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윤동주시인 탄생 100주년이다. 모두 함께 우리 민족의 저항시인인 윤동주시인을 기리고 아울러 윤동주시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량심적인 시인과 지식인들을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
1. 윤동주시인은 누구인가?
윤동주(尹東柱)(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감옥에서 28세로 생을 마감한 불운의 시인으로, 어두운 현실속에서 조국과 민족의 현실을 진정으로 가슴 아프게 고민하던 량심적이고 순결한 령혼을 지닌 저항시인이였다. 그는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애족적시인이다. 다만 윤동주는 총칼을 잡고 일제와의 전투에 직접 뛰여들거나 붓을 총으로 삼아 일제를 규탄하는 행동실천형이 아니라 고요히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어둠의 현실을 분석하는 내향적인 자기성찰형의시인이다. 즉 그는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이였다. 윤동주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안고 산 시인으로 부끄러움과 죄의식이 그의 시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식민지 피지배현실에 대해 적극적인 응전태세를 갖추지 못한데 대해 부끄러움에 빠져 괴로워하였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룡정시 명동촌에서 본관 파평인 윤영석과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선생의 누이 김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여났다. 1931년 3월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그해에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동안 공부하다가 1932년에 룡정에 있는 은진중학에 입학하였다. 은진중학교 재학시절에 그는 교내 문예지 편집팀과 학교축구팀의 맴버로 활동하였다. 1935년 9월에 은진중학교 4학년 첫학기를 마친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에 진학하여 3학년 하학기에 편입하였다.
숭실중학교가 이른바 신사참배거부문제로 하여 페교되자 윤동주는 1936년 봄에 다시룡정으로 돌아와 5년제인 광명중학 4학년에 편입되였다. 1938년 2월에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앞으로 의학을 전공하라는 아버지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그해 4월에 서울에 가서 연희전문학교(연세대전신) 문과에 입학하였다. 일제의 억압통치가 더욱 심했던 서울에서 윤동주는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들씌운 재난과 민족적수모를 더욱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되였다. 이와 같은 참담한 현실은 일제에 대한 그의 반항의 정신과 더불어 자기 민족과 나라에 대한 깊은 사랑을 격발시켰다. 1942년 연희전문학교를 마칠 때 졸업기념으로 자기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묶어 출판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것이라고 예상한데다 일본류학을 앞둔 윤동주의 신변에도 적지 않은 위험이 따를것이라는 우려와 출판비부족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42년 4월, 그는 진학을 목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처음에는 도꾜의 립교대학(立敎大學)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그해(1942년) 10월에는 교또(京都)의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영문학과로 옮기였다. 그러나 당시 전시동원체제하의 일본사회에서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조선인으로서 그는 심각한 오뇌와 고통에 휩싸일수 밖에 없었다. 그의 민족적울분과 고독감은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는 일제식민정책에 저항하는 길로 나가게 되였다. 당시 그 어떤 반항도 허락하지 않는 일본사회에서 그는 사상범혐의로 1943년 7월 19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그 이듬해(1944년) 3월 31일에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 실형을 언도받고 일본 후꾸오까형무소로 이감되여 모진 옥고를 겪지 않으면 안되였고 생체실험대상자로 분류되여 성분을 알수 없는 주사를 자주 맞았으며 1945년 2월 16일 그가 오매에도 그리던 민족의 새 아침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해부용으로 사용하려고 구주제대 의학부에서 방부제를 사용하여 그의 시신은 생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였는데 후에 화장되여 한줌의 재가 되여 고향 룡정에 묻혔다. 그가 쓴 많은 글들도 일제에 의하여 압수당하여 지금까지 그 구체적행방을 알지 못하고있다.
2. 윤동주시비 건립의 현황 및 전망
올해(2017년)는 우리 민족의 시인 윤동주의 탄생 백주년이다. 아마도 조선반도의 남북뿐아니라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그를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고있을것이며 시비건립이 여러군데서 추진되고있을것이다. 즉 윤동주를 기리는 행사와 시비건립은 현재형이라고 할수 있다. 윤동주와 그의 시는 한국, 일본, 중국 등 많은 나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인류공동의 재부이다
2016년의 모 기사에 따르면 일본의 시민단체 “후꾸오까에 윤동주시비를 설치하는 모임(이하 모임)”이 후꾸오까 모모치니시(百道西)공원에 시비건립을 타진했지만 2015년 관할 지자체로부터 윤동주가 후꾸오까에서 유명하지 않고, 후꾸오까시에 공헌한 인물도 아니라는 판단 아래 “불허”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윤시인이 숨을 거둔 후꾸오까(福岡)형무소터와 가까운 모모치니시공원은 매년 윤동주추도식이 열리고있다고 한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꼭 이 공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후꾸오까에 윤동주시인의 시비건립은 시간문제일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윤동주시비가 이미 일본에 건립되여있기때문이며 윤동주시비를 마다할 리유가 별로 성립되지 않다고 생각되기때문이다.
또 다른 2016년의 모 기사에 의하면 연변조선족차지주 룡정시에 있는 윤동주의 생가에 윤동주의 동지사대학교 동문이라고 할수 있고 윤동주의 초판 유고시집 출판에 기여했던 한국의 시인 정지용의 시비를 건립하는 협의가 진행되고 정지용시비건립이 추진되고있다고 한다. 윤동주생가의 정지용시비건립도 여러가지 원인으로 진전이 당분간 늦어질수는 있지만 필자는 그 건립도 시간문제일것이라고 생각한다. 윤동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정지용시인의 시비를 윤동주생가에 건립하는것은 윤동주를 기리는 사업에도 도움이 되는 일인것이다. 정지용시인은 윤동주가 본보기로 삼는 시인중의 한사람으로 생전 윤동주은 정지용의 시집에 “걸작”이라는 글씨를 남기기도 하였다. 윤동주가 사망한후 해방뒤 1947년에 《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가 발표될 때 정지용이 소개문을 썼고 1948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될 때는 정지용이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본적이 없이!’라는 내용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현재까지 설립된 대표적인 윤동주시비가 세워진 상황을 본다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는 1968년 윤동주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시비가 세워졌고, 1992년 8월 24일 중한 수교에 힘입어 1992년 9월 23일 윤동주의 모교인 룡정중학교 교정에 윤동주시비가 세워졌다. 그후 1995년 2월 16일 윤동주의 순국일에 윤동주시인을 추모하여 윤동의 모교인 일본 동지사대학교 교정에 윤동주시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특이한것은 윤동주와 정지용의 남다른 인연으로 정지용의 시비가 2005년 12월 18일에 모교인 동지사대 윤동주시비옆에 나란히 세워진것이다.
윤동주시인과 정지용의 시비가 나란히 놓이게 된것은 두 시인의 남다른 인연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윤동주시인이 문학공부를 할 때 정지용을 본보기로 삼은것만은 분명하다. 《정지용시집》이 간행된것은 1935년 10월이였는데 윤동주는 이 시집을 평양에서 1936년 3월에 구입해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고 “압천”이라는 시작품밑에 “걸작”이라고 써놓았다고 한다. 두 시인이 직접 만났는지는 밝혀진바 없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후에 정지용이 이전에 수학했던 동지사대학의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만 일본에서 체포되여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며 우에서 언급했듯이 광복후에 윤동주의 유고가 정지용에 의해 《경향신문》에 소개되기에 이르고 1948년 시집발간때 정지용이 서문을 쓰기까지 한다. 문단에서 이 두 시인이 맺은 인연은 실로 보기드문 일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암울한 시기에 량심과 지조를 지켜온 윤동주의 저항정신은 후세들에 의해 길이 기억되여야 하며 윤동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정지용도 길이 기억되여야 한다. 앞으로 생가에 나란히 선 두 시인의 시비를 룡정에서 볼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우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윤동주시비는 그가 나서 자라고 뼈가 묻힌 고향 룡정에 있는 모교라고 할수 있는 룡정중학, 한국 서울에 있는 모교인 연세대, 일본 교또에 있는 모교인 동지사대에 모두 세워져있다. 그밖에 룡정중학의 교사(校史)전시실에는 동주전시물이 전시되여있고 룡정의 생가가 복구되여 윤동주기념전시물들이 전시되여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한국문인협회, 연세대 등에서, 중국에서는 연변작가협회의 기관지인 《연변문학》잡지사 등에서 모두 각각 윤동주문학상이 제정, 운영되고있다. 아쉬운점은 윤동주를 소개하는 인터넷상 소개글들에 오류가 많다는점이다. 현재 중국의 한어인터넷상의 오류를 례로 든다면 윤동주의 본명이 윤해환(尹海煥)이 아닌 윤해파(尹海波)로 잘못 소개가 되여있다. 이런 오류를 범한 웹사이트들로는 중국작가협회에서 운영하고있는 중국작가망도 포함되여있다.
3. 윤동주와 함께 기억되여야 할 사람들
앞에서 언급한 정지용외에 윤동주와 함께 기억되여야 할 사람들이 또 있다. 바로 송몽규와 강처중이라는 인물이다. 윤동주의 일대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 “동주”(2016)를 보면 그속에도 송몽규와 강처중이란 인물이 나오지만 실제로 이 두 인물은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준 친구들이였다. 윤동주 생애의 가장 절친한 친구를 꼽는다면 바로 사촌형이자 친구, 동지로서의 송몽규를 꼽을수 있으며 그리고 절친한 친구를 또 한명을 더 찾으라면 강처중이란 친구가 있다. 윤동주의 저항정신은 송몽규와 강처중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수 있다. 연희전문학교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입사한 윤동주는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3명이 한방을 썼다. “윤동주는 흡사 송몽규와 강처중의 은행 같았다. 그들은 돈이고 물건이고 필요한것이 있으면 동주를 찾아와 손을 벌렸다”고 한 정병욱의 증언은 그들 셋의 남다른 우정을 립증해주고있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이자 고종사촌형인 송몽규는 저항정신과 독립운동성향이 강한 애국청년이였다. 송몽교의 부친 송창희선생과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선생은 명동소학교를 교회로부터 분리해내여 사회주의성격의 “인민학교”로 만드는데 동조한 사람이며 송몽규는 “인민학교로의 접수”를 위해 그 어린 나이에 어른들을 상대로 연설까지 하고 돌아다닐 지경으로 적극적이였다고 한다. 후에 송몽규는 1935년에 김구계렬의 독립운동단체인 락양군관학교에 가서 독립운동에 관한 교육을 받은적도 있었다. 송몽규는 아마 그때로부터 일제의 요시찰인물로 되였을것이다.
장석주에 따르면 윤동주와 송몽규가 일본에서 체포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앞두고 귀향준비를 서두르던 윤동주의 귀향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윤동주가 사상범으로 교또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된것이다. 그때 송몽규도 함께 잡혀들어갔는데, 이들의 죄명은 “사상불온•독립운동•비일본신민•서구사상농후” 등이다. 1943년 한국 학생대표가 한국독립의 의지를 밝히려고 중국의 장개석과과 미국의 루스벨트대통령에게 가던 도중에 일경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일제는 똑똑하다는 한국학생들을 잡아들였는데, 그때 윤동주와 송몽규도 체포된것으로 보인다.
윤동주에게 두번째로 절친한 친구가 바로 강처중이다. 강처중을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중에서 제2위에 놓는 원인은 강처중이 윤동주의 유품을 보관하고 윤동주의 시집출간을 실제적으로 주도하였다는 사실에서 기인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것은 윤동주가 일본류학을 가서도 조선에 있는 강처중과 편지련락을 끊이지 않고 사상적으로 교류를 해나갔다는 사실에 의해서다. 강처중이 “안전”을 위하여 윤동주의 편지 부분은 페기하고 시만 남겨놓았다는 사실은 그 편지내용에 “극비요소”와 “위험요소”가 들어있지 않았을가 라는 추측도 낳게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강처중은 좌익운동가로6.25를 전후하여 한국에서 처형당한 사람이며 그가 세상에 남겨놓은 단 두편의 짧은글은 리순신과 윤동주를 기리는것이라는점이였다.
일제에 압수된 작품외에 윤동주의 작품들은 친구 정병욱, 강처중과 친인들에 의해 보존되여오다가 1948년에 강처중의 주도로 유고시집출간이 이루어졌으며 정지용의 ”서문”, 강처중의 “발문”과 함께 출간되엿다. 그 전인 1947년에 강처중은 당시 《경향신문》기자로서, 일제 감옥에서 옥사한 무명의 시인 윤동주의 저항시를 《경향신문》지면을 통해서 세상 전면으로 띄워올렸다. 이때 《경향신문》 주간으로 있었던 정지용도함께 역할을 했던것이다. 책출판도 이 두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할수 있는데 정지용은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이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것이다.
이 서문에서 우리는 정지용이 윤동주와 매국적(賣國賊)인 “부일인사”들을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하고있으며 윤동주의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일제시대부일문사들의 역겨운 글과 대조를 하면서 윤동주의 자기성찰의 방법 그대로 민족의 문단을 성찰하고있음을 보아낼수 있다.
강처중은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間道에서 나고 日本福岡에서 죽었다. 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祖國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중략)…”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殞命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를 부르는듯 느껴지더군요.”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의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러나 그후 윤동주의 시집 판본에서 좌익운동가였던 강처중이 쓴 발문은 시대상황에따라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없어졌으며 사람들 기억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있었다. 강처중이 보관해낸 윤동주의 시고들이 윤동주의 개인사에서 갖는 중요한 의미와 비중을 송우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있다. “윤동주가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겨두었던 물품들까지 모두 챙겨서 보관했다가 해방된 뒤에 서울에 온 시인의 동생 윤일주에게 전했다. 그리하여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품중에서, 중학교시절까지의 시와 동시와 습작품들을 제외한 나머지 유품 거의 전부가 강처중에 의해 세상에 남았다. 더구나, 윤동주가 동경에서 자신에게 보낸 편지속에 적어넣었던 5편의 시를 보관해낸 일로 해서 그가 윤동주문학에 기여한 공로는 특히 높이 칭송받을만하다. 강처중이 아니였더라면, 윤동주가 목숨을 빼앗긴 땅 일본에서 쓴 시는 단 한편도 세상에 전해지지 못했을것이기때문이다.”
강처중이 보관했던 윤동주의 육필시고들중에는 ”팔복“, ”참회록“, ”간“ 등 시와 일본에서 쓴 시 5편 ”쉽게 씌여진 시”,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봄”이 있다.
* 이 글에는 예전에 썼던 글중의 일부도 들어있음을 특히 밝혀둔다.
래원: 인민넷-조문판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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