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서성 신목시 타봉산 자락의 굴야하강반에는 거의 1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오랜 거리구역이 보존되여있으며 그중의 하나가 바로 혁명렬사 왕명의 생가이다.
왕명은 섬서 신목사람이며 1903년 4월에 태여났다. 1922년에 산서성립제1중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신청년》, 《향도》 등 진보적인 간행물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맑스주의 계몽교육을 받았다. 1925년초,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그해 여름에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그해 겨울, 중공 태원지방집행위원회가 설립되였고 왕명은 지방집행위원회 기술서기직을 맡고 학생과 로동자들 속에서 혁명활동을 진행하면서 당원과 당조직을 발전시켰다.
‘4.12’반혁명정변이 일어난 후 염석산은 산서에서 ‘청당운동’을 실시하였고 태원은 피비린내 나는 처참한 공포 속에 휩싸였다. 이 위험하고 어려운 시기에 왕명은 명령을 받고 왕덕창이라 이름을 바꾸고 성당위 특파원의 신분으로 비밀리에 태원, 진중 등지를 오가면서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당조직을 회복하고 재건하였다. 1928년 여름, 왕명은 중공산서 림시성위 위원으로 임명되였으며 1929년 2월, 중공산서성위 서기직을 맡았다.
엄혹한 백색공포 속에서 산서성 당조직과 중공산서성위는 여러번 파괴를 당했다. 1928년말, 왕명은 비밀리에 상해로 가서 당중앙에 사업을 회보하고 청시했으며 또한 <왕명의>라는 제목의 서면보고서를 제출했다. 1929년 3월 25일, 주은래가 작성한 ‘순직성당위와 왕명 동지에게 보내는 중앙의 편지’는 백색공포 속에서 당조직을 회복하고 개건하며 백색구역에서 당사업을 전개하는 데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당중앙의 지시정신과 중앙순직성위의 결정에 따라 중공산서성위가 또다시 파괴된 상황에서 1929년 4월, 중공태원시위가 설립되였고 왕명이 서기직을 맡았으며 이와 동시에 산서성주재 중공순직성위 특파원직을 맡고 산서 중로지구의 당조직 지도사업을 책임졌다. 산서성의 당조직이 여러차례 파괴를 당한 준엄한 정세에 대비해 왕명은 당중앙과 순직성당위의 지시에 따라 당조직을 령도해 태원 및 하동 운성일대의 공장, 농촌, 학교와 군벌군대 속에서 대량의 간고한 사업을 벌려 당조직을 회복, 재건하여 로동자, 농민운동 및 병사운동 사업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29년 7월 21일, 반역자의 밀고로 왕명은 불행하게도 체포되였다. 적들이 그에게 갖은 혹형을 가하면서 당조직과 당원 명단을 말하라고 핍박하였으나 그는 엄하게 꾸짖으면서 시종 당의 비밀을 엄수했다.
1931년 10월 31일, 왕명은 적들에 의해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사형당하기 전에 그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떳떳하게 서서 “국민당반동파를 타도하자!”, “중국공산당 만세!”라는 구호를 높이 웨치며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28살밖에 안되였다.
왕명을 기념하기 위해 1988년 신목현정부는 렬사릉원에 그의 조각상을 세웠다. 오늘날 왕명의 고향에는 천지개혁의 변화가 발생하였고 빈곤현으로부터 전국 100강현으로 발전하였다. 2017년 쾌속발전한 신목현은 이미 신목시로 되였으며 유림국가급 에너지화학공업기지 핵심구역, 전국 석탄 주요생산지로 발전하였다.
래원: 연변일보 | (편집: 장민영) |
주의사항: 1. 중화인민공화국 해당 법률, 법규를 준수하고 온라인 도덕을 존중하며 일체 자신의 행위로 야기된 직접적 혹은 간접적 법률책임을 안아야 한다. 2. 인민넷은 필명과 메모를 관리할 모든 권한을 소유한다. 3. 귀하가 인민넷 메모장에 발표한 언론에 대하여 인민넷은 사이트내에서 전재 또는 인용할 권리가 있다. 4. 인민넷의 관리에 대하여 이의가 있을 경우 메모장 관리자나 인민일보사 네트워크쎈터에 반영할수 있다. |
많이 본 기사 | 24시간 | 48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