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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에는 색조가 없었다
기자단의 일행중 누군가 진부하지만 빠뜨릴 수 없는 물음을 꺼냈다. "원사님의 어릴 때의 꿈은 무엇이었죠?"
그런데 김홍광의 대답은 일행의 기대를 한참이나 빗나가고 있었다. "꿈이라니요? 그때는 먹고 사는 자체가 꿈이었습니다."
사실상 김홍광은 어릴 때 공부를 남달리 즐겼다. 진짜 신이 들린 것처럼 공부 자체가 재미있었다고 한다.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 공부 성적은 또래에서 언제나 앞자리였다. 남다른 흥미라고 할까, 중학교 때에는 물리실험에 흠뻑 빠져들기도 했다.
"용돈을 모아서 부품을 산적 있습니다. 그걸 일일이 조립했지요."
구들에 뒹굴고 있던 부품들이 한데 묶여 반도체가 만들어졌다. 일명 "김홍광"표의 제품이었다. 이 엉성한 제품이 백화점의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낸다는 게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반도체 조립품은 더는 엄두를 내지 못할 사치품으로 되었다. 김홍광이 13살 때 의사로 있던 모친이 페니실린 이상 반응으로 불시에 사망했다. 그때 위로 누나 하나, 아래로 동생 둘이 있었다. 식구가 올망졸망한 집안에는 갑자기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부친은 구들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부친도 김홍광이 18살 나던 해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졸지에 양친을 모두 여읜 집안에는 크고 작은 아이들만 남았다. 장자인 김홍광은 어린 나이에 세대주로 되었다. 그는 교과서 과목이 아닌 크고 작은 가사를 직접 일일이 챙겨야 했다. 그는 새벽이면 눈을 잡아 뜯으면서 일어나 밥을 짓고 어린 두 동생의 도시락을 챙겼다. 누나는 간호사로 근무했는데 직업상 늘 야근을 서야 했던 것이다.
그런 쓰라린 기억에 남는 하나의 "행복"이 있었다. 김홍광은 1975년 중학교를 졸업한 후 장춘 현지에 쉽게 남을 수 있었다. 그때 지식청년이라고 하면 모두 하향 즉 농촌으로 내려갔다. 하향 지식청년은 195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중국에서 자원 혹은 부득불 도시에서 농촌에 내려가 농민으로 된 청년들을 말한다.
"집에 동생들을 돌 볼 사람이 없잖아요? 그 덕분에 농민이 아니라 로동자가 된 겁니다."
김홍광은 전기수리공으로 있으면서 아스라한 전선주에 기어올랐고 두메산골의 골짜기도 누비고 다녔다. 일찌감치 사회에 뛰어들었지만 가난한 살림은 그냥 펴일 줄 몰랐다. 월 로임이 불과 22원 정도였다. 그야말로 한 달을 살면 다음의 한 달을 근심하는 암울한 나날이 지속되었다.
1977년, "문화대혁명"의 충격으로 10년 동안 중단되었던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었다. 중국은 이로부터 지식을 존중하고 인재를 존중하는 봄날을 맞이했다. 공부 밑천이 두둑했던 김홍광은 선뜻이 대학입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때는 4,50명의 수험생 가운데서 겨우 하나 꼴로 대학생이 나오고 있었다.
김홍광은 이듬해 동북전력대학에 입학하는 쾌거를 올린다. 말 그대로 바늘구멍을 빠져나온 것이였다.
"그때는 문과 성적이 너무 떨어져서 더 좋은 대학으로 가지 못했어요."
김홍광은 이렇게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비사를 밝힌다. 그의 화학 성적은 2점 모자라는 만점으로, 수학과 물리, 화학 성적은 크게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어문과 정치 성적이 이런저런 원인으로 합격선에도 이르지 못해 뒷다리를 당겼다.
그때 김홍광이 재고 끝에 지망 신고란에 써넣은 것은 실용학문인 "열에너지의 동력"이었다. 솔직히 생계를 해결할 직업이 첫째가는 고민이었으며 먼 훗날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곤 아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깊고 긴 터널의 저쪽에서 드디어 가느다란 빛줄기가 나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