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습근평 총서기는 6년만에 다시 광동에 가서 고찰하고 조사연구를 했다. 이는 “개혁은 멈추어서는 안되고 개방은 전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심을 보여주었는바 청원은 조사연구에서의 한개 역이였다. 뉴스를 보고 왕창호, 왕정 두 형제는 격동을 금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마치 38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이제 70세를 넘긴 그들은 퇴직 전 청원현질소비료공장 공장장, 부공장장을 맡았었다. 당시 전국 1500여개 작은 질소비료공장중의 하나였으나 청원현질소비료공장은 지난 세기 70년대말 용감하게 앞장서는 개혁의 전기를 썼었다.
왕창호와 왕정은 대학교를 졸업한 뒤 선후로 청원현질소비료공장에 분배받았지만 일을 할수록 께끄름했는데 그것은 1970년 시험생산으로부터 1978년까지 공장이 해마다 적자를 보았기 때문이였다.
“다른 원인이 있겠나? 생산량이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이지.” 당시 부공장장으로 있던 왕창호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밖에는 농민들이 줄을 서서 비료를 사려 하고 심지어 암모니아수를 사려고 서로 다투면서 몸싸움도 했다. 그러나 공장은 ‘큰가마밥’을 먹고 있었기에 일을 많이 하나 적게 하나 마찬가지였다. 매번 농망기가 되면 현당위 서기가 공장에 와서 직접 생산을 독촉해야만 했다.
역전의 기회가 끝내 나타났다. 전국적으로 전개된 진리표준문제에 대한 대토론의 ‘동풍’을 타고 청원현질소비료공장도 토론대회를 소집했다. “몇차례 토론을 거친 뒤 모두들 장려를 주지 않으면 출로가 없다고 인정했다.” 왕창호는 이렇게 말했다.
1978년 7월, 철밥통을 깨뜨리는 한차례 개혁이 공장에서 조용히 시행되였다. 5만원을 내놓아 종합상을 설치하고 생산량과 련계시켜 매 근무시간(8시간)의 최고생산량을 세개 등급으로 나누고 1등상에는 인당 1.2원, 2등상은 1원, 3등상은 0.8원을 장려하기로 했다. 많이 일한 로동자는 로임외에 매달 10, 20원의 상금을 더 탈 수 있었다.
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1979년, 공장은 끝내 적자를 흑자로 돌려세우고 년생산량은 3000톤도 안되된데로부터 1.5만톤으로 쾌속성장했다. 단숨에 외부로부터 70여채의 종업원주택을 구매하고 건설했으며 학교도 세웠다. “종업원들의 면모가 일신되였다. 진정으로 ‘간부가 앞장서고 로동자들이 따라하며 힘든 일은 다투어했다’.” 당시 생산기술을 주관했던 왕정은 이렇게 추억했다.
단맛을 본 청원은 대세에 따라 질소비료경험을 보급시키고 기타 현립국영공장에서도 ‘계획초과리윤수당상’을 추진시켜 ‘청원경험’을 창조했다. 그러나 당시 계획경제체제라 여러가지 류언비어들도 떠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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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aper.people.com.cn/rmrb/html/2018-11/23/nw.D110000renmrb_20181123_2-04.htm
래원: 인민넷-조문판 | (편집: 장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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