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 또는 순간들을 들라면 아마 첫돌, 결혼, 환갑 등을 꼽을수 있겠다. 특히 사회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제고됨에 따라 관련 의식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형편이다. 금쪽같은 아기가 출생하면 돌잔치를 멋지게 차려주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가약을 맺으면 결혼식도 우리 식대로 흥성흥성하게 치르고 싶으며 한평생 고생하신 부모님들에게 정성이 깃든 환갑상도 마련해주고 싶은게 모든 이들의 소원일것이다. 이렇듯 매 개인의 일생에서 더없이 소중한 순간들을 좋은 추억으로 남게 하기 위해 다년간 최선을 다해 노력해오는 조선족회사가 있는데 이는 바로 북경세천사스튜디오, 북경세천사스튜디오는 지난 2006년 설립이후 각종 사진 비디오 촬영, 돌잔치, 결혼식, 환갑연, 기업행사, 오픈식 등을 무려 천여건이나 성공적으로 수행해왔으며 고객들의 사랑과 신임을 한몸에 지니고 있다.
사진기 하나 들고 시작한 창업
“지난 2005년 회사에서 나와 자체로 창업을 시작할 때는 돈도 없고 인맥도 없고 경력도 없었습니다. 농촌에 계시는 부모한테 손을 내밀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친구들한테 도움을 청할 형편도 안됐습니다.”
연변 안도가 고향인 북경세천사스튜디오 김영걸(41세) 사장은 지난 2004년 북경에 진출, 처음에는 모 미용학원에서 컴퓨터디자인설계사로 있다가 후에는 “경제생활”잡지 사진촬영사로 일했다. 그후 사유로 2005년에 잡지사에서 나오게 되면서 자체 창업의 길을 걷게 됐던것이다. 회사에서 나올 때 손에 쥔 현금은 고작 1,200원, 그나마 800원을 주고 핸드폰을 사다보니 빈털터리상태나 다름없었다. 가장 큰 재부가 바로 손에 든 사진기였다.
“잡지사에 근무하는 기간 오전시간을 리용해 사진기술을 배워주는 학습반에 다녔습니다. 학습반공부를 보면 리론강의는 한시간정도면 끝나고 나머지는 실습시간이였는데 그때 당시 사진기가 없다보니 상당히 불편했습니다.”
사진기술을 배우면서 사진기에 대한 욕심이 많았는데 경제사정으로 사진기를 살 수준이 안됐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의 이런 딱한 사정을 안 친구가 선뜻이 만원을 선대해주어 자신만의 사진기를 갖출수 있게 됐다. 일찍 연변예술학원에서 회화 진수과정을 밟았으며 화가가 되는게 꿈이였던 김영걸 사장은 그때 회화 기초 덕분에 남들에 비해 사진 기교를 쉽게 터득할수 있었으며 기술제고도 빨랐다. 잡지사에 근무하는 기간 인물 촬영으로부터 시작하여 내용물, 취재기사, 광고, 행사 사진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진을 찍었다. 이 과정에서 사진기술이 꾸준히 제고됐으며 전문사진사에 못지 않는 실력을 쌓을수 있었던것이다.
빈주먹으로 창업하다보니 초창기에는 어려움도 많았고 고생도 많이 했다. 우선 사무실이 문제가 됐다. 처음에는 자신이 들고 있던 왕징 남호동원 지하실을 사무실로 리용했다. 아무리 사진기술이 좋다고 해도 손님들은 지하실에서 상담한다면 등을 돌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생각해낸것이 타인의 스튜디오를 빌려 쓰는 방식이였다. 그때는 왕징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관계로 용기를 내가지고 무작정 왕징구역내 사진관의 문을 두드렸다. 자신의 우세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합작의향을 상대방에게 설명했다. 나중에 그는 일승코닥사진관과 계약을 맺는데 성공, 그곳 사무실과 스튜디오를 빌려 썼다. 이어 자신을 홍보해야 했다. 이번에도 무작정 왕징에 있는 여러 잡지사들을 찾아가 자신의 힘든 사정,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한편 잡지사측에서 자신의 광고를 내여주고 자신 또한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잡지사측의 촬영부분업무를 기술적으로 도와주는 방식으로 합작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가지고 지금까지 경한광고, 코리아잡지, 한울타리, 한국성, 벼룩시장 등 매체들과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남한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처음에는 주요업무가 사진촬영이였습니다. 회사제품촬영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족사진, 웨딩촬영, 환갑사진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취급했으며 후에는 비도오촬영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손님들이 이런 질문을 자주 해왔습니다. 돌잔치는 어떻게 하고 환갑상은 어떻게 차리느냐고. 그리고 이걸 맡아줄수 없는지 문의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왕징에는 조선족을 주요상대로 하는 조선족사진사가 거의 없었으며 우리 민족의 결혼식, 돌잔치, 환갑연 등 행사를 진행해주는 이벤트회사도 없었다. 타민족이 꾸리는 이벤트회사는 언어, 문화 차이로 조선족고객들의 요구를 만족시켜줄수 없는 상황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김영걸 사장은 이 분야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 우리 민족 관련의식의 절차나 내용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왕징에 거주하는 조선족로인들을 모셔다가 허심하게 배웠다. 그리고 관련분야의 이벤트들을 하나둘 접수하기 시작했다.
회사업무량이 늘어남에 따라 김영걸 사장은 지난 2006년말에 왕징 남호동원에 120평 규모의 스튜디오를 단독으로 냈다. 이 시기 자체 스튜디오를 갖출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업무량이 점차 늘어짐에 따라 서로간에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따라서 얼마간 자금이 모아지자 일승코닥사진관에서 나와 자체로 스튜디오를 갖추었던것이다. 그후 집주인이 집을 팔게 되면서 김영걸 사장은 최종 회사 사무실과 스튜디오를 현재 위치하고 있는 왕징 금우국제오피스텔로 옮겨왔다.
“유태인이 수천년간 자기 문화전통을 지켜온것처럼 우리 조선족들도 자기 민족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현재 북경조선족중에 타민족과 통혼하는 비례가 적지 않는데 어느 한쪽이 타민족이라도 결혼식때는 꼭 한복을 입고 상차림을 받습니다. 저도 이런걸 보면서 저희들 일 자체가 우리 민족 전통을 지켜오는데 일조한다는데서 긍지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김영걸 사장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동업자 친구들에게 귀아프게 얘기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누르는 샤타 하나하나는 예술품 제작 과정으로 그 사람 일생에 좋은 추억으로 남도록 노력해야 한다는것, 그러니까 이 일은 돈 떠나가지고 사명감으로 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인식하에 세천사는 항상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주기에 애써왔다. 주변에서 가격을 올리라는 권고도 자주 듣지만 김영걸 사장은 요지부동이다. 한편 김영걸 사장은 여태껏 지켜봐도 이벤트를 해서 부자되는 법은 없다고 강조, 자신 또한 사진찍는 재미, 이벤트하는 재미로 지금까지 걸어올수 있었다고 토로했다.
“연변 골안에서 가방 하나 메고 북경에 와서 빈손으로 시작한 내 자신이기에 현재 항상 감사하고 만족한 마음으로 삽니다. 손님 한분이 오면 감사한 마음으로 대하고 또한 이런 믿음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입니다.”
현재 세천사를 보면 단골손님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업무도 조선족 위주로 되어있다. 재미있는것은 세천사를 통해 결혼식을 진행한 젊은 부부들은 애기 돌잔치 때에도 또다시 세천사에 찾고 부모님들의 환갑축수연도 세천사에 맡긴다는것이다. 남한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세상의 사업 성공비결을 확고히 지킨 덕분이라 하겠다. 시장도 언젠가는 변화가 있겠지만 세천사는 손님들이 신임해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할것이며 이를 고수할것이라고 김영걸 사장은 밝혔다.
래원: 중국민족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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