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숙 화상사진(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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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3월에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6사사령부에서는 김정숙을 장백현 도천리에 파견하여 도천리를 거점으로 하강구일대의 부녀사업을 지도하게 하였다. 김정숙은 활동범위를 도천리와 그 일대로부터 조선의 삼수지대에까지 뻗쳐 강력한 지하조직망을 늘여가야 했는데 그 주요활동지구는 압록강 대안의 조선 신파였다. 사령부에서는 또 최희숙을 도천리에서 약 30리 떨어진 요방자에 보내여 김정숙의 신파공작을 뒤받침해주게 하였다. 최희숙이 요방자에 틀고앉아 도천리를 중심으로 한 하강구일대의 부녀회, 청년회, 소년회 조직지도를 맡아준데서 정숙은 시름놓고 신파공작에 정력을 기울일수 있었다. 그만큼 김정숙은 최희숙을 언니라 불렀는데 그들사이의 우정은 남달랐다.
1909년생인 최희숙은 김정숙보다 8년 선배이다. 이들이 서로 알게 된것은 국자가 모아산 서쪽아래 룡암동 부녀회책임자였던 최희숙이 조직의 부름을 받고 1932년 가을 연길현 팔도구유격구 석인촌에 들어갔을 때였다. 희숙이와 정숙이는 석인촌에서 려영준, 리군선, 김룡수, 박룡춘 등과 단합살림을 하였는데 단합호 책임자인 희숙은 그때 벌써 동지들로부터 누나, 언니로 불리웠다. 그후 희숙이와 정숙이는 유격구에서 재봉대와 작식대, 아동단 사업을 하면서 연길현 삼도만과 안도현 처창즈근거지에서도 같이 생활했고 1936년 봄 안도현 미혼진에서 같이 항일련군 제2군 3사부대에 가입하였었다. 그해 7월에 최희숙-김정숙 소속 3사가 6사로 개편되면서 최희숙은 6사 재봉대책임자로 활약하게 되였다.
1936년 그해 봄과 여름 최희숙과 김정숙 등 6사의 녀전사들은 부대를 따라 남만의 무송일대에서 무송현성 진공전투 등에 참가하며 맹활약하다가 8월말에는 또 부대와 함께 무송-장백현계를 이루는 험준한 산맥―되골령을 넘어 장백지대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장백땅에서 벌어진 9월의 첫 전투―대덕수, 소덕수전투로부터 수차에 걸치는 대소전투들에 참가하여 녀전사의 기백을 떨치다가 백두산 최후방기지인 횡산밀영에 들어가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고있었다.
최희숙과 김정숙의 관계를 말해주는 경력담이라 하겠다. 이같은 경력의 소유자이고 선배인 최희숙을 김정숙뿐 아니라 6사의 다른 녀전사들도 최희숙을 언니라고 부르기 좋아하였고 남자전사들은 흔히 누나라고 불렀다. 이는 나이나 경력으로 보아도 년장자를 존중하는 원인도 있겠지만 주요한것은 그가 일상생활과 임무수행에서 항상 남들의 모범이 되고 돋보였기때문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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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겨울 고난의 행군때 있은 일이다. 이해 봄에 6사는 압록강연안에서 춘기공세를 벌리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다가 장백지구를 떠나 몽강일대로 전이하였고 7월에 몽강현 남패자에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으로 편성되였다. 이해 겨울 제2방면군은 몽강 남패자로부터 다시 장백에로의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였는데 적들이 지꿎게 뒤를 물고 늘어지는데서 어떤 날에는 하루에도 몇차례씩 적들과 싸움을 벌려야 했다.
전투는 그칠새 없었다. 뒤에서는 적들이 추격하고 하늘에는 비행기가 돌아쳐 우등불조차 마음대로 피울수 없었다. 시름놓고 밥을 해먹을 겨를도 없었다. 최희숙과 그의 전우들은 생쌀을 씹으면서 길을 조여야 하였다. 그나마 식량이 거덜나 노상 굶어야 하니 눈앞이 가물거려 발을 내디딜 맥조차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따라 눈이 많이 내려 조금만 눈길을 헤쳐도 맥이 진해 헐떡거려야 했다.
하루는 장백현 7도구치기에 이르러 목재소를 치고 여러 필의 말을 끌어왔다. 말고기는 생기였는데 험악한 환경속에서 소금도 없이 날것을 먹자고 하니 메쓰꺼워 넘기기 어려웠다. 그래도 최희숙은 남먼저 말고기를 씹어 넘기였다. 그의 행동에 고무된 전우들도 그를 따라 눈을 질끔 감고 넘기였다.
이렇듯 고난의 행군은 혹심한 추위와 식량난, 피로, 무서운 병마, 간악한 원쑤와의 류례없는 투쟁이였다. 최희숙은 남자전사들에 못지 않게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면서 남다른 의력과 모범을 보이였다. 그는 뭇별도 조으는 한밤중에도 우등불에 언 손을 녹여가며 도정신하여 전우들의 꿰진 옷이나 신발을 기웠고 못다한 일감이 있으면 마저 끝내고야 시름을 놓았다. 하기에 부대의 모든 지휘관들과 전사들은 그의 숭고한 의리와 신념, 인격적매력에 끌리여 탄복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1939년 5월 18일, 항일련군 제2방면군은 장백의 5호물동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땅에 들어섰다. 최희숙은 부대와 함께 조선 무산지구 대홍단전투를 비롯한 일련의 진공작전을 성과적으로 수행한후 5월말에 두만강상류의 화룡현 광평부근에서 감쪽같이 두만강을 건너섰다. 6월 6일에는 올기강전투를 멋지게 벌려 뒤따르는 위만정안군 한개 련을 요정냈다. 그후 부대는 그해 늦가을까지 화룡현일대의 두만강상류지구에서 활동하면서 올기강일대에 후방밀영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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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방면군 재봉대는 사령부가 있는 골짜기에서 퍼그나 올라간 올기강 밀림속에 자리잡고있었다. 이해 1939년 마가을 재봉대는 한달 이내로 겨울군복 600벌을 지을 과중한 임무를 맡았다. 10여명의 녀전사로 말하면 아름찬 과업이였지만 최희숙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대장으로서 선뜻이 맡아나섰다. 그는 재봉대의 편리를 위하여 동무들을 몇개조로 나누었다. 한개조가 도토리나무와 황경나무껍질을 벗겨다가 끓는 물에 광목천을 염색할 때 다른 조는 염색한 천을 해볕에 말리웠다. 그러면 최희숙은 다른 동무들과 손발을 맞추어가며 나머지 재봉대원들과 함께 천을 재단하면서 부지런히 동복을 만들었다.
재봉기는 낮에 밤을 이어 돌아갔다. 최희숙 등은 밤잠도 새우잠으로 에때우며 하다나니 얼굴이 몹시 부었으나 누구 하나 성스런 초소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한데서 그들은 단 20일 내에 600벌의 과업을 앞당겨 완수한 자랑찬 성과를 올릴수 있었다. 제2방면군 총지휘 김일성은 최희숙의 드높은 책임성과 뛰여난 성과에 탄복한 나머지 그에게 금반지와 시계를 선물하였다. 이는 응당한것이지만 최희숙은 “군복을 만드느라고 고생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나만 이런 특대를 받으면…” 하고 송구스러워 몸둘바를 몰랐다.
1940년 3월에 최희숙은 부대를 따라 화룡현 대마록구 삼림경찰대 습격전투와 홍기하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뒤 그는 부대와 함께 안도, 돈화 일대에 진출하였다. 이해 가을이후 제2방면군은 명령을 받고 여러 항일련군부대들과 함께 소분대로 나뉘여 활동하다가 점차 쏘련경내로 전이하게 되였다. 최희숙은 남창수가 지도하는 소부대에 소속되여 화룡현 오도양차 밀림에서 겨울을 나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어려운 처지에 빠져들었다. 식량이 떨어진데다가 사령부와의 련계도 끊어졌다. 먹을것이 없어 최희숙이 난감해할 때 남창수가 여러모로 살뜰히 도와나섰다. 그들은 서로 리해하고 받들던데로부터 끔찍이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최희숙의 본 남편 박원춘이 지방에서 혁명활동을 하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후 종무소식이고 남창수 역시 두번째 안해 리계순이 장백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후 홀몸으로 지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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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2월경 최희숙소속 항일련군소부대 7∼8명은 남창수의 인솔하에 중쏘변경에 진출한 제2방면군사령부를 찾아 동으로, 동으로 움직이였다. 적들이 사처에 우글거리는데서 그들은 낮에는 숨어있고 밤에만 행군할수 밖에 없었다. 벌써 식량이 떨어진지 오랬다. 당년의 화룡현 용신구―오늘의 두만강변 룡정시 백금향 송림촌 매대골 부근에 이르러서는 더 행군할 기력이 모자랐다. 식량을 얻어야만 하였다. 소부대일행은 매대골의 한집에 들어가 식사를 청하고 감자굴에 숨었는데 누군가 당지 경찰분주소에 고발한데서 사태는 험악하게 번져갔다. 금방 하루가 지났는데 적들은 룡정, 지신, 용신, 삼합, 백금 등지의 모든 력량을 동원하여 “만산토벌”에 내몰았다.
소부대는 인차 산속으로 깊숙이 숨어들었다. 그러자 적들은 여기저기에 풍막을 치고 자면서 포위진을 펼치였다. 최희숙 등이 가까스로 령 하나 넘는데 적들은 “투항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집요하게 뒤를 물었다. 송림 덧고래에 이르러서는 서로 접전이 벌어졌다.
맞불질은 치렬하게 번져가는데 최희숙이 다리에 심한 관통상을 입고 비칠거렸다. 게다가 임신한데서 그 자리에 풀썩 물앉았다. 한 전사가 제꺽 부축하는데 덧고래 아래마을 말뚝에 백마 한필이 매여있었다. 이 전사는 급기야 백마를 끌고와서 희숙이를 태우고 포위를 헤치려 했다.
이때 또 한 동지가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희숙이는 삶의 희망을 주저없이 자기 동지한테 돌리였다. 백마는 중상자를 싣고 네굽 안고 달리였다. 희숙이의 얼굴엔 미소가 어렸다.
적들은 계속 추격해왔다. 동지들은 희숙이를 업고 한발자국, 한발자국 간신히 옮겨놓았다. 걸음이 갈수록 떠지고 희숙이는 몸부림치면서 애원하였다.
“절 내려놓아요. 이러다간 모두가 잡혀요. 제발 절 내려놔요!”
했으나 동지들은 희숙이를 업고 걷고 또 걸었다. 적들은 점점 가까이 육박하고 적탄은 아츠러운 소리를 지르며 귀전을 스치였다. 어느덧 적들이 앞을 지르자 동지들은 오른쪽으로 꺾어들었다. 더 지체할수 없었다. 희숙이는 또 모지름을 썼다.
“안돼요. 동무들은 시급히 사령부를 찾아야 해요. 제발 저를 내려놓고 뛰세요!”
자기보다 동지들을 아끼는 절절한 부르짖음, 전우들의 가슴은 애절히 저려났다.
오른쪽에도 적들이 나타났다. 동지들은 희숙이를 한 바위밑에 숨기고 적들을 맞받아 싸웠다. 희숙이는 맥이 풀려 동지들을 도와 적 한놈이라도 요정내자 해도 생각뿐이였다. 다리에서 흐르는 피는 바지가랭이를 흥건히 적시며 바위밑의 눈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희숙의 가슴은 바질바질 타들었다. 상처의 아픔보다도 적들과 생사판가리를 하지 못하는것이 한스러웠다. 이럴 때 희숙이는 왼쪽에서 달려든 적들에게 발견되여 중과부적으로 체포되였다. 동지들은 적과 싸우기에 여념이 없은데서 이를 알리가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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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은 희숙이의 몸에서 금반지와 회중시계까지 빼앗아내니 기뻐 야단이였다. 희숙이는 가슴이 터지는것만 같았다. 악착한 원쑤들에게 생포된것도 가슴아픈 일이지만 제2방면군 책임자로부터 받은 반지와 시계를 눈을 펀히 뜨고 빼앗기니 더욱 그러했다.
희숙에게 있어서 반지와 시계는 힘의 원천이였고 마음의 기둥이였다. 그토록 어려운 전투환경속에서도 흠이 질세라, 잃어버릴세라 소중히 간직하며 혈전의 길을 헤쳐온 그였다.
“희숙동무, 잘 싸웠소. 앞으로 더 잘 싸워주시오.” 반지를 주실 때 하시던 말씀이 생생히 떠올랐다. 희숙이는 눈앞의 원쑤놈을 쏘아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은 공산당원답게, 항일련군의 녀전사답게 싸울 비장한 결의로 이글거렸다.
희숙이는 적들에게 끌리워가면서 모진 동통으로 이를 악물었지만 근심나는것은 애오라지 동지들이였다. 그는 동지들이 무사히 포위를 헤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적들은 희숙이를 송림의 한 마을에 끌고간 뒤 어느 집 뜨락에 내동댕이치고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왔다.
“〈공산당〉계집을 잡아왔으니 어떤 몰골인가 잘 보아라. 누구든 대일본제국을 반대하고 공산당을 따른다면 이런 꼴이 될줄 알아라.”
한놈이 기고만장해서 한바탕 으름장을 놓았다. 다른 놈들도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총박죽으로 희숙이의 배를 툭툭 치며 조롱하였다.
“배속에 든게 무어냐?”
“퉤, 더럽다. 몰라서 묻느거냐? 낳으면 공산당을 낳지 너따위 개같은 놈들을 안 낳는다.”
희숙이는 원쑤놈들을 노려보며 불을 내뿜듯 쏘아붙였다. 그는 심한 갈증으로 전신을 태우다가 입술을 깨물고 결연히 일어나 앉았다.
“공산당원도 사람이다. 구경할것 없다. 그러나 공산당원은 조국과 인민을 위해 일제를 타도하려는 애국자이다… 우리 공산당은 일제놈들과 그 졸개들을 쳐부시고 나라를 다시 찾고야 말것이다. 너희들은 침략자 일제놈들을 할애비처럼 믿으며 개노릇을 하지만 일제는 얼마 못가서 망하게 될것이다!…”
희숙이는 또 모여온 군중들을 바라보며 연설하였다.
“여러 아버님과 어머님들, 오빠, 언니와 동생들, 힘을 내세요. 왜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지 않고선 우린 한시도 잘살수 없어요…”
놈들은 희숙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경황하게 날치였으나 심장의 메아리는 멈추게 할수가 없었다. 급해난 놈들은 뜨락에 모인 군중들을 억지로 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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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처먹은후 놈들은 희숙이를 달라자의 현경찰서로 압송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통이 풀리지 못한데서 담가에 들고가는수 밖에 없었다.
현경찰서에서 놈들은 희숙에게서 무언가 알아내려구 회유책을 쓰기도 하고 무지막지한 고문도 들이댔지만 종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였다. 들었다는것이 고작 이런 말이였다.
“나는 네놈들과 말할게 없다. 나에게서 뭘 얻어들으려니 생각도 말아라. 너들한테 굴복할 내가 아니다.”
랑패상이 된 놈들은 희숙이를 룡정에 있는 제2성립병원 2층 병실에 “입원”시켰다.
“입원”기간에 놈들은 최후의 방법을 썼다. 그 방법이란 얼마전에 귀순한 김재범을 데려다가 희숙이의 마음을 돌려세우는것이였다.
김재범은 워낙 항일련군 제2방면군 7퇀 정위이며 중공 남만성위 후보위원이였다. 1940년 9월 김재범 등 5명은 부대의 파견을 받고 연길현을 중심으로 적후공작에 나섰는데 역시 지방공작에 나섰다가 귀순한 원 1로군 경위려 3퇀 퇀장 김백산의 유혹하에 재범도 귀순하고 말았던것이다.
그러나 적들은 철저히 실패했다. 제딴에는 좋은 방법이라고 희망을 걸었으나 최희숙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비루한 반역자야, 빨리 물러가라! 진짜 공산당원은 백번 죽어도 적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재범이는 별수없이 물러가고말았다. 그후 놈들은 다시 심문을 들이댔으나 최희숙은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았다…
며칠후 최희숙은 놈들의 “입원”실에서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때는 1941년 2월경이였다.
최희숙렬사의 유해는 지금 조선 평양의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여있다. 대성산혁명렬사릉에서도 핵심부의 제일 앞줄 15렬사중의 한 사람으로, 김정숙과 더불어 두 녀성혁명가중의 한 사람으로 안장되여있다.
최희숙렬사에 대한 여러 글들을 두루 살펴보면 적들은 최희숙의 두눈을 도려내고도 부족하여 그의 젖가슴을 헤치고 수술칼로 심장까지 끄집어냈다고 한다. 이것은 드팀없는 기성사실로 되여버렸다. 필자도 처음에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나 연변대학 조문학부 재학시절에 최희숙렬사가 생활하고 활동하였던 봉림동과 룡암동을 수차 답사하면서 필자는 견해를 달리하게 되였다. 최희숙은 그제날 연길현 세린하 사람으로서 애명을 고분이라고 불렀다. 1926년 17살 되던 해에 고분은 자기보다 두 살 어린 가난한 집 총각 박원춘과 부부가 되면서 룡암동 시집에서 살게 되였다.
1981년 5월 5일 필자는 모아산 서쪽가에 자리잡은 봉림동을 처음 찾았다. 그뒤 5월 17일에 다시 찾았는데 최희숙의 본 남편인 박원춘로인은 펄쩍 뛰는것이였다.
“뭐라오? 내가 가서 펀히 뜬눈을 내리 쓸어주었는데.”
“예?!”
필자는 놀라도 웬간히 놀라지 않았다. 아래 5월 17일 오후 2시부터 3시 사이 있었던 회고담을 그대로 적는다.
“1941년에 룡정서 통지가 왔소. 연필로 쓴 룡정총령사관의 호출장이였지. 병원에서 희숙이를 만났드랬는데 그가 먼저 손을 내미니 나도 손을 내밀어 악수하였다오. 헌데 후처 김현숙이 아이를 업고 뒤따라와서 야단치는 판에 나는 어쩔줄 몰랐소. 총각이라던것이 무슨 처가 있느냐며 말이오. 그래도 희숙이가 어른이더구만. 그는 나의 후처보고 ‘나는 살지 못할 사람이니 떠들 필요까지야 있겠’느냐며 위안하는것이였소. 그리곤 동태를 살피는 놈들을 욕하기 시작하는데 아주 견결하였소. 면회는 한 5분쯤 걸렸을가, 말도 별반 못하였소.”
“그후엔 어떻게 되였습니까?”
필자가 뒤를 묻자 원춘로인은 긴숨을 내쉬더니 말을 잇는것이였다.
“3, 4일만에 또 호출이 왔다오. 다시 가보니 희숙이는 이미 잘못되였는데 관을 사서 파묻으라고 하지 않겠소. 그때 보니 놈들은 희숙이한테 아래우 흰옷을 입혔던데 눈을 뜬채로더구만. 그래서 내가 내리 쓸어감겨주었소. 헌데 무슨 사람들이 두눈을 빼고 심장까지 끄집어냈다고 하오. 당치 않을 소리지!”
박원춘로인은 그때까지도 속이 내려가지 않는 모양이였다.
중요한 발견이였다. 필자가 이를 대학교 력사학부의 교수님들께 여쭈었더니 처음에는 웃고마는것이였다. 아마 정신이 바르지 못하다는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다.
참으로 맹랑하였다. 그래도 필자는 내키지 않아 봉림, 룡암 등지의 로인들을 다시 방문했고 박원춘로인의 취재기를 다시 확인하였다. 놀라운것은 그가 말한 력사사실, 시간, 지점이 모두 정확한것이였다. 필자가 만날 때마다의 로인의 정신상태는 정상이였다. 로인은 모두들 내가 허튼소리를 친다고 한다며 대단히 격분해했다.
그해 박원춘로인은 71살이였다. 1990년 7월 19일 로인이 80살 되던 해에 필자는 그를 다시 방문하였다. 그의 기억력은 전과 다름없이 너무나 똑똑하였다. 박원춘은 1926년에 최희숙과 결혼하고 여러해 부부생활을 하였지만 희숙이 1932년 가을 팔도구유격구로 전이한다음 다시 만나지 못하고 소식도 모르고 지냈었다.
그때부터 필자는 최희숙렬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돌리고 찾을수 있는 국내외의 여러 회상기와 자료들을 주의 깊게 살피며 해당분들을 방문하였다. 지적하고픈것은 박원춘로인의 구술이 그른데 없다는 점이다. 연변대학 력사학부의 박창욱교수님은 박원춘로인의 말이 옳다고 긍정하여주었다.
후에 최희숙렬사의 시신은 박원춘에 의해 룡정의 공동묘지에 묻히였고 광복의 그날을 앞두고 다시 룡암동에 옮겨졌다. 후에 연길의 어느 부문에서 뼈를 가져갔다고 한다. 박원춘로인의 말이다.
1990년 7월 19일 봉림동 최희숙의 본 남편 박원춘로인(오른쪽)을 다시 취재(왼쪽은 필자 리함) |
래원: 길림신문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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