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양촌의 오늘은 습근평동지의 덕분이다! 당년에 그가 녕덕에 부임한 뒤 처음으로 기층에 내려올 때 바로 우리 촌에 와서 촌민들이 자체우세를 발휘하고 사상을 해방하며 사로를 넓혀 림업, 재배업 등 다원화 발전의 길로 나아가도록 고무격려해주었다. ” 30년전 습근평동지가 과양촌에 내려와 조사연구할 때의 정경을 회억하는 60세에 난 로지부서기 종상응은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했다.
1988년 6월, 습근평동지가 전국 18개 대규모 빈곤층밀집지역의 하나인 복건 녕덕 지구위원회 서기로 부임했다. 2년도 안되는 사이에 그는 복건동부의 9개 현 향진을 답사하여 촌과 농호에 진입하고 빈곤호를 방문하고 어려움을 알아보면서 촌민들이 빈곤에서 철저히 벗어나게 하기 위해 로심초사했다.
이곳에서 그는 락수물이 대돌을 뚫듯이 부지런히 공력을 들여야 한다고 창도했으며 이곳에서 그는 약한 새가 먼저 날고 현지의 실정에 맞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명화(당시 수녕현 하당향당위 부서기):
그는 우리에게 “사업을 통해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고무격려해주었다.
“하당향은 소문난 ‘인적이 드문 외딴곳’이였는데 습근평동지는 하당향이 설치된 뒤 처음으로 향을 찾은 지구급 지도자이다.” 당시 수녕현 하당향당위 부서기직을 담당했던 류명화가 회억했다.
녕덕시 수녕형 하당향은 당년에 “아침에는 산촌의 바람과 추위를 맞이하고 밤에는 진흙도자기 등불과 마주했다.” 1989년 7월 19일, 습근평동지는 지구위원회 기관의 18개 단위 책임동지들을 거느리고 하당향에 내려와 현장에서 사무를 보았다.
그날은 마침 대서절기의 나흘전으로서 “해볓이 특별히 강했다.” 습근평동지는 아침일찍 수녕현에서 출발하여 두시간 남짓이 차를 탄 뒤 또 두시간 남짓이 산길을 걸어서야 하당촌 어귀의 람봉교에 도착했다.
류명화는 “그가 땀투성이 된 채 목에 걸었던 흰수건으로 땀을 딲으면서 다리우에서 그를 맞이하고 있는 간부군중들과 악수했다. 벗은 흰 와이샤쯔를 다리에 널었는데 땀에 젖어서 축축해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촌민이 건네주는 랭차를 한공기 마신 뒤 습근평동지는 즉각 란봉교 린근에 있는 소학교에서 현장사무회의를 열었다. 그는 당시 향당위 서기였던 양혁주에게 “당신이 주인이기에 중간에 앉아야 한다”고 말했다.
도로가 없고 전기도 없었다. 하당향에 하루속히 전기가 통하게 하기 위해 누군가 가까운 향진에서 전선줄을 이어올 것을 건의했으나 습근평동지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치부하려면 먼저 길을 닦아야 한다는 데 나는 동의한다. 하지만 선로를 가설하여 전선줄을 이어온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안될 것 같다. 전선줄을 이어오는 것은 보기에는 효과가 빠른 듯하지만 실제상 전기료금의 보따리를 짊어지게 된다. 하당촌에는 수리자원이 있는데 우리 자신이 발전소를 세운다면 알을 낳을 수 있는 닭을 잡은 것이나 마친가지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현장에 있던 간부군중들은 연이어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고 있었다!” 류명화는 현장회의가 끝날 때 습근평동지는 현장에 있는 여러사람들에게 “사업을 통해 군중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고무격려했는데 “이 말을 나는 줄곧 마음속에 기억하고있다”고 말했다.
래원: 인민넷-조문판 | (편집: 임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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