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 룡정.윤동주연구회에서 주최하고 통화청산그룹에서 협력한 ‘교육의 선구자’ 김약연 탄신 150돐 기념행사가 ‘중국조선족교육의 제1촌’으로 불리는 룡정시 지신진 명동학교에서 치러졌다. 이번 행사는 중국조선족사회에서 처음 진행하는 김약연 기림 행사로 된다.
다년래 조선족교육에 일관한 관심을 가지고 ‘설봉컵’ 교육상을 설치하여 민족교육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통화청산그룹 리청산 일행은 먼저 윤동주의 장례식이 치러졌던 룡정 윤동주의 자택 옛터에 위치한 룡정.윤동주연구회 사무실을 방문하고 민족교육발전에서의 보다 효과적인 격려지책들을 논의하였다.
이어 참가자들은 100여년의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서도 민족교육의 터를 드팀 없이 지키고 선 명동학교에 당도하여 김약연 교장선생의 동상앞에 생화를 올렸으며 그 거룩한 위상을 첨앙하였다.
윤동주교실에 자리를 정하고 민족교육의 선구자 김약연선생의 생평을 돌이키며 그 발자취를 더듬었다.1868년 10월 24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탄생한 김약연선생은 1899 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살던 4세대 141명 남녀로소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장재촌에 도착한다.선생은 이주민들과 함께 중국인 지주의 림야 수백정보를 구입하여 개간을 서두르면서 동방을 밝힌다는 뜻으로 마을이름을 《명동촌》이라 지었다. 선생은 농사일을 하면서 인재를 기르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닫고 1901년 ‘규암재’ 라는 사숙을 만들었고 1908년 4월 27일에 마침내 명동서숙을 설립하였다.
개교 당시 학생 수가 42명이였던 명동서숙은 학생들에게 한문, 수학, 력사 등을 가르쳤고 교세(校势)는 날로 커져 1910년 3월 명동중학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1911년에는 또 명동녀학교를 설립하여 녀성교육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명동학교는 마침내 연해주나 조선 국내에까지 널리 이름이 알려져 배움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이 구름같이 달려오는 명문학교로 되였다.
명동서숙은 항일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기지로 되였고 일제는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하면서 끝내는 이 학교를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김약연 교장선생의 지도하에 학교는 다시 재건되였고 1925년에 룡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편입되면서 15년 동안 가꾸고 다듬었던 명동학교는 문을 닫게 되였다.
김약연선생은 민족교육의 선구자, 항일운동의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계속 활약하였으며 1942년에 ‘나의 행동이 바로 나의 유언’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무수한 반일투사를 기르고 민족사회에 반일정신을 고양해온 김약연선생의 공적은 세기를 걸쳐오면서 영원한 공덕비로 솟아 후세들을 고무하고 있다.
룡정.윤동주연구회 김혁 회장은 “연구회에서는 ‘별의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행사를 무수히 진행하여 왔으나 그 스승에 대한 기념행사는 ‘오늘 처음’이라며 이제부터 실제행동으로 선구자의 유언에 보답하는 뜻깊은 행사들을 조직할 것"이라 밝혔다.
룡정.윤동주연구회의 고문을 맡고 있는 연변대학조선한국학원 교수이며 박사도사인 김호웅 선생은 “규암 김약연 선생의 령전에 올리는 글”을 발표하여 민족교육의 선구자이며 반일운동의 지도자인 김약연 선생의 교육사상과 학생의 잘못에 자신의 다리를 회초리로 치는 교육방법 및 “나의 행동이 바로 나의 유언”이라는 명언의 정체성을 학술적으로 론술하였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이 땅에 근대적인 민족교육의 요람을 마련하고 우수한 항일운동가, 교육자, 종교인, 문학인들을 키워낸 선생의 높은 뜻을 이어받아 말과 글을 비롯한 우리 력사와 문화의 전통을 굳게 지켜 나갈 것”이라고 의지를 표하였다.
래원: 길림신문 | (편집: 임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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