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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위기와 그 탈출의 의지-《연변문학》 2009-2010년 소설평

2016년 08월 08일 15:08【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머리말

1. 가난 탈출과 신분상승의 욕구

2. 가정의 파괴와 공동체의 해체

3. 한국과 한국인, 우리에게 무엇인가?

4. 공동체의 유전과 정체성의 혼란

5. 일상과 그 탈출의 욕구

6. 실존, 그리고 자의식

7. 기법의 실험, 그 득과 실

맺는 말


머리말

2009년 1월호부터 2010년 6월호까지 지난 일년반사이의 《연변문학》에 게재된 소설작품들을 읽어보았다. 50여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역시 우리가 처한 사회문화적인 조건과 공동체의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이였다. 본고에서는 이점에 주목하여 지난 일년반동안 《연변문학》에 게재된 소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가난 탈출과 신분상승의 욕구

시장경제와 도시화사회로의 격변, 그에 따른 조선족의 대도시 진출과 한국으로, 외국으로의 이민을 우리는 “두번째 이민”이라고 부른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우리 민족의 중국에로의 이민을 념두에 둔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번째 이민”은 어떤 동력을 밑바탕에 깔고있을가? 다름아닌 가난 탈출과 신분상승의 욕구때문이 아닐까 한다. 개혁개방이전까지만 하여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였다. 특히 우리 민족 구성원 다수가 거주했던 시골에서는 신분상승의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개혁개방이 심화되고 시장경제와 도사화사회에로의 진전이 빨라지면서 이것이 가능해진것이다.

그러나 신분상승 혹은 가난의 탈출은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빠른 신분상승 혹은 인생 대역전이라 할 정도로 급속한 가난 탈출은 더구나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김혁의 중편 “와늘”(2009.1)은 심순애라고 하는, “와늘”이라는 함경도사투리 단어가 입버릇이 된 녀주인공의 운명을 통해 그러한 대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있다.

주인공 심순애는 양녀로 자라다가 양어머니가 죽고 양아버지마저 한족녀성과 재혼함으로써 고2때 학교를 중퇴하고 생활전선에 뛰여든 불우한 아이였다. 미장원일부터 시작하여 관광가이드도 하고 엄마가 한국에 가서 돈을 버는 총각을 만나 좀더 나은 삶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남자친구가 감옥에 갇히게 됨으로써 술집 접대부노릇을 하면서 온갖 모욕과 수치를 견디기도 하며 국제결혼을 시도하다가 사기를 당하기도 하지만 결국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다가 자신의 가게를 개장하기에 이른다. 가난 탈출의 전형적인 모델이라 하여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가난 탈출 과정을 “나”라는 가난한 시인의 신분상승 과정과 련결시켜 제시하고있다. 심순애라는 하층민의 가난 탈출 과정과 지식인의 세속화 신분상승 과정을 련관시킴으로써 물질만능주의 시대 우리 사회의 세속화, 상품화의 특징을 잘 드러냈다 하겠다. 특히 여기서 심순애라는 인물이 겪는 파란 많은 삶은 오늘날 우리 민족이 겪는 여러가지 고난과 불행, 선택과 지향, 가치관 같은것들을 두루 대변하고있어 력사성과 문제성을 동시에 획득하고있다.

오옥련의 단편 "개구리밥"(2009.12)에서 숙이라는 인물은 사랑이나 인간성보다는 경제적으로 유족한 삶을 추구한다. 숙이를 사랑하는 한 남성 “나”의 시점에서 씌여진 이 소설에서 주인공 숙이는 한국인 사장과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기전에 임신했는데 아이가 태여날즈음 한국인 사장은 회사가 부도났다며 하루밤사이에 자취를 감춘다. 아이의 아빠를 찾아가 손해배상을 받아내겠다고 한국에 나가면서 아이를 “나”에게 부탁했던 숙이는 또다시 한국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 새로운 신분상승을 시도한다. 사랑을 포기한 녀성에게 이제 다시 기대할수 없었던 “나”는 불상한 아이를 유치원에 남겨두고 고향에 돌아가 옛 동창생과 만나 결혼한다. 몇년이 지나 짧은 시간이나마 아빠노릇을 했던 그 아이가 생각나 다시 찾아가는데 아이는 정신적으로 문제아가 되여있고 숙이는 자궁암으로 죽음을 기다리고있다.

격변의 시대에 인간의 욕망과 인간성은 모순이 된다. 숙이는 자기에 대한 “나”의 사랑을 리용하여 “나”에게 아들애를 맡겨놓고 새로운 삶을 찾아나서지만 그러한 가난 탈출 혹은 신분상승의 욕구는 암이라는 불치의 병때문에 파탄된다. 그에 비해 “나”는 도덕성의 최후의 보루가 되여 혈연적관계가 없이 한때 그 엄마에 대한 사랑때문에 “아빠”가 되면서 정이 붙었던 정민이를 유일하게 남은 연고자로서 키우게 된다. 물질만능주의 시대 물욕과 도덕, 윤리의 갈등을 표현한것이라 하겠는데, 그만큼 아무리 물질만능시대라 하여도 도덕이나 윤리의 힘은 아직 엄연히 존재하고있음을 확인해준다.

정형섭의 단편 "아들의 집"(2010.6) 역시 가난 탈출이라는 주제를 설정하고있지만 현재 우리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있는, 한국의 로동현장에서 발생한 조선족 로무자들의 운명을 그리고있다는 점에서, 또한 작가의 현장체험이 절실해보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는 작품이다.

우형이라 불리는 주인공은 몇년간 한국에서 노가다를 뛰여 번 돈으로 큰아들에게 집을 사주었고 지금은 결혼준비를 하는 중이란다. 이제 둘째아들에게 집을 사주고나면 고향에 돌아가 마누라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는것이 이른바 그의 코리안드림이 되는셈이다. 그러나 우형은 그 꿈을 실현하기전에 현장에서 쓰러지며 무료로 리용할 수 있는 119도 불법체류자라 부르지 못하고 결국 죽고만다. 기교적으로 아직 미흡한 점이 많은 작품임에도 이 소설이 우리를 감동시키는것은 한국의 인력시장에서 현장을 뛰며 코리안드림을 위해 죽도록 일하는 조선족 로무자들의 비참한 운명이 체험자의 시각에서 사실적으로 그려졌기때문이다. 이민기 최서해의 중국체험소설을 방불케 하는 현장소설이여서 더욱 가치가 있다. 국내에 있는 자식들의 불효와 현장에서 고생하는 로무자들의 대조적인 운명도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구호준의 중편소설 "환(幻)"(2009.8)은 가난 탈출과 신분상승의 욕구가 복합적으로 반영된 문제작이다. “촌놈”으로 태여나 출세를 목적으로 연변1중에까지 갔으나 대학에 가지 못한 주인공 “너”는 청도에 가서 한국회사에 다니다가 스스로 무역회사를 차린것이 성공한다. 그런데 돈의 맛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안해에 대해 무관심하고 오히려 밖에서 애인을 두며 살아가던중 비서로 들어온 미영이가 안해에게 입은 은공을 갚기 위해 안해 대신 복수해주는 의미에서 회사를 부도냈다는것. 그 과정에 아버지는 선후 6차례 면도도구를 주며 그 특유의 방법으로 귀띔을 하고 사랑하던 정경리는 회사가 망할줄을 미리 알고 “너”에게 미영이를 주의하라 경고하고는 사표를 내고 토장공장을 차리며 “너”가 어려울 때 파트너로 나타나 도와준다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기본내용이다.

삶의 의미는 경제적인 풍요나 신분상승에만 있는것은 아니며 가정이나 사랑과 같은 인륜의 원칙을 어길 때 물질적 풍요나 사회적 신분은 의미가 없어진다는 리치를 보여준것이라 하겠다. 물질만능시대 도착(到着)된 성공의 의미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소설이지만 선후 6차에 걸쳐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면도칼의 상징적인 의미가 잘 밝혀지지 않는 등 서사적 장치의 정교성면에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우리 소설들에 가난 탈출과 신분상승의 욕구가 표현될 정도로 이 주제의 작품들은 많다. 여기서 론의된 작품은 그중 대표적인 몇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도시화시대 우리의 삶에서 가난 탈출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알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2. 가정의 파괴와 공동체의 해체

상기 소설들에서 알수 있는바와 같이 가난 탈출이나 신분상승을 위해 치른 대가는 막대하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가혹하고 가슴아픈 대가는 아마도 가정의 파괴와 공동체의 해체가 되지 않을가 한다.

가정 파괴의 문제는 이제 우리 소설의 중요한 주제가 되였다. 강호원의 중편 "방문"(2009.5)에서 제시한 핵심적인 주제는 가난 탈출과 신분상승의 문제라 하겠는데 이를 위해 치른 대가는 가정의 파괴 혹은 파탄이다.

한국에 돈 벌러 간 안해는 무슨 차관의 집사노릇을 하며 고급옷을 입고 운전기사가 있는 승용차를 타고다닌다. 어떻게 보면 가난 탈출은 물론 신분상승까지도 이루었다 하겠는데 이와 더불어 그녀는 남편과의 리혼을 “통보”한다. 리유란 사담 후세인같은 가부장적인 성격을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것. 한편 안해와의 관계가 이제 끝나가고있음을 느낀 남편은 고향에서 차집 녀사장과 외도를 하며, 한국에 돈 벌러 간 형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돈 벌러 한국에 간 다른 녀성과 동거한다. 가정의 파괴를 의미하는것이다.

코리안드림으로 파괴되는 조선족의 가정, 그 문제점들을 실화적인 이야기속에 담고있는 이 작품은 서사적으로 려행소설의 형태를 갖추고있다. 한국방문수속때부터 한국에 입국하여 보고 듣고 느낀것들을 전개하다가 마지막 귀국 비행기에서 내려 아들을 만날 때까지의 과정속에 이야기를 담아낸것이다. 코리안드림을 통해 가난 탈출은 물론 신분상승까지 이룬 상황에서 이제 과거의 가정을 떠나는것은 시간문제일뿐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노가다나 하면서 외롭다고 고향에서 온 유부녀, 유부남끼리 별 깊은 생각 없이 동거하고 그게 화근이 되여 시간적인 간격과 공간적인 간극을 동반한 가정 파탄을 부른다는것, 이것이 아마도 이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가 될것이다.

한련분의 "낯선 땅"(2009.10)에서는 그러한 신분변화로 인한 가정 파탄을 좀더 절실하게 다루고있다. 한국에 돈 벌러 갔다가 15년만에 귀국한 경숙이에게 고향땅은 이제 낯선 땅이 되였고 사랑하던 남편 또한 루추한 촌로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그녀가 선택할수 있는것은 이제 익숙해진 한국땅이다.

“경숙이는 자신이 이 하늘공중에 떠있는것 같이 느껴졌다. 영원히 어디에도 발을 디딜수 없을것 같은 자신의 존재에 슬픔을 느꼈다.” 이 결구부분의 내용에서도 볼수 있는바와 같이 이들의 가정을 파괴한 진범은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만들어놓은 이질감이다. 그리고 행복해지고자 돈 벌러 떠났던것인데 정작 돈을 벌어도 행복은커녕 뿌리가 뽑힌 상실감이 의식을 허전하게 해준다. 이제 남편과 다시 전처럼 행복하게는 살수 없고 그렇다고 한국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수도 없는 어정쩡한 신분이 오늘날 재한조선족의 현주소가 아닐까싶다. 그런데 작품에서는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돈 벌러 나갔던 주인공이 15년만에 고향땅에 다시 와서 느끼는 낯설음만을 강조하고 한국땅에서 느끼는 소외감은 보여주지 않고있다. 아쉬움이 아닐수 없다.

도시화시대 가난 탈출이나 신분상승을 위해 치른 대가중의 가장 치명적인것은 아무래도 기존 조선족공동체의 해체가 아닐가 한다. 해외 진출과 대도시로의 이민은 조선족공동체 해체의 주되는 원인이라 하겠는데 과거 조선족의 주요 거주지가 농촌이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기존의 공동체가 해체되는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김태현의 "우물댁"(2009.8)에서 주인공 우물댁이 살고있는 리화동은 이제 거의 빈마을이 되여간다. 우물댁은 리화동에 시집을 와서 아들 병구를 낳고 69살의 생일을 맞는데 령감은 5년전에 세상뜨고 아들 병구는 한국에 돈 벌러 갔다가 다시 미국에 옮겨갔는데 웬일인지 요즘에는 소식이 뜸하고 손자가 겨우 두살인데 며느리마저 곧 한국에 돈 벌러 간단다. 생일에 올만한 사람은 이웃집에 사는 갑산댁인데 갑산댁도 아들을 따라 화룡시내 아빠트에 이사를 간다. 유일하게 찾아온 생일 하객은 한족인 왕꺼우네 내외이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그래도 빈 마을보다는 낫다며 그들을 불렀던것이다. 왕꺼우네는 이제 개고기도 잘 먹는 한족인데 처가의 외사촌네가 마을 빈집에 이사를 온다고 한다. 함경도사투리와 한어 낱말이 섞인 연변말이 잘 구사된 이 작품에서 공동체의 해체는 이제 걱정만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작품에는 침울한 분위기가 짙게 느껴지기도 한다.

박옥남의 "계명워리"(2009.11)에서는 좀더 구체적이고 절실하게 이러한 조선족마을의 공동화현상을 그려낸다.

명월네(桂明月)는 10년전 남편 동춘이가 밀항선을 탔다가 종무소식이 된후로 병신아들을 데리고 혼자 산다. 남편이 한족인 왕개에게 진 빚때문에 논도 왕개에게 넘어가서 마작군들에게 밥이나 해주고 시내사람들이 출장왔을 때 끼니를 대여 그 돈으로 아들과 둘이 살아가는셈이다. 마작군이라야 안해가 한국에 돈 벌러 간 촌장 종석이와 그에게 논을 맡기고 월급을 받아먹는 로총각 재덕이, 그리고 한국에 돈 벌러 갔다가 불법체류자로 잡혀 쫓겨온 만식이, 명월네까지 넷이다. 거기에 왕개(왕카이)가 “개씹에 보리알 끼우듯” 끼우곤 한다. 시험을 보고 한국에 가는 무연고자방문취업제 소식에 명월네는 남편의 생사를 꼭 확인해보고싶어 시험을 치려 한다. 그런데 려행사 등록비가 3천원이다. 한국에 갔다온 만식이 돈을 얻어쓰려 했더니 그는 어떤 녀자에게 담보를 섰다가 사채업자들에게 7년간 번 돈을 다 날렸단다. 그래서 결국 왕개의 고리대를 쓸수밖에 없게 되였는데 그는 몸까지 달라하여 귀뺨을 치고 돌아갔으나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일을 벌리기 직전에 재덕이가 아들의 전갈을 듣고 걸어놓은 문을 떼고 들어와 파토를 치는바람에 몸도 지키고 돈도 얻어 다음날 마을에서 사라진다는것이 이 작품의 줄거리이다. 피페해진 조선족 집성촌의 모습이 현실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다음의 인용문은 그러한 피페해진 마을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명월네가 어디에 가서 뭘하고 있는지, 진짜로 한국으로 갔는지 누구도 모른다. 마을의 유일한 젊은 녀자 명월네가 사라진후 마을은 더욱더 생기를 잃어갔다. 명월네가 있어서 남정네들은 오락을 즐겼고 시야비야 싸움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흥미마저 없어졌다. 유일한 오락터인 명월네집은 비바람에라도 무너져내릴것만 같았다.

박옥남은 주로 령남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주목되여온 작가인데 이 작품에서는 함경도사투리를 능숙하게 표현하고있다. 특별한 언어적 천부를 가졌다고 보지 않을수 없다.

류정남의 "까마귀집"(2010.5)에서 덕순이네 형제자매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큰아들은 내외 모두 러시아에 장사를 갔고 큰누나는 일본인에게 시집을 갔으나 잘사는지 못사는지 어머니의 생활비도 보내오지 않지만 둘째누나는 한국에 시집을 잘못가서 어렵게 살지만 가끔 어머니 생활비를 보내온다. 덕순이만 고향에 남아서 마흔이 되도록 장가도 못가고 어머니와 함께 고향을 지키고 있다. 다행히도 왕곰보네가 옛날 은혜를 잊지 않고 덕순이네 농사를 지어주고 푸주간에서 나는 고기도 자주 가져다주곤하여 그럭저럭 살아간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장례식도 왕곰보네가 한족식으로 치러주기로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러시아에 간 큰아들이 나타나서 한족식 장례는 안되며 매장도 안된다고 고집하여 화장하기로 했다. 그대신 준비해둔 관은 왕곰보가 자신이 쓰고 그 풍수 좋은 묘자리도 자신이 묻히겠다고 했다.

여기서 어머니의 화장과 왕곰보의 매장은 이제 조선족의 정착지가 한족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볼수 있다. 이는 또한 기존 조선족공동체의 해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방에 흩어진 조선족은 덕순이네 형제자매처럼 잘 살려고 나간것이 사실은 모두 썩 잘살고있는것도 아닌것 같다. 작품에서는 까마귀의 어미 공양이야기와 덕순이의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겹쳐지면서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동시에 덕순이의 형제자매와 왕곰보네 자식들의 삶의 방식이 대조적으로 표현되여 오늘날 조선족의 삶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있다.

파괴된 가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복구가 될것이고 공동체의 해체 또한 도시화시대에 맞는 또다른 방식으로 재구성될것이지만 그렇게 복구되고 재구성된 가정이나 공동체는 예전의 그것은 아닐것이다. 그래서 우리 작가들은 그러한 가정의 파괴와 공동체의 해체를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소설화했는지도 모르겠다.

3. 한국과 한국인, 우리에게 무엇인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작품에 한국이나 한국인이 등장할 정도로 우리 소설은 이제 한국, 한국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였다. 한국현지에서의 직접적인 체험으로 이루어진 소설들이 점차 늘어나고있는 사실에서도 이점은 확인된다.

정형섭의 "'교포'아저씨"(2010.3)는 아직 성숙된 작품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한국에서의 조선족과 한국인의 관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 작품에서 무우뽑는 작업을 책임진 한국인 손반장에게 있어 중국은 못사는 나라이고 그래서 한국에 돈 벌러 온 조선족은 무시를 받아도 어쩌지 못하는 존재이다. 반대로 조선족인 “나”가 보는 조선족은 한국인 로동자보다 우수하며 돈을 벌어 중국에 돌아가면 한국인 로동자들보다 더 잘 살게 된다는 자존심과 기대감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이다. 앞에서 이미 다룬바 있는 이 작가의 다른 작품 「아들의 집」에서도 한국인 감독은 "'교포'아저씨"에서의 손반장과 마찬가지로 조선족을 감독하고 일을 시켜먹는 리기적인 사람이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서로가 소통이 잘 안되고 인격적으로 불평등한 존재, 이것이 이 작가가 인식하는 조선족과 한국인의 관계인것 같다.

그에 비해 조룡기의 "포장마차 달린다"(2009.7)에서 한국인은 오히려 조선족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무대가 중국이기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면 알게 모르게 조선족으로서의 자격지심이 드러난것이라 할수도 있을것 같다.

상해바닥에서 가이드업을 하다가 한식 포장마차를 차린 준성이와 아직도 가이드를 계속하는 친구 강민, 그리고 포장마차를 한다고 반대하며 헤여진 준성의 녀자친구 춘매. 거기에 포장마차에 알바로 들어온 한국류학생 소희와 그녀의 남자친구 영민의 복잡한 관계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상해 조선족사회의 양상을 한국인과의 관계속에서 사실적으로 드러내면서 조선족과 한국인의 갈등, 상호불신과 상호 의존의 관계를 경제위기를 계기로 반전된 다섯사람의 관계 변화를 통해 보여주고있다. 작품에서 한국인의 부자연(富者然)하는 행위를 비난하는 조선족 청년 강민이나 조선족의 가게에서 일하는것을 품위가 떨어진다고 보는 한국인 류학생 영민의 행동은 리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편견이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낳은 페단이라 하겠다. 이런 페단을 극복하기 위해 동원된 장치가 바로 준성이와 소희의 관계라 하겠는데, 한국경제의 불황으로 힘들어진 준성의 전 녀자친구 춘매의 처지와 중국류학을 중단하고 귀국할수밖에 없게 된 영민의 운명은 이제 한국과 조선족은 뗄래야 뗄수 없는 운명의 공동체임을 시사해준다. 그래서 작가는 조선족인 준성이 한국인 류학생 소희가 아버지의 실직으로 위기에 처해있을 때 구원의 손을 내민다는 사실을 들어 이러한 운명의 공동체를 좀더 튼튼히 다져야 함을 강조하고있는지도 모른다.

장학규의 중편 "탈피"(2010.6)에서는 한국, 한국인과 조선족의 관계를 현지처현상이라는 특별한 측면에서 그려내고있다. 남편이 한국에 돈 벌러 간다며 넣은 수수료를 사기로 날리고 도박에까지 빠진 관계로 아이들 공부 뒤바라지를 위해 청도에 간 안해는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던 끝에 생존을 위해 한국인 배사장의 현지처노릇을 하는데 그 딸 지영이마저 취직자리를 구하던 끝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광고지를 경영하는 한국인 심사장의 현지처가 된다. 물론 어머니와 딸이 한국인 사장의 현지처가 된 경위와 동기는 다르다. 어머니는 생존을 위해서였고 딸인 지영이는 생존을 위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그 한국인 사장에 대한 일정 정도의 사랑의 감정이 현지처노릇을 하게 한다. 따라서 배사장과 심사장이라는 두 한국인에 대한 작가의 평가는 큰 차이가 있다. 배사장은 현지처를 거의 종처럼 대하지만 심사장은 인간으로서 그것도 자기 사업과 삶의 동반자로서 대한다. 현지처노릇을 한 지영이 또한 심사장의 소탈한 성격과 자기를 인간적으로 대하는것에 끌리며 그래서 심장병이 있는 심사장을 진심으로 도와주는것이다.

청도의 한국인과 조선족 사회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린 이 소설은 지영이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네 식구의 운명적변화와 현지처현상이 합리화되는 도덕적인 변화가 도시화, 시장경제사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문제작이다. 다만 소설의 시점이 딸 지영이라는 인물의 립장에서 시작되고 끝나지만 중간에 그 어머니의 시점이 섞이면서 균형이 깨지고 구조적으로 조금 어설퍼진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 구호준의 중편 "환(幻)"에서는 한국, 한국인과 조선족의 관계를 주요 문제로 설정하지는 않고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설정에서 일부 문제점을 로출하고있다. 작품에서는 조선족인 주인공이 녀직원을 데리고 한국인 바이어를 만나 술자리가 만들어졌을 때 한국인 바이어가 그 녀직원의 손을 만지고 육담을 안주로 삼는다고 하고는 그것을 한국인의 본질이라 단언한다. 편견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중국인들이라고 다 점잖고 조선족이라고 육담을 하지 않는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어쩌다가 하나씩 보이는 거지들을 보면 돈냥이나 던져주고 따라다니면서 사진이나 찍고 중국이 어떻다고 떠벌이는 한국인들에 대한 환멸도 있었다.”고 했다. 여기서 “중국이 어떻다고” 한것은 아무래도 중국의 경제적인 후진성과 문명의 락후됨을 의미할것이다. 남에게서 중국이 얼마나 락후되였고 화장실이 지저분하다는 등의 말을 들으면 기분 좋을리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중국의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그래요. 중국거지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옷만 봐도 거지란것을 쉽게 알수 있거든요. 제가 언제 한국 대전에 가보니깐 한국거지는 참 문명하더군요. …(중략)…참, 또 하나 있었어요. 서울역에 가보니 로숙자라고 하는데 대낮에도 신문지 깔고 앉아서 소리를 치면서 술들을 마시던데 저녁이면 집 없어서 지하철역에서 그대로 잔다던데요. 그들은 거지가 아니라 로숙자가 맞지요?”

너의 점잖은 반박은 높아가던 한국인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기에는 충분했다. (이상 52-53쪽)


이런 식의 분풀이는 약한자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것이라 볼수밖에 없다. 즉 약하기때문에 남들이 약하다고 할 때 자존심이 상하고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 이를 분풀이하고싶은것이 약한자의 심리다. 충분히 리해된다. 그러나 작가의 립장에서는 꼭 적절한 표현이라 보기 어렵다. 작가는 지성인으로서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한국, 한국인과 조선족의 전체적 관계를 바르게 정립해야 할 의무가 있기때문이다. 그것만이 조선족이 살아남는 길이니까.

비록 일부 편견과 자기중심적인 판단이 가끔 보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우리 소설에서 한국, 한국인과 조선족의 관계는 점차 객관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정립되여가고있는것 같다. 또 반드시 그렇게 되여야만 한다. 조선족의 기존 공동체가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기 위해 이는 꼭 필요한것이라 생각한다.

5. 일상과 그 탈출의 욕구

못사는 사람의 가난 탈출이 신분상승의 욕구와 직결된다면 이제 상당정도 잘살고있고 그렇다고 더이상 신분상승이 거의 불가능해진 중산층의 경우는 어떠할까? 오늘이 어제가 되고 어제가 래일이 되는 그저 그렇고 그런 무감동의 련속이라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휴머니즘이 약한자에게만 해당되는것이 아니라는 리유가 이 경우에 적용된다.

주계화의 단편 "화려한 날의 서정"(2009.4)에서는 그러한 중산층 녀성, 그것도 30대후반 중년 녀성의 권태와 따분한 일상에서 탈출해보려는 욕구가 단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회사에서는 중견으로 안정된 자리를 차지하고있고 대인관계도 원활한 중년녀성, 그러나 뭔가가 항상 부족됨을 느낀다. “40대를 코앞에 둔 30대 녀자의 마지막 아픈 몸부림이 활화산처럼 자신의 안에서 분출구를 찾아 헤매고있음을 느”끼며 등산, 쇼핑, 썩두부(臭豆腐)구이 먹어보기, 예전에 싫어하던 남자와의 외도…일탈 혹은 탈선에 의한 자극을 끊임없이 시도해보지만 “그 마음의 안식처가 어디인지 혜주 자신도 똑똑히 말할수 없”다. 삶의 권태를 극복 또는 탈출할 아무런 방법도 찾지 못하는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녀는 “자신이 아득한 나락으로 추락하고있음을”“지켜보고있”다. 당연지사다. 중산층의 권태, 특히 중산층 중년녀성의 권태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 즉 실존적인 삶의 문제와 닿아있기때문이다. 적어도 현재까지 근본적으로 그러한 권태를 극복할수 있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밖에 없는것이다.

이 작품처럼 인간의 궁극적인 고민, 즉 삶의 권태, 특히 상당히 위험에 로출된 중년의 권태를 내면적으로 잘 그린 작품은 많지 않다.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의 구조가 단순하여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에 비하면 역시 중년의 권태와 일탈의 욕구를 다룬 김영해의 "배설장애"(2009.5)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많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가정과 사랑, 사랑과 섹스, 욕망과 륜리의 갈등에 시달리는 중년녀성의 복잡한 내면세계가 잘 반영된 이 소설에서 남편과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 준은 “나”의 가정이다. 윤리와 도덕적인 범주내에 있는 일반인의 삶이라 하겠다. “그”, 즉 자유분방한 예술가는 자유와 욕망, 그리고 섹스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보다 두살 아래인 민이는 “사랑”을 의미할것이다. “나”는 남편을, 비록 조금 탈선이나 외도의 흔적을 보이기도 하지만 가정에 충실한 남편을 떠날 용기가 없다. 그래서 오노요코가 될수 있느냐는, 즉 자유분방한 삶을 위해 안정된 가정을 포기할수 있느냐는 예술가의 질문에 뭐라고 답을 줄지 고민한다. 결국 그럼 당신은 오노요코가 사랑했던 존 레논이 될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여기서 예술가인 레논은 어떤 삶의 경지, 목표라 볼수 있지 않을가 한다.

가슴속에 일상에서 탈출하고싶은 욕구가 강하게 웅크리고있지만 끝내 그것을 탈출할수 없는 중산층의 삶이 리얼하게 그려졌다. 작품에서 변비를 해소하고싶은 욕구와 변비해소에 동반되는 출혈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탈의 욕구와 그로 인해 야기될수 있는 위험을 등치시켜 상징적으로 제시한 점도 주목할만하다. 또한 민이라는 인물과 “그”의 존재, 이들의 정체를 한꺼번에 드러내지 않고 점진적, 교차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끝까지 작품의 긴장감을 유지시킨 점 또한 이 작품의 구조적인 특징이 되고있다.

박초란의 "여름을 타는 남자"(2009.6) 또한 중년의 권태와 탈출의 욕구를 반영하고있는데 여기서는 권태에 빠진 주인공이 중산층 남성이다. 그리고 일상의 권태때문에 생명의 활력을 잃어가고있는 그가 탈출의 욕구를 찾게된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해의 충고때문이다. 집에만 붙어 소침해있는 남편을 안해가 낚시를 권해본것이 젊은 후배 녀기자와의 외도로 번져져 힘들어진것은 오히려 안해이다. 안해는 못마시던 술로 그러한 스트레스를 풀어내는데 그러한 안해의 고통때문에 남편은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녀성작가인 박초란이 남성의 시점에서 남성의 권태와 일탈의 욕구를 그려낸것이 아마도 무리였던가본다. 긴장감이 떨어지는 밋밋한 작품이 되였다. 아쉬움이 아닐수 없다. 단, 아직까지 주목할만한 남성 일탈의 작품이 보이지 않아 눈길이 간다.

일상의 탈출 욕구와 관련되면서 조금 다른 차원에서 기존의 도덕과 륜리를 깨고자 하는 충동과 욕구가 표현된 작품들이 있다. 김영해의 "바람"(2009.11)과 김서연의 "낮에는 '륜리'하고 밤에는 '불륜'하라"(2010.2)가 대표적인 례이다.

김영해의 "바람"은 말그대로 한 녀성의 바람기에서 문제를 발견한다. 작품에서 녀주인공 “나”는 남편이 있으면서도 남녀가 어울리는 모임이나 술자리에 서슴없이 나가며 집에 돌아와서도 어느 진달래꽃을 사랑한다는 중견소설가와 메신저 대화를 나눈다. 그 소설가는 결혼은 그냥 결혼일뿐이라면서 자신은 아직 사랑을 해본적도 믿어본적도 없다고 말한다. “누구랑 결혼하는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지금이 중요해. 너랑 나랑 같이 있는 지금이.” 이것은 “나”가 술자리에서 만난 훈이라는 젊은이의 말이다. 그는 결혼할 녀자를 사귀는중이지만 “나”를 좋아한다. 일화는 남편이 외국에 간 사이에 가벼운 애인이 있었고 남편이 귀국하자 아무일 없었던듯 남편과 잘만 사는데 “나” 또한 “누구든지 노크만 하면 범접할수 있는 그런 녀자가, 내가 싫어하는 녀자가 되여가고있었다.” “나”는 방취제시험에 합격하여 출국을 준비하고 남편은 아예 리혼서류를 정리하고 가란다. 그러면서 내주는 그림엽서는 소설가가 보낸것이였다. “나”는 려권을 찢어버리고 그 소설가를 찾아 떠난다.

코리안드림으로 헤여져 사는 젊은 부부들과 결혼관, 가치관의 변화로 외도를 가볍게 여기며 “오늘을 즐기”는 현대인의 삶의 태도가 “나”라는 기혼녀성의 불안한 삶과 그녀 주변사람들의 사랑과 결혼, 섹스에 대한 태도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 소설이다. 바람피우는 녀자들의 란잡한 관계가 그려진것 같은 작품이지만 매 장의 후반부분에 소설가 “당신”과의 관계를 “나”의 추억과 술회의 방식으로 서술하다가 결말에서 잠적해버렸던 “당신” 즉 소설가가 방랑하면서 보낸 그림엽서의 주소를 따라 떠난다는 결말로, 아직은 그나마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는 현대인의 가치관을 확인시킨다. 형식적 측면에서 소설가와의 진지하면서도 가슴 쓰린 사랑이야기와 현재 “나”의 불안정한, 반항적인 남자관계의 사건들이 대조적으로 묘사되여 특이하지만 소설의 감정적인 밀도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서술기법이 해롭지 않았나 하는 판단이다.

김서연의 "낮에는 '륜리'하고 밤에는 '불륜'하라"도 륜리와 불륜의 문제를 다루고있지만 “다시 찾은 영화네 보신탕집엔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개고기들이 바닥에 엎질러져있었고…” 라는 표현에서 확인할수 있듯이 비록 차분한 심리묘사로 일관된 소설이지만 상당정도 잔인함과 암울한 분위기를 느낄수 있다. 김서연의 다수 소설이 그러하듯 이 소설도 성과 외도, 륜리와 불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보신탕집주인과 보신탕을 줄겨먹는 “나”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개에 대한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곁들여 그려내고있으며 따라서 좀 더 암울하고 때로는 잔인한, 섬찍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작가의 고독과 암울한 내면풍경이 비쳐져 20년대 자연주의소설의 흔적을 엿보는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일상의 따분함과 새로운 활력소의 추구는 중산층, 특히 중년의 중산층이 수시로 부딪치는 문제이다. 그래서 일상의 탈출 욕구는 이제 우리 소설의 중요한 문제의식이 됨직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 문제에 주목하고있는 작가는 아직도 대개가 녀성들이다. 박초란의 소설에서 확인할수 있는것처럼 녀성작가의 립장에서 남성의 일탈문제를 다루는데는 한계가 있다. 남성소설가들의 분발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한다.

6. 실존, 그리고 자의식

도시화와 공동체의 해체라는 조선족사회의 격변을 맞으며 조선족의 소설에도 이제 실존적인 삶의 문제가 절박한 이슈로 대두하였다. 앞에서 이미 론의된 여러 주제의 작품들에도 이런 실존의 문제는 피해갈수 없는 화제가 되였다. 그러나 실제로 실존적인 문제를 핵심과제로 다룬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이 문제를 끈질기게 다루고있는 작가가 있으니 그가 바로 리진화이다.

그중에서도 "대화"(2009.1)라는 작품이 대표적이라 하겠는데 이 작품에서 작가는 대화의 단절 혹은 어긋남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되는지를 제시한다. 우(宇)는 나이 서른셋에 산으로 간다. 일종의 도피가 되는데 옛 고향과 옛집은 아직도 거기에 있다. 거기서 아직도 고향을 지키는 이모를 만나는데 권사장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회사에 되돌아가기를 간청한다. 은사님을 찾아갔으나 대화는 “동문서답”이다. 선생님이 잘 듣지 못하기때문이다. 우는 “란, 란”하며 첫사랑의 이름을 부르며 이모네집에 와서 이모곁에서 잠을 자는데 아침에 깨여보니 금란이 옆에 누워있다. 금란은 어렷을적 우와의 꿈을 실현한다며 남편인 대만남자와 함께 나타나 별장공사를 벌린다. 우는 권사장의 요구에 응하기로 하고 이 지역 개발프로젝트를 준비하며 “그 녀자”와 결혼하기로 작심한다.

작품에서 주인공 “나”와 이모의 외마디 대화, 은사님과의 “동문서답”, 첫사랑 금란이와의 추억속의 대화(별장을 짓는것), 권사장, 그리고 “그 녀자”와의 대화(현실적인 삶), 모두가 서로 통할듯말듯한 대화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가? 여기서 과거의 삶은 이제 대화가 통하지 않는 력사속에 묻혀버린다. 이모는 죽고 선생님과도 “동문서답”, 옛사랑 금란이와의 대화가 그나마 통할듯하지만 그녀는 이제 남의 안해이고 산속에 별장을 짓는 일도 옛날 꿈의 실현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물질만능주의에서 비롯된 허영심이라고밖에 볼수 없다. 우에게 있어 현실은 그의 삶에 꼭 필요한 돈과 집을 제공해줄수 있는 권사장과 직장 그리고 깔끔하게 음식상을 챙겨주는 도시인 녀성인 “그 녀자”이다. 비록 도시의 삶, 현대인의 삶이 고달프고 메마르지만 그렇게 살수밖에 없다는 인식. 이것이 이 작품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어찌 보면 현실은 옛날 꿈의 실현된 상태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꿈이 실현되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님을 확인시키기도 한다. 이 과정에 잃어버린것은 실존적인 “나”, 즉 인간의 자의식이 될것이다.

이 작가의 다른 한 작품 "랭면"(2010.6) 역시 비슷한 경우이다. 중학시절 맛있게 먹었던 랭면, 그 맛을 찾는 일은 결국 “나”의 본질 혹은 원래의 “나”를 찾는 일에 다름아니다. 옛날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랭면의 맛은 어디로 가고 이제 아무리 맛있는 료리를 먹어도 맛을 모르는 현실, 거기에 현대인의 비애가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맛은 사실상 배고픔에서 비롯되는데 이제 배고픔을 잃은 상황에서 그리운건 옛날의 그 맛, 객관적으로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맛있어보이지 않는 그 2원짜리 랭면의 맛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가는 글쓰기(현재 하고있는 일)를 접고 “길미옥(吉米屋)”이라고 하는 식당을 경영하고자 한다. 여기서 식당을 경영하는 일은 이제 글쓰기를 통해서 도무지 찾아낼수 없었던 원래의 “나”를 찾는 행위에 다름아닌것이다. 동시에 과거의 패고프던 삶과 오늘의 배부르지만 욕망투성이인 삶중에 어느것이 더 나은 삶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리진화의 또다른 작품 "꽃말"(2009.9)은 선화(仙花)라는 녀주인공의 시점에서 생화를 경영하는 꽃가게와 죽은 사람에게 바칠 물건을 경영하는 수의점(壽衣店)을 대조시키면서 인간의 젊음과 늙음, 생과 사의 의미를 추적한 작품이다. 자의식의 궁극적인 종착점은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은 인간의 실존과 자의식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에 접근했다 하겠다.

엄마가 신선이 꽃을 준 태몽을 꾸어 선화(仙花)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 그래서 그녀는 꽃을 좋아한다. 심지어 꽃가게를 해보겠다는 꿈을 가지기도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갔다. 아버지의 외도장면을 목격한후로 아버지를 미워했으나 악착같이 벌어모은 돈을 아버지의 장례에 다 써버린다. 도시에 있는 집에 돌아와서는 아버지에게 드린다며 민들레꽃을 깨진 컵에 꽂아놓는다. 그것도 화장실이 없어 몰래 소변을 보던 음지에서 자라난 민들레꽃이다. 그리고 자주 가던 “접련화(蝶戀花)”라는 꽃가게 주인이 허초(何草)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로 바뀐다. 안해와 리혼하면서 안해가 경영하던 가게를 자신이 맡았다는것. 둘은 결혼했고 선화는 꿈꾸던 꽃가게의 주인이 되였다. 그런데 길 맞은켠에 늙은 령감이 경영하는 수의점이 생겼다. 꽃가게의 분위기를 깬다고 생각하여 남편 허초를 구슬려 가게를 인수하려고 했으나 령감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래서 선화는 꽃가게 인테리어를 고쳐 수의점이 보이지 않도록 해놓았다. 그래서인지 가게도 잘 되여 분점 두개를 더 개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날 수의점 로인이 찾아와서 자기 마누라가 죽었다며 마누라는 자기가 죽으면 령감이 꽃을 만들어줄것이라는 기대감에 행복해했다고 했다. 로인이 나갈 때 선화는 생화 한줌을 주었다. 그리고 그후부터 자신이 죽은후의 일을 상상해보는 일이 많아졌다. 신기한것은 눈을 감으면 오히려 세상이 훤히 더 잘 보인다는 사실이였다.

수의점 주인령감의 로친에 대한 사랑과 선화의 아버지 죽음에 대한 태도를 대조시키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의 승화가 밀도있게 그려졌다 하겠는데 그러한 철학적인식은 리진화 특유의 유려한 문장과 섬세한 세부묘사, 흔적없는 상징적표현으로 완성도를 높이고있다. 사춘기 성장의 아픔에 지나치게 집착해온 리진화가 이 소설을 통해 삶의 구경(究竟) 문제에 한걸음 더 가까이 접근하고있음은 바람직한 일이다. 문학의 사회성과 력사성에 지나치게 높은 점수를 주는 우리 문학의 풍토에서 이러한 “나만”의 길은 주목받을만하다. 좀더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삶의 구경 문제에 관심을 돌리기를 기대해본다.

7. 기법의 실험, 그 득과 실

앞항들에서도 일부 언급된바 있지만 여기서는 우리 소설의 형식적인 측면에 주목하고자 한다. 엄격히 말하면 작가는 거의 모든 작품을 구성할 때 기법적으로 어떤 방법을 채택할지 고민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그러나 주목이 필요한것은 남다른 특징이 포착되였을 때이다. 작품 전체적으로 영향을 미칠수 있기때문이다.

기법적인 측면에서 소설의 서사구조속에 상징적인 장치를 리용한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김찬동의 "까치나무"(2009.12)와 류정남의 "까마귀집"(2010.5)가 전형적인 례가 되는데 이 두 작가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여서 더욱 주목된다.

김찬동의 "까치나무"는 전체적으로 보면 특별히 뛰여난 작품이라 보기는 어렵다. 소재도 별로 참신하지는 않고 주제도 흔히 볼수 있는 사회문제를 다루고있다. 그러나 로모의 시점에서 령감의 리비아 경력과 아들의 대도시 진입과정을 련결시켜 그렸다는 점과 집앞 나무에 둥지를 튼 까치들의 운명과 아들의 운명을 연계시켜 은유적인 표현으로 작품의 주제를 해명했다는 점때문에 작품의 가치가 돋보인다. 작품에서는 아들 석이의 운명 변화를 까치가 집을 짓고 새끼를 깐것(아들은 북경에 가서 자리를 잡고 녀자친구까지 생긴다), 까치새끼 한마리가 둥지에서 떨어져 죽은것(며느리감이 사장을 따라 한국에 출장을 감), 마지막 까치집에서 뻐꾸기가 날아간것(며느리감이 사장과 배가 맞아 한국에서 산다)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있는데, 이 작품은 이외에도 령남사투리에 속담, 속어 등을 적절히 배합하여 로모의 시점을 강조함으로써 남편과 아들 두 세대의 삶을 리얼하게 그려래고있다.

류정남의 "까마귀집"은 좀더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상징구조를 갖추고있다. 먼저 어머니가 딸꾹질병에 걸렸는데 그 소리가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같다고 하고는 점쟁이(무당)가 까마귀귀신이 붙어서 걸린 병이므로 까마귀고기 12마리를 먹어야 낫는다고 한다. 그에 팔삭둥이 아들 덕순이가 그대로 했는데 마지막 까마귀를 잡는날 늙은 어미까마귀를 공양하던 아들까마귀가 어미까마귀가 덕순이 놓은 덫에 치여죽자 그 옆에 죽어있더라고 한다. 거기에 덕순이를 낳은후 얼마 안되여 까마귀둥지에서 깃 떨어진 까마귀를 품에 안은채 잠들었다는 어머니의 꿈이야기까지 더하여 덕순이의 처절할 정도로 극진한 효성을 표현하고있다. 마지막 까마귀고기를 먹고 딸꾹질병이 떨어진 어머니가 그날밤 조용히 세상을 떴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상징성을 강조한다.

이것이 제일차원의 상징이라고 하면 어머니의 유체를 화장하는 날 왕곰보네집앞 가위나무에 까마귀떼가 나타나서 울었다는 표현은 맏아들의 반대로 왕곰보가 마련해준 관과 묘소를 포기한 반면 왕곰보자신이 나중에 그 관과 묘소를 사용하겠다고 한 사실과 련관되면서 2차적으로 조선족공동체의 해체를 암시해주기도 한다. 이점은 어머니의 아들딸들이 러시아로, 일본으로, 한국으로 진출했으나 그렇다고 특별히 잘살게 된것이 아닌 반면 옛날 어려운 시절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던 왕곰보네는 오히려 마을에서 아들딸 모두 벽돌집 짓고 잘산다는 사실과 대조되면서 조선족의 두번째이민의 모티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준다. 그리고 이러한 두 차원의 상징성은 소설의 전반 스토리와 상호 련관되면서 전체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는 배가된다. 상당히 정교한 구조라 하겠다.

앞항들에서 이미 살펴본 박초란의 "날아라, 룡!룡!룡!"에서 용두레우물에서 날아나온 룡의 상징성과 오옥련의 "개구리밥"에서 개구리밥의 상징성 또한 주목할만하다. 작품의 주제해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의 상징구조는 반드시 정교한 장치가 뒤받침되여야 한다. 구호준의 "환"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선후 6차에 걸쳐 주는 면도칼 혹은 면도기 역시 상당정도 상징적인 구조를 이루지만 스토리와의 련관성 미흡 혹은 장치의 엉성함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있다. 좀더 분발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상징적장치의 리용은 서사구조의 정교성과 의미의 층을 두텁게 해주는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전위성이라는 표현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한영남의 부조리극적 혹은 블랙유머적 기법의 실험은 이러한 상식을 깨고있다. "웬만하면 발을 사랑하시지"(2009.4)가 바로 그렇다.

이 소설은 표제부터가 파격적이다. 그리고 각 장의 제목도 망발, 나발, 비발, 고발, 반발, 제발, 끝발 등 “발”자돌림으로 해학적인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있다. 그리고 부조리극을 련상시킬 정도로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보이는, 유다의 발을 먹는 팔등신녀인, 발족시회뉴스, 겨드랑이 무좀치료를 하는 닥터지바고 등은 어쩌면 아무 의미도 없는 그냥 블랙유머에 불과한듯이 보인다. 그러나 정신팔이의 방귀이야기부분을 읽고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런 무의미해보이는 현상들이 실은 패러디광고물을 보며 주인공이 잠간 상상해본 부조리적인 상황이였던것이다. 결국 신문사 말단기자의 삶의 양상을 약간 자조적으로 표현한것이 되는데 구조적으로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리용하여 비론리적인것 같은 에프소드들의 련결을 통해 부조리의 효과를 내고있다. 거기에 블랙유머적인 과장과 어처구니적 표현이 가미되면서 전체적으로 포스트모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그러나 30원짜리 시작품 원고료 송금표를 소중하게 여기는 주인공 정신팔이의 모습은 그 어처구니의 삶에서도 꼭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러니까 방귀에 관련된 주인공의 신경과민적 반응은 오늘을 살아가는 지식인의 소심한 모습임에 다름아닌것이다.

이 작품은 분명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습관된 소설읽기로는 리해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누군가 말하는것처럼 무의미한 문자놀이에 불과(리유라, "놀이하는 소설―한영남의 '웬만하면 발을 사랑하시지'를 읽고", 《연변문학》, 2009년 5호 참조)한것은 결코 아니다. 무의미한것처럼 보이는 파편화된 사건속에는 분명 의미가 들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품을 소설로서 읽을수 있는것이다. 어떻게 보면 전통적인 소설에 길들여진 독자의 인내심에 대한 도전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작가의 의식은 분명히 이 파편화된 사건속에서 온전한, 혹은 완결된 흐름을 형성하고있다.

이 작품은 "섬둘레 가는 길―어처구니들의 이야기1"(《도라지》, 2006.6)에 이어 내놓은 또 한편의 실험소설("어처구니들의 이야기2"는 아직 읽은바 없다)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첫번째 작품에 비해 부조리적, 플랙유머적인 성격이 한결 강해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의 가치의식이 좀더 객관화되였다. 한영남의 전위적, 실험적, 도전적인 글쓰기가 어디까지 갈지가 궁금하다.

이밖에도 기법적인 실험을 시도한 작품은 더 있다. 김혁의 "와늘"과 조룡기의 "포장마차 달린다" 등 소설에서는 소설 중간중간에 시작품을 인용하고있다. 우리의 고전작품에는 흔히 사용되고있는 형태이지만 현대소설에서는 일종의 실험이라 볼수가 있을것이다. 그런데 김혁의 "와늘"에서는 작품의 서정성을 강화시키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였지만 조룡기의 「포장마차 달린다」에서는 오히려 플롯흐름의 맥을 끊어놓는 역효과를 나타내여 구조적실험의 면밀한 사전계산이 중요함을 확인시켜준다.

실험성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 반드시 짚고넘어가야 할 작품이 있다. 박옥남의 "어머니의 이야기"(2009.6)가 그것이다. 구수한 입담과 령남사투리의 능숙한 구사가 돋보이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일제시대로부터 해방전쟁을 거쳐 해방후 긴 세월을 지나면서 오늘날까지의 력사를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인 어머니의 한평생 인생행로를 그리면서 힘들었던 우리의 삶과 억척스러웠던 우리 어머니세대의 운명을 생동감있게 보여주고있다. 우리 소설에서 력사의 한 단면이 아닌 한 인물의 한평생을 시대의 변화속에 엮어 이처럼 단편소설로 압축시켜 제시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이 작가의 소설적능력을 과시했다 하겠다.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이 꼭 성공한 작품, 뛰여난 작품인것은 물론 아니다. 중요한것은 도전정신이다. 한영남의 실험을 높이 봐준것도 꼭 그 작품이 특별히 우수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도전정신이 있어야만 문학이 진화할수 있기때문이다.

맺는 말

50여편의 작품을 주제설정과 구조적인 완성도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A, B, C 세개 등급으로 나누어보았는데 A는 여러 측면에서 우수한 작품이고 C는 작품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작품, B는 그 사이의 작품들로 우수한 부분도 있지만 약점과 한계도 동시에 로출한 작품들이다. 결과 A에 속한 작품들은 10여편으로 가장 적었고 B에 속한 작품들이 20여편이 되여 가장 많았으며 C에 속한 작품들도 20편 가까이 되여 전체적으로 뛰여난 작품들보다 평범한 작품이나 수준이하의 작품들이 많았다. 물론 필자 개인적인 편견도 전혀 없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하고자 한것인데 여기서 중간 점수를 받은 작품이 다수를 차지한것은 상당정도 작가들의 무책임함에서 비롯된것이 아닌가 한다. 주제 발굴이나 구조 설정, 기법의 사용 등 면에서 재기가 넘치지만 정교함의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기때문이다.

문예월간지에 1년 6개월간 게재된 소설이 련재물을 빼면 60편에 못미친다는것은 역시 우리 소설의 부진을 단적으로 드러낸것이라 하겠다. 물론 작품의 수준이 과거보다 못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향상되였다고 평가할수도 있다. 특히 언어적인 표현이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 주제의식의 다양성 등의 측면에서는 선배작가들을 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우려되는것은 일부 작가들의 문학을 대하는 자세의 경솔함 혹은 진정성의 부족이다. 삶에 대한, 공동체에 대한, 인류 전체에 대한 사명감 혹은 책임의식이 없이 문학에서 성공하겠다는것은 착각이다.

모든 작가들의 분발을 바란다.

* 《연변문학》에 련재한 글입니다.

래원: 인민넷 (편집: 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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