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제국의 근대적 앎은 너무 혹독하고 굴곡적이였습니다. 새로운 식민지를 찾아나섰던 서양렬강부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저 했던 유럽 자본가, 프레스터 존을 찾아 떠났던 종교인까지, 어느 순간부터 이들은 지구 반대편의 이 거대한 뭍을 거저 먹어도 체하지 않는 떡으로 보기 시작했던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양놈 코스프레라고 비웃음의 대상이였던 섬나라 왜구조차 이곳에 진입하여 빠가야로를 열창하고있었으니 말입니다.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등 자연의 경계는 태평양 서안에서의 패권을 위해 극동지역까지 팽창한 제정로씨야, 칙칙한 아시아에서 벗어나 구라파적 삶을 추구하고저 안달이 난 일본, 아무리 비실거려도 굶어 죽은 락타는 말보다 크다고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저 했던 청, 마냥 고요할수 없어 무언가라도 하고저 했으나 그 소박한 념원마저 요절된 조선 등의 문명적 충돌과 절충의 내용을 고스란히 간직한 대하드라마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의 프롤로그인 장백산에 갈 때마다 온천속의 닭알에게까지 경의를 표하고싶은 충동이 단전부터 인중까지 빛의 속도로 상승하군 합니다.
어찌 되였거나 1800년대말~1900년대 초 전혀 균형적이지 않았던 정치경제질서의 각축구조, 이 구조와의 타협, 충돌 속에서 중국조선족의 “근대성”이 잉태했던것 같습니다. 이 “근대성”은 이후 1900대 전반을 휩쓴 지속적인 이데올로기각축을 통해 때로는 물리적이고 문화적인 폭력을 통해 오늘날의 양태로 재구성을 거듭하고있었던것입니다.
이른바 중국조선족의 “력사적기원”은 설움과 한으로 맺힌 이주와 논농사 중심으로 묘사되는것으로 보여집니다. 동북지역의 주요 하천을 따라 이주한 조선인이 기능적으로 익숙한 농업경제를 구성함으로써 논의 북방한계선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것이지요. 나아가 이 농업경제에 기반한 계급관계는 이후 사회혁명의 토대가 되여 신중국의 건국력사에 중국조선족의 이름을 당당하게 새겨넣는데 실천적, 론리적 근거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런 력사적경험 못지 않게 중국조선족의 근대를 설명하는 중요한 척도가 더 있는듯 합니다.
“룡정촌은 빠르게 발전하고있으며, 중국의 조약항보다는 미국 중서부의 프레리거주지 같아 보인다. 건축업자의 비계(脚手架)와 외양이 단조로운 외국건물들이 조선인거주자의 진흙움막 사이로 솟아오르고있다.”
페리 앤더슨이 《현대사상의 스펙트럼》(p531) 말미에서 언급한, 1925년 8월 4일자 부친의 일기중 일부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1932년에 남편이 카나다에서 돌아왔다. 얼마뒤에는 룡정중앙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룡정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였다. 룡정에서는 중앙교회와 동산교회가 가장 중심적인 교회였다. 룡정교회가 잘 된 리유중 하나는 상업지대에 있었기때문에 장사를 하는 이들이 많아서 돈도 많았기때문이다.”
문재린과 김신묵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p486)의 일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도시입니다. 물리적인 경계에 근거한 공간적,지리적 령역과 상공업이 결합되였을 때 이를 도시라고 하듯이 도시는 상공업의 장이고 근대사회 그 자체입니다. 도시는 단일한 부류의 사람을 분화시키는 강제력이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수 있게 하는 포용력이 있습니다.
이주해온 많은 조선인들이 광활한 수전과 한전을 개척할 때, 그들에 의해 생산된 재화는 상업과 공업을 통해 상품이 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속에서 이 상품화의 과정을 어떻게 조작하면 리윤을 극대화할수 있을지 생각하는 사람들과 리윤이 극대화되는 과정에 자신의 로동에 대한 보상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을 어떻게 효률적으로 관리할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나뉘기 시작했을것입니다. 왜냐하면 도시의 제도를 결정하는 구조는 너무나 력동적으로 변하고있었기때문에 도시를 구성하고있는 인구가 단일한 수준으로 남아있기 쉽지 않았을것입니다.
더 광활한 동북대지로 가보겠습니다.
유럽의 한복판에 세워진 높이 300메터의 철탑이 여기가 근대 자유주의중심이라고 오만함을 뽐낼 때, 더 무지막지한 규모의 Fe원소는 제정로씨야에 의해 유라시아대륙을 관통하는 철도로 조직됩니다.
제정로씨야는 중동철도의 첫 삽을 1897년 8월 29일, 현재 조선족인구가 약 40%인 흑룡강성 동녕현 삼차구진에서 뜹니다. 1901년 3월 3일까지 할빈에서 수분하 구간의 동부간선 빈수선, 같은 해 11월 3일 할빈부터 만주리까지 서간선 빈주선이 완공되고 1902년 11월 할빈부터 려순까지 남부지선이 완공되였습니다. 그리고 그뒤의 30여년 동안 동북지역에는 거미줄같은 철도망이 구축됩니다. 연변지역에 부설된 철도는 일제가 패망하기 몇해전에 부설되였습니다. 광활한 동북평원의 그윽한 풀내음은 철도의 향연으로 전도되기 시작했습니다.
철도가 부설되면서 연선에는 일련의 도시들이 출현합니다. 제국주의침탈의 구체적 반영이 철도라는 점, 그리고 이 도시는 철도를 통해 근대를 경험했다는 점 등은 부정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흔히 표현하는 산재지구의 중국조선족은 바로 이 철도 연선에 출현한 도시와 이 도시의 근교에 분포된 농촌에서 한족, 만족, 몽골족 등 민족과 함께 거주하고있었습니다. 또한 동북 주요 4개 도시의 조선족은 철도역을 중심으로 한 부속지와 상부지에서 여러 민족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증기기관과 《국부론》의 대화가 1900년대 초 중국 동북지역 조선(족)인사회에서도 들리기 시작했던것입니다.
도시문명에 대한 묘사 없이 중국조선족의 근대는 설명 가능할가요. 상업화된 농업, 이식된 공업 등 난해한 낱말은 제쳐두고 중국조선족인구가 내면화한 근대적내용을 도시에 기초하여 생각해볼수는 없을가요.
오늘날 중국조선족의 문화는 벼와, 한복과, 물동이와, 김치와, 장독 등에서만 배태되고 정형화된 “특수한것”만이 아니라 동서양의 문물과 사상의 융합, 변형, 경쟁 속에서 재생산되고 재구성되는 “보편적인것”도 포함합니다. 중국조선족의 “근대성”은 이주, 지주-소작농-자작농의 관계와 함께 장마당(시장), 기업(공장), 금융(은행), 교육(학교), 종교(교회), 의료(병원), 교통(도로), 출판(도서), 정보(우정), 국가(정부), 사법(법원) 등 다양한 제도와 조직이 어우러진 도시에 대한 설명과 묘사를 필요로 합니다.
100년전 중국 동북지역에서 살았던 선인들은 치렬하게 “근대적인간”으로 살고저 했을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랑만이 있었을것입니다. 그들의 노력과 랑만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할수 있는, 아니, 그렇게 해야 하는 시대가 온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런 시도가 오늘날 중국조선족사회의 변화를 더욱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지도 모릅니다.
【박우 략력】
성명: 박우(朴佑)
성별: 남
출생년월: 1982.3
소속: 한국 한성대학 교양교직학부
전공: 이민사회학, 정치사회학, 동아시아 이주와 시민권 문제, 한국의 조선족 사회
학력: 한국 서울대학 박사과정 수료
한국 서울대학 사회학 석사
연변대학 식품공학 학사
경력: 한국 한성대학 교양교직학부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조교수.
주요 론저:
편저로는《우리가 만난 한국(2012, 한국, 북코리아)、역서로는 《한국과 중국의 사회변동 비교연구》(2013, 한국, 나남), 《중국 동북지역 도시사 연구》(2016, 한국, 진인진)등.
래원: 인민넷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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