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金根), 1903년 조선에서 출생. 본명은 김광진(金光珍)이고 별명은 김현(金弦)이며 조선족이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동북항일련군 제8군 3사의 지도자였다. 6살때 부모를 따라 길림에 이주했다. 1924년, 선후로 화룡현 북장동(北獐洞), 대선동(大扇洞) 소학교 교장을 담임했으며 교사라는 신분의 엄호하에 혁명활동에 참가했다. "9.18"사변후, 1932년 6월 녕안현 동경성에서 23명의 무장대오를 조직했는데 "북만공농의용군(北满工农义勇军)"이라고 불렸다. 이 무장대오의 대원들 대부분이 조선족이였다. 가을, 명령을 받고 리연록(李延禄)보충단을 따라 함께 활동하면서 녕안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33년 봄, 녕안에서 왕청으로 이동하여 마대가툰(马大家屯)전투에 참가했다. 1934년 2월, 밀산유격대 참모장을 맡았다. 유격대는 밀산 양수하자(杨树河子)에서 훈련하다가 수적으로 5배나 많은 괴뢰군과 마주쳤는데 김근은 침착하게 대오를 이끌고 적과 6시간 대치하면서 괴뢰영장 등 괴뢰군 10여명을 격살하고 한명도 다치지 않은채 안전지역으로 대오를 이동시켰다. 1934년 10월,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참모처장 겸 경제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1935년 3월, 제4군 2퇀 퇀장을 맡았으며 악질지주분자가 조직한 반동자위단을 매복기습하고 자위단 단장 등 18명을 격살했다. 1936년 8월, 동북항일련군 8군 1사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그는 여러 방면으로 이 의용군대오에 대한 교육과 개조 사업을 진행했다.
전사들의 사상각오를 높이기 위하여 그는 시간을 짜내여 전사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반복적으로 항일부대의 성질을 해석하고 부대와 인민의 관계를 설명하여 전사들로 하여금 자신은 인민자제병이므로 반드시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인민의 리익에 손해주는 일을 절대 해서는 안되며 혁명전사의 모든 행동은 지휘에 따라야 한다는것을 인식하도록 했다. 김근은 골간력량의 양성을 중시하여 당과 단 조직 건설을 강화하고 부대의 자질을 높였다. 당시 일본군은 군사"토벌"을 강화했으며 동시에 회유정책을 실시하여 항일부대를 와해시키려고 시도했다. 10월, 일본군은 가목사에서 김동한(金东汉)을 위수로 한 "치안공작반(治安工作班)" 16명을 파견하여 항일련군 제8군에서 정치투항유인활동을 벌였다. 김근은 이미 확실한 정보를 장악하고있었는데 그는 똑같은 방법으로 교묘하게 함정을 설치하여 투항을 유인하러 온 일본 괴뢰특무들을 소멸했다. 1937년 6월, 제3사 정치부 주임을 맡았는데 당시 적들이 투항유인활동을 더욱 빈번히 진행했지만 김근은 민족의 큰 뜻을 견지했고 혁명의 밝은 전도를 굳게 믿었다. 12월 3일, 흑룡강성 집현현(集贤县) 칠성라자(七星砬子) 밀영에서 3사 경위련(警卫连)의 적에게 투항한 몇명 배신자들이 그의 거처에 뛰여들었다. 배신자들의 협박, 공갈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투항하지 않았다. 그는 이 통일전선부대를 만회하지 못한 유감을 안고 적의 총탄에 맞아 살해당했다. 그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래원: 인민넷 | (편집: 임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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