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전쟁 승리 70주년"(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대일 역사공세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는 중국이 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악몽같은 삶을 조명하고 나서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중국 사법당국 기관지 법제만보(法制晩報)는 8일 "우리는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맞았지만 시간이 치유할 수 상처가 있다는 점을 일깨우려 한다"며 군 위안부 피해자 황유량(黃有良·88), 진아편(陣亞扁·87) 할머니의 비극을 소개했다.
황 할머니를 평생 따라다닌 악몽은 자신의 고향 하이난다오(海南島)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1941년 11월 시작됐다.
일본군은 당시 농사일을 거들고 있던 황 할머니를 성폭행한 뒤 군 위안소로 넘겼다. 위안소에는 황 할머니와 같은 처지의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적지않은 여성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황 할머니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악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황 할머니가 군 위안소에 끌려갔다 왔다는 사실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황 할머니 가족들을 조소하고 멸시했다. 그 손가락질은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졌다.
황 할머니 가족들은 "조소와 멸시가 3대까지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허탈해했다.
역시 하이난다오가 고향인 천 할머니는 14살 때인 1942년 군 위안소로 끌려간 뒤 3년 간 고된 노동과 성 노예 생활에 시달려야했다.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위안소를 탈출하고 나서도 한동안 산속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천 할머니의 악몽 역시 여기에서 끝난 건 아니었다.
퇴역 군인에게 시집간 천 할머니는 행복한 가정을 이뤄 잘 살거라고 마음먹었지만, 임신을 할 때마다 사산했다. 사산은 8번 반복됐다. 군위안소 생활 과정에서 앓게 된 자궁 변형이 원인이었다.
천 할머니는 9번째 임신에서 천만다행으로 여자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황 할머니와 천 할머니는 2001년 다른 6명의 위안부 피해 생존자와 함께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하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피해자 한 명당 2천300만 엔씩 배상하라는 요구도 함께 제기했다.
10년 간에 걸쳐 소송과 기각이 반복됐다. 그러나 일본법원은 최종 판결에서 "가해 사실은 인정하지만 개인이 국가를 기소할 권리가 없다"고 책임을 부인했다.
법제만보는 "10여 년 전 소송을 제기했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 8명 중 6명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2명만 남았다"고 전했다.
쑤즈량(蘇智良)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 주임은 "일본군은 전장에서 혹은 점령지에서 공개적인 폭력을 동원해 중국 부녀들을 위안부로 삶고 비밀리에 현지 여성들을 약탈했다"며 그것은 중국 내 점령지에서 일어난 보편적 현상이었다고 주장했다.
래원: 료녕조선문보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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