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4일, “황수금 화백 홀치기(扎染) 예술작품전시회”가 청화대학미술학원 전시관에서 개최되였다. 전시회에는 주로 조선족 민속풍토와 장백산 화훼를 주제로 60여폭의 홀치기 회화작품이 전시되였다. 작품들의 미묘한 화면구성과 아름다운 색채미감 그리고 그 내면에 깔려있는 미적정취와 인문정감은 한 예술가의 화려한 예술인생을 조명해준다.
황수금은 1966년 중앙공예미술학원 염직전업을 졸업하고 북경방직과학연구소에서 고급설계사직을 거쳐 고향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1987년도에 연변대학 미술학원으로 전근하여 지금까지 30여년간 후대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조선족 화백이다. 그녀의 예술작품은 전통적인 홀치기 공예기법과 다년간의 탐구 및 실천이 결합된 결정체이다. 흔히 “문여기인(文如其人)”, “화품이자 인품(画品即人品)”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홀치기 예술작품에는 예술가로서의 중후한 기량이 묻어난다. 하여 리덕수 동지는 “황수금 화백의 작품은 조선족의 미풍량속과 그 전통의 문양우에 세워졌기에 그 정감세계는 독특하여 가히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할수 있겠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연변대학 미술학원 리승룡원장은 “나는 황수금의 작품에서 그의 넉넉한 인품과 후덕한 인격을 엿보았다.”고 했다.
중앙공예미술학원의 조선족 녀대생
중앙공예미술학원 성립 56돐을 즈음한 황수금의 홀치기 예술작품전시회는 그의 예술생애의 진지한 고백이고 동시에 자신을 배양시킨 모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는 매개체였다. 황수금은 1961년에 중앙공예미술학원 염직전업에 입학하여 1966년에 졸업하였다. 그때 당시 북경에서 그녀는 보기 드문 조선족 녀대생이였다.
1961년, 아버지의 권유로 연변예술학교 미술학부에서 3년간 공부하였던 그녀는 마침 중앙공예미술학원에서 연길에서 학생을 모집하다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다. 당시 황수금을 비롯한 다섯명의 품덕과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만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평생 교사직업에 이바지한 아버지를 모범으로 삼고 있던 그녀는 꿈을 아버지처럼 교원이 되는것에 두었다. 게다가 연변예술학교에서 3년동안 성적이 줄곧 우수하였기에 졸업한후에 학교에 남아 교원이 되기로 이미 정해진 상황이여서 대학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예롭게도 황수금은 다섯 응시자들중 유일한 합격자로 뽑혔다. 그 시대에 대학에 가는것만으로도 대단한 영예였는데 공예미술업계의 최고학부인 중앙공예미술학원에 합격한다는것은 더구나 너무나 성스럽기만 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학시절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세월이였습니다. 그 시절 아무런 근심걱정이 열심히 공부를 할수 있었습니다.” 그날 전시회의 개회사를 올리면서 황수금은 대학생활을 회억하면서 감동을 억제할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었다.
대학 때 그녀는 조선족 녀수재로 유명했고 예술기량을 련마하는데도 각별히 노력하였다. 각종 문예활동에 참가하여 다재다능한 모습을 선보여 동창들과 선생님들로부터 늘 찬사를 받아왔다. 그녀를 가르쳤던 중앙공예미술학원 전직 원장인 상사나 교수는 “나는 황수금과 그 반의 학생들에게 도안설계와 사생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황수금은 그때 남달리 수업에 열중하는 학생이였습니다.”라고 추억을 더듬었다.
중앙공예미술학원에서 5년간 예술의 날개를 억세게 굳힌 그녀가 바야흐로 실천에 뛰여들려고 할 때 공교롭게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1966년 7월, 황수금이 졸업할 무렵 북경의 “문화대혁명”은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수천만을 헤아리는 대학생들이 사회로 진출하지 못한채 학교에 남아 “혁명”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세였다. 이렇듯 황수금도 학교에서 꼬박 3년을 “혁명”하고나서 1969년에야 북경털실옷공장(北京羊毛衫厂)에 배치받는다.
그러다가 1973년에 북경방직과학연구소로 전근되면서 황수금은 자신의 진정한 재주를 선보이게 된다. 그때 그녀가 설계한 홀치기 염색작품들은 국내의 업계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과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그녀가 설계한 작품의 채용률은 해마다 80%를 초과하였고 단색단염과 천연색단염 연구과제는 영문판 “료망(瞭望)” 잡지에 게재되여 외국에까지 소개되였다.
그 시기 황수금은 이미 홀치기 연구령역의 선줄군이 되였다.
고향을 찾은 고급공예미술사
뛰여난 실력으로 황수금은 북경방직과학연구소의 고급공예미술사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북경의 아늑한 생활과 우월한 사업환경보다 항상 그녀의 마음속에 걸리는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이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연변은 개혁개방을 맞이하며 대량의 고급 인재들이 수요되였다. 당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연길시 문진섭 시장은 동북3성에서 미술설계를 하는 조선족 인재를 찾으려고 애썼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북경에 있는 황수금을 찾아왔다. 문시장의 간곡한 요청하에 그녀는 28년이나 정들여 살던 북경을 떠나기로 작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연변으로 돌아오길 잘 했어요. 연변에 오지 않았으면 오늘날의 예술작품들도 창작할수 없었을거예요.”
1984년 혈소반감소증으로 앓게 된 황수금은 연변병원에 입원하면서 틈을 타 연길시의 여러 방직공장과 옷공장들을 돌아보았다.
“북경은 저와 같은 인재들이 많아요. 그러나 연변은 변강인만큼 전문 인재들이 많이 필요해요.”
고향의 방직공업발전에 헌신하려고 다짐한 그녀는 북경에서 이미 갖춘 70여평방메터 되는 보금자리, 역시 방직공업부문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의 직장,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들의 학업 등 모든것을 내걸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문진섭 시장이 필요한것이 있으면 요구를 제출하라고 했을 때 그녀는 그저 북경에서 살던 아빠트와 비슷한 집 한 채만을 요구했을뿐이다. 그 시기 그녀는 다만 락후한 민족방직공업을 개변시키려는데 기여하려는 일념뿐이였다.
최초로 홀치기예술장식화를 내놓다
1987년 연변대학 예술학원으로 전근된 황수금은 2005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전문적인 미술인재를 배양시키는데 전념하였다. 이 시기는 그녀의 홀치기 예술인생의 비약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홀치기는 직물에 깁는 방법으로 매고 박고 주름을 놓는 등 여러 가지 수공처리를 거친 다음 얻게 되는 마치 천연경물이 직물에 덮인듯한 감이 나는 무늬찍기효과를 말한다. 홀치기공예기법은 력사가 유구하고 일찍 당나라 때부터 민간에서 널리 류행하였다. 제작공예가 정교롭고 우아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머리수건, 목수건, 고급복장, 실내장식용품 등 제조에 쓰인다.
이러한 전통공예기법을 황수금은 단지 제품을 제조하는데만 사용하지 않고 현대관념과의 접합을 이루어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데까지 성공한다. 그녀는 부단히 노력을 거쳐 국내외에서 최초로 홀치기예술장식화를 창작한 사람이 된다.
“오늘에 와서 사람들의 사상의식은 날따라 세계적인 수준에로 줄달음치고 있고 심미감 역시 현대적인 것으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다종다양한 현대미술작품은 그 제조도구와 색염료 사용에서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어떤 수단을 쓰든지 작품이 독특한 풍격이 있고 창의적이면 그 작품은 성공한것으로 인정받을수 있고 따라서 개인풍격을 나타내는 자기에게 속하는 작품으로 될것입니다.”
황수금은 홀치기공예기법의 기초에서 중국화의 구도형식과 색채면에서는 서양화의 표현방식을 인입시켜 독특한 풍격을 띤 홀치기예술장식화를 창작하였다. 시각적인 면에서 그녀의 작품은 강렬하고 선명한 색채대비, 판명한 선과 부드러운 톤의 조화, 분명하고 명징한 층차감, 절제되면서도 풍성한 소재, 동양적인 운율과 민속적인 색채미감, 그리고 평면적인 현대식 화면구성 등 특징을 꼽을수 있다. 그리고 작품의 소재면에서는 전통과 현대사이의 대화가 돋보이는데 전통적 공예기법을 현대화시키고 그것으로 현대판 공예미술작품의 진수를 향수케하는것이 특이한 점이다. 무엇보다도 도라지, 진달래, 해바라기, 울금향, 올방개, 모란꽃, 백합꽃, 달맞이꽃, 련꽃, 장백산 화훼 등 대표적인 화훼를 소재로 한 작품과 부채춤, 물동이춤, 장고춤, 농악무 등 조선족전통민속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아롱다롱한 색조로 혼연일체의 미적 세계를 구성하여 예술형식과 민족정감의 조화를 이루었다.
1992년부터 현재까지 황수금의 홀치기예술장식화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주요 미술 간행물에서도 소개되였고 수차례나 초청을 받아 외국에서 작품전시회를 가졌었다. 2012년 11월에 북경에서 가지게 된 전시회에서 전시된것은 작품뿐만이 아닌 한 근면한 예술가의 예술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과 휘황찬란한 홀치기 예술인생이였다.
래원: 중국민족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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