얘기이다. 산성 동남부의 정자 바위는 산성의 천연적인 전망대로 불린다. 바위 위에서 고도(古道)의 상황을 낱낱이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위 서쪽에 있는 병영 터는 이런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정자 바위에는 또 재미나는 일화가 깃들어 있다. 이 바위는 동서 두 봉우리로 이뤄졌는데, 두 봉우리 사이에는 언제 누구의 소행인지 몰라도 굵은 나무가 뉘어진 다리가 있어서 서로 왕래가 무척 쉬웠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이 다리가 없어져 두 봉우리를 드나드는 게 마치 견우와 직녀의 상봉처럼 몹시 어려운 모양새라고 한다. 봉우리의 높이가 수십미터 되고, 또 봉우리 사이의 거리가 서너미터 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두 봉우리를 드나든다는 게 전설 같은 이야기로 되었던 것이다.

정암산성 성곽에는 전망대, 병영 터, 문터, 통로와 샘물이 있으며,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분지가 있다. 정암산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정암산성은 아직도 축성연대를 확인할만한 유물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이다. 사학계에서는 정암산성의 축조연대에 대해 아직도 정설이 없다. 한때는 명나라 시기의 유적지라는 결론이 나와 실제로 정암산 기슭에는 그런 내용의 비문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 비문은 지금 어찌된 영문인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훈춘문물지”에 따르면 정암산성은 산성의 조형, 축성기법으로 보아 훈춘의 살기성, 통긍산 산성과 유사하며 이 때문에 발해 시기이거나 이보다 더 이른 고구려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늦은 가을의 저녁 해가 서쪽하늘에 떨어지고 있었다. 찬바람에 실려 오는 싸늘한 한기에 몸이 오싹해났다. 우리는 땅거미가 지기 전에 부랴부랴 산을 내렸다. 동창은 그때까지 정암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 성곽은 이 마을 안에도 있단다.” 동창이 귀띔하는 말이다.

정암촌에도 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성벽이 있었다. 성벽은 사람 키 높이로 돌을 쌓았는데 남아있는 부분이 2~30m 정도 되었다. 이 성벽은 정암산성 남쪽의 고도(古道) 부근에 위치한 걸로 미루어 정암산성의 평지성 성터가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본다. 고구려 성곽은 산성과 평지성이 한조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암촌은 500여명 인구가 살고 있는 비교적 큰 동네로, 1938년 일제강점시기 집단이주한 충청북도 사람들로 이뤄졌다고 한다. 정암촌에는 충청도 사투리와 충청도 웃다리 농악 등이 지금껏 보존되어 있었다. 마을의 노인들은 보름 같은 명절 때면 모임장소에 삼삼오오 모여 옛 “청주 아리랑”을 부른다고 한다.

“시아버지 죽으면 좋다 했더니 빨랫줄이 끊어지니 또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시어머니 죽으며 좋다 했더니 보리방아 찔 때마다 또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청주 아리랑”은 중국에서 동란이 일어났던 “문화대혁명”시기 마을에서 한때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그러나 힘든 아리랑 고개를 넘으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렇게 쉽게 떨어뜨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느덧 정암 바위는 저녁의 어스름 속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차창 밖의 어디선가 “청주 아리랑”의 슬픈 노랫가락이 들려오는 것 같아 공연히 심정이 침울했다.*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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