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고신구(高新区)의 거리를 지날 때마다 72세에 난 장동범은 늘 차창을 내려 도로 량측의 건물들이 차뒤로 스쳐지나는 모습을 보기 좋아한다. 그는 “지난날 포대기 속에 있던 갓난아기로부터 눈깜짝할 사이에 스무살이 넘은 총각으로 자라는 것을 직접 보아왔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수 있겠는가!”고 말하고있다.
이미 서안 고신구관리위원회에서 퇴직한지 12년에 나는 장동범은 이 고신구가 고고성을 울리면서 탄생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1991년 3월, 국무원은 서안고신기술산업개발구의 설립을 비준했다. 이로부터 ‘고신구’라는 이 새로운 명사가 소리없이 옛도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27년간 격려전진하면서 서안고신구는 개혁혁신을 동력으로 발전의 품질과 효익이 동보적으로 제고되여 우리 나라 첨단기술산업의 중요한 기지로 부상했다.
창업격정을 전승
여름의 저녁편에 고신구의 당나라 성벽유적지공원에 들어서면 푸른숲이 무성하고 초목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숲을 넘어 바라보노라면 초저녁 등불을 밝힌 오피스텔은 더없이 아름답고 인파와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울타리밖은 현대세상으로서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 공원에는 인문내포가 있고 인기척과 조용함이 알맞다.” 금방 태극권 운동을 마친 류선생은 얼굴의 땀을 닦으면서 여름날의 저녁바람에 도취되였다.
27년전 이곳은 완전지 다른 모습이였다. 1991년 6월 14일, 서안 서남성벽 밖에서는 기계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진면서 고신구건설이 착공되였다. 관리위원회에서 사업하는 장동범은 동료들과 함께 공사장을 찾았는데 눈앞의 정경에 깊은 촉동을 받았다, 그는 “주변은 몰락한 마을, 황페한 토지 뿐이고 페기된 관개수로가 동서방향으로 뻗어있었다. 그 때에는 그 누구도 고신구의 미래 모습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창업의 나날들은 간고하고도 사람들을 흥분되게 했다. 관리위원회 설립초기에는 10만원의 경비와 빌려온 낡은 승용차 한대 뿐이였고 근 20명 사업일군들이 임대맡은 몇칸의 방에서 사무를 보았다. 서안 성내에 가서 외자를 유치할 때에는 모두들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가로질렀고 외지에 가서 외자를 유치할 때에는 장거리뻐스와 기차를 타고 다녔다. “비록 간고했지만 모두들 격정으로 차넘였고 온몸에 무궁무진한 힘이 생겼다.” 장동범은 “27년동안 불같은 창업의 격정으로 이어달리면서 전승해왔다”고 말했다.
그해에 서안고신구는 국가기본건설계획을 초과완수하여 전국 50여개 고신구 가운데서 제1위를 차지했다. “그해에 고신구를 세우고 그해에 착공했으며 그해에 효익을 보았다. ” ‘고신속도’를 회억하면서 장동범은 “첫 전역의 승리를 거두어 고신구사람들의 정신력을 진작시켰다!”고 흥분되여 말했다.
이로부터 너그럽고도 듬직한 황토땅에서 울타리를 돌파하고 재빨리 발전하는 ‘성장의 소리’가 자주 울려퍼졌다—체제상에서 외자유치 등 령역에서는 시 1급 관리권한을 행사했고 기제상에서 ‘원스톱사무’로 공공봉사전환의 선례를 개척했으며 봉사상에서 ‘특수사무는 특수하게 처리하고 급한 사무는 신속히 처리’하는 ‘고신공감대’를 응집시켰다……
이와 같은 추진력에 의거하여 고신구는 머리를 쳐들고 대활보로 전진하고 전진 속에서 개선가를 울렸으며 당년의 그 ‘백지’가 오늘날 이미 색채가 다채로워졌다. 7만여개 기업들이 이곳에 등록했고 120개 세계 500강 기업들에서 177개 회사와 기구를 설립했으며 전자정보, 선진제도, 생물의약, 현대봉사 4대 주도산업을 형성했다… 시간과 공간이 바뀌면서 생태가 살기좋은 하나의 산업 새 도시가 땅을 차고 일떠섰다.
래원: 인민넷-조문판 | (편집: 임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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