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가무단 창단 70돐 기념 혜민공연 무대에 선 방초선. |
북경에서 로후를 보내고 있는 소프라노 방초선(85살)과 얼마전부터 자투리 시간을 리용해 꾸준히 련락해 왔다. 그리고 위챗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힘있고 박력 넘치는 소리를 강점으로 하는 소프라노로서 일명 ‘불꽃 소프라노’라는 이명을 가진 방초선, 음성메시지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에는 상상을 뛰여넘는 강렬함이 있었다. 인터뷰를 진행할 수록 여전히 천진란만함을 간직한 채 열정이 넘치는 그녀의 의외의 반전매력을 엿볼 수가 있었다. 이미 언론에 수도 없이 로출된 그였지만 여전히 그녀가 궁금해졌다.
수많은 외로움을 이겨내고 감내한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가?
“나이가 들어도 음악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고 노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목소리를 선물처럼 거저 받은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노래로 감동을 안겨드리는 것이 저의 소명이겠지요.”
음악인생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련습실이건 무대에서건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난 뒤 얻게 되는 치유와 위안으로 지금껏 잘 살아온 것 같다고 전하는 그는 여전히 ‘음악이 전부’라고 말한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참으로 오랜 시간 음악을 해왔다. 봄에서 겨울, 겨울에서 다시 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소프라노 방초선은 여전히 음악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조선 김책시에서 태여났고 1941년에 부모를 따라 왕청으로 이주했다. 6년 뒤 중국인민해방군 길동군분구문공단에 들어가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후 연변가무단에 전근했으며 1962년에는 중앙음악학원 성악학부를 졸업하기에 이른다. 1975년에 중앙방송에술단에 전근했고 크고작은 국내외 무대를 장식하는 한편 후대 양성에도 게을리지 않는 삶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노래부르기를 즐겼던 어린 방초선의 끼는 전쟁도 앗아가지 못했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들려와도 당차게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불렀던 방초선은 <포화 속의 꾀꼬리>로 불렸다.
그리고 1957년 방초선은 문화부의 부름으로 로씨야 모스크바 제6회 세계청년련환축제 음악콩클 무대에 섰다. 그 콩클에서 방초선은 대중들에게 익숙한 <처녀의 노래>로 110개 나라에서 온 한다는 가수들 사이에서 두각을 내밀며 은상을 거머쥐였다. 이는 이후 그녀가 소프라노로서 수많은 국내외 무대를 장식하며 화려한 커리어를 쌓아가는 발판이 됐다.
그녀의 음악생애에서 남편 왕개평을 빼놓을 수 없다. 1959년 중앙음악학원에서 만나 서로에게 빠져든 두사람은 지금까지 서로의 음악세계를 영향주는 파트너이다. 1980년부터 2003년 사이 왕개평과 방초선은 전국 각지는 물론 미국, 카나다, 일본, 한국 등 나라에서 나란히 부부 음악회를 가졌고 80여차례에 달하는 순회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유럽과 아시아 무대를 종횡무진하면서 타고난 소리와 노력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노래로 그 자신의 이름 뿐 아니라 우리 민족, 나아가 국가를 알린 그녀는 수많은 무대를 거쳐갔지만 고향의 무대가 그 어느 무대보다도 더 설레고 조심스럽다고 한다.
“저를 불러주는 고향이 너무 고마웠어요. 오직 노래하는 것 하나만 바라보고 제 사람 전체를 걸고 매달렸거든요. 최고로 유명한 성악가가 되는 게 제 목표는 아니예요. ‘저 사람이 정말 노래를 잘하는 조선족이다.’, ‘방초선이 있어 자랑스럽다.’ 고향무대에서 그런 평을 듣고 싶어요.”
그녀의 노래에 넋이 나가 열광하는 고향 관객들을 마주하고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편안했다. 주저함도 없고 구김살도 없다. 솔직하고 소박한 말솜씨는 인터뷰 내내 귀를 편안하고 즐겁게 해줬다. 그녀의 특별함은 화려함이 아닌 ‘따뜻함’에서 나오는 듯 싶다. 이 따뜻함과 음악에 대한 사랑이 그녀를 지금의 자리까지 이끈건 아닐가?
방초선에게 음악은 밤을 새도 좋을만한 수다거리이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음악을 놓지 못하는 리유는 우리의 음악이나 미술 등의 예술 교육이 많이 침체됐다는 현실때문이다. 여전히 하고 싶은게 많은 방초선이다. 음악회와 음반 록음 등 음악인으로서 포부를 펼치고 싶다고 한다.
“비단 우리 무대 뿐만아니라 외국에서도 클래식 음악의 관객이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예요. 프로덕션들도 예산 규모를 줄이고 있어요. 그래서 더 사명감이 들기도 하고요. 클래식도 편하게 관람하는 문화에 힘을 보태고 싶어요.”
특정계층만 향유하는 음악으로 남아있기에 클래식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그녀는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인터뷰 말미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처럼 먼 후날 언젠가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내 노래는 세상에 남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살아 숨 쉬였으면 좋겠네요.”라고 보탠다.
래원: 연변일보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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