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에서 기업인으로의 변신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답하는 그의 입담은 분명 타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 작가의 꿈도 지녔었다는 김의진 회장은 문화대혁명 후 대학입시제도를 회복한 이듬해인 1978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에 입학하고 졸업하던 해인 1982년에는 그때 당시 인기가 좋았던 중앙민족번역국에 배치받아 번역과 글쓰기에 종사해 온 문화인이었다. 하지만 80년대 말, 김의진은 8년간의 안정적인 기관공무원생활을 박차고 여행업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처럼 새로운 변신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80년대 말부터 중한 양국간에는 민간교류의 물꼬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양국간에는 수교 전이어서 정경분리(政經分離)원칙을 고수하여 민간교류만 허용하던 시기였다. 김의진은 번연국의 위임을 받고 한국의 중국고찰단 통역을 시작으로 수차 <죽의 장막>이라 불리며 수십년간 서로 벽을 쌓고 살아왔던 한국인들과 만나게 된다. 그때는 한국인들과 조선족 동포들이 만나면 반가워서 남자들도 서로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쏟아내는 때였다. 매사에 정열적이고 부지런한 김의진은 통역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는 외에도 문화,국정이 틀려서 중국과의 교류에서 의사소통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업체와 관련 인사들을 진심으로 도와 나섰다. '진심은 통한다'고 이국땅에서 이토록 친절하고 똑똑한 조선족 젊은이를 만난 한국인들은 김의진에게 강한 호감을 갖게 된다. 김의진은 이러한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지며 중국을 찾는 한국업체와 한국인들은 너도나도 통역으로 지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중국방문 행사와 관련된 업무를 김의진에게 맡기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 와중에 젊은 청년 김의진은 빠른 템포에 생산주기가 짧고, 노력의 성과가 금방금방 보이는 여행업에 보람을 느끼며 여기에 깊이 매료된다. 그동안 번역국에서 주로 경전 문헌을 번역해오며 성취감을 잘 느끼지 못했던 딱딱한 일상과는 사뭇 다른 체험이었다. 그러던 차에 북경시 국유기업인 성향무역그룹산하 신화여행사가 김의진에게 그때 처장대우, 당시 국장급 수준에 맞먹는 세칸짜리 아파트 제공 등을 전제로 러브콜을 보내왔다. 당시 아파트도 아닌 기숙사 식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던 김의진에게는 파격적인 제안이기도 했지만 <사대부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도 바친다(士为知己者死)>고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알아주고 중용해주는 이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심사숙고한 끝에 김의진은 스카웃 제안을 받아들이고 안락한 번역국 생활을 접고 힘들지만 성취감을 만끽할 수 있는 젊은 시장인 여행업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뒤이어 중국여행업계 한국관광객 유치시장을 주름잡기에 이른다. 그리고 보다 더 크고 자유로운 무대를 갈망해온 김의진은 90년에 말에 이르러서 개인사업체 성격의 북진국제여행사 한국부를 설립하고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왔다.
래원: 국제방송 | (편집: 김성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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