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특색의 제품을 만들어가는 훌륭한 녀기업가(5)
ㅡ백산시 팔도강구 반석반찬공장 원해숙공장장의 창업담
2014년 05월 29일 10:49【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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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에선 세대주 가정에선 현처량모
부모님께 효도하는 착한 며느리로, 훌륭한 딸이 되고 현처량모가 되는것이 원해숙녀인의 념원이였다. 결혼생활 35년간 그는 부모에 대한 사랑, 남편에 대한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온 집안 가정화목에 충성을 다 해왔다.
1980년, 24살 꽃나이의 원해숙은 당시 혼강구농기계공장에서 근무하는 김충걸씨와 백년가약을 맺고 맏며느리로 김씨가문에 시집을 왔다. 정작시집을 와 보니 집에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모두 장기병환자로 시름시름 앓고 계셨는데 시어머니는 언녕 반신불수로 되였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시집을 오자부터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친부모처럼 높이 모시면서 온갖 정성을 몰부어왔다. 언제나 돈을 아끼지 않고 맛나는 음식을 장만해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밥상에 올리군했으며 매일같이 시어머니의 오줌똥을 받아내면서도 얼굴한번 찡그리지 않고 옷을 깨끗이 씻어드렸으며 집을 거울같이 환하고 깨끗하게 거두어 이웃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워낙 빠듯한 살림에 시부모의 치료비까지 보태자니 경제곤난이 막심했고 저녁늦게까지 시어머니의 병시중을 들다보면 하루에 2~3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이 뿐이 아니다. 두어린애의 어머니로 된 원해숙은 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또 어린애들도 돌봐주며 밭농사도 짛어야 했기에 매일마다 팽이처럼 드바삐 돌아쳐야 했다. 더우기 가정경제난으로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였지만 오직 시부모의 병치료에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그녀는 짬시간을 리용해 농촌의료위생방면에 관한 서적들을 부단히 탐독하면서 농촌의료림상기술을 허심히 배웠다. 하여 그녀는 끝내 농촌맨발의사(호사)합격증을 타게 되였다.
농촌맨발의사(호사)가 되자 그녀는 시부모를 위해 직접 절로 약방을 떼고 주사도 놓아주어 그의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생존에 더없이 기뻐하며 사람들앞에서 언제나 며느리의 자랑을 하군 했다. 그러던 시아버지는 간경화로 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한체 1988년도에 저세상으로 돌아갔고 시어머니는 1990년도에 세상을 떴다. 시아버지는 림종전에 며느리의 손을 꼭 잡고 "자네는 우리 김씨가문의 가장 좋은 며느리오"라고 말했다.
시부모가 세상을 뜨자 그녀는 또 길림시 영길현 쌍하진으로부터 생활래원이 없는 저의 아버지, 어머니를 집에 모셔왔다. 기업을 꾸리느라 일이 더 없이 많고 다망했지만 언제나 부모를 높이 모시면서 자식의 의무를 담당해왔다.
몇년간 그는 해마다 부모님들을 시병원에 모시고 가 신체검사를 시키고 또 여러가지 보신약을 써주기도 했다. 지난해 겨울 그는 푸짐한 상을 차리고 일가친척들과 동료들을 청해다 아버지, 어머니의 80돐 팔갑생일을 아주 멋지게 치르렀다.
올봄, 그는 또 부모님들을 데리고 해남으로부터 남경, 북경, 광주 등 대도시를 구경시켜 로인들로 하여금 만년생활을 다채롭고 기쁘게 해드리고있다.
원해숙은 부모님들은 잘 모실뿐만아니라 남편을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며 자식들을 엄하게 잘 키워 출세시키고있다.
그의 딸 김기매(34세)씨는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을 졸업한후 또 북경대학 한어언어연구생을 마치고 지금은 자주창업으로 북경에서 자체로 회사를 꾸리고있으며 이미 결혼하여 새가정을 이루었다.
아들 김구(28세)는 한국 연세대학경제관리학부를 졸업하고 지금은 심양, 대련에서 창업하고있다.
현재 원해숙의 가정에서는 혼강구 국태사회구역에 132평방메터에 달하는 살림집에서 3대로소가 남부러움을 자아내며 오손도손 화목하게 살아가고있다(최창남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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