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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녀투강" 조선족렬사 안순복과 박덕산 부부

남편도 안해도 피어린 항일의 길(3)

2015년 05월 08일 09:07【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안순복은 1915년 흑룡강성 목릉현 목릉진 신안툰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13세부터 부형의 영향하에 항일구국활동에 참가하기 시작하였으며 1934년에는 밀산항일구국유격군에 참가하여 밀영에서 피복공장 공장장으로 활약했다. 그해에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4년봄에 세워진 항일련군 제4군 피복공장은 흑룡강성 방정현 대라밀 진가량자일대에 위치해 있었는데 주로 4군의 군복, 군모, 탄띠, 군기, 텐트(帐篷) 등을 만들어 공급했다. 당시 가장 큰 어려운 문제는 원단을 구하기 힘든 것이였다.

공장장 중임을 맡은 당시 19세 밖에 안되는 안순복은 필요한 원단을 구하기 위해 안깐 힘을 다 썼다. 그는 주동적으로 전방부대와 련계하여 부대가 도시나 적들의 거점을 공략할 때 로획한 포목들을 적시적으로 후방기지의 련락점에 보내오게 하는 한편 도시에 들어가 있는 우리 지하당과 관계해 지정된 점포에서 비밀리에 필요한 물자를 구입해 들이기도 했으며 항일구국회나 부녀회 등 조직을 통해 구입하기도 했다. 구입 경로가 다르다 보니 원단의 색상이 모두 달랐다. 안순복은 흰 원단은 나무껍질을 벗겨 달이 물로 염색한후 밟거나 판자로 눌러 주름을 편후 사용하였다.

재봉침의 고장도 빈번하였다. 한번은 재봉침에 고장났는데 수리해줄 기술자를 찾을 수 없었다. 안순복은 조급한 나머지 손수 재봉침을 해체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조심스레 부속품들을 하나하나 해체하고는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가면서 고장 원인을 찾았다. 장기간 실밥들을 제거하지 않고 기름을 치지 않아 실이 끊기였던것이다. 이렇게 그녀는 공장의 기술자 역할도 담당하였다.

적들의 봉쇄와 토벌로 피복공장의 운영 조건은 매우 간고하였다.고정된 지점이 없이 경상적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고 부상병들이 들어오면 호리도 해야 했다.

환절기에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몇 날 며칠 밤을 새면서 일하기 일수였다. 졸음에 견디기 어려울때마다 자매들은 바늘로 자기의 팔을 찌르거나 개울가에 나가 찬물로 머리를 적신후 또 다시 일손을 다그쳤다.

1934년 10월, 항일구국유격군은 동북항일동맹 제4군으로 개편되였다. 일본군의 겨울철 소탕에 대처하기 위하여 부대는 부득불 양강북골 밀영으로 전략적인 전이를 해야 하였는데 당시 밀영에는 조선족 어린애가 8명 있었다. 그중에는 안순복의 한 살밖에 안되는 딸도 있었다. 군부에서는 부대의 안전 등을 고려해 애들을 전부 백성들에게 입양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어린애들의 부모들은 처음에는 애들과 함께 죽는한이 있더라도 애들을 입양시키지 않으려 하였지만 안순복이 선참으로 눈물을 삼키며 애를 내놓자 다른 자매들도 모두 그녀를 따라 조직의 수요에 복종하였다.

1938년 여름, 일본관동군은 송화강 하류에서 "삼강대토벌"작전을 펼쳤다. 항일련군은 적들의 토벌과 경제봉쇄를 분쇄하고 합동(哈东), 남만의 항일부대와의 련계할수 있는 통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제4,5군의 주력으로 서정(西征)을 결정하였다.

서정부대는 보청에서 출발하여 목단강하류의 조령진에 집중하였다. 이번 서정에 참가한 대오중에 적지않은 녀전사들이 있었는데 안순복도 그중의 한사람이였다. 안순복은 남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 어깨겯고 싸웠다.

안순복은 전투시에는 전투원으로, 적의 거점을 공략할 때는 선전원으로, 숙영시에는 복무원으로 활약하였다. 안순복이 속한 서정부대는 루산진공략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이때 4군의 녀전사들은 5군녀전사들과 합병되여 5군을 따라 행동하게 되였다.

1938년 8월, 5군 서정부대는 흑룡강성 오상현 경내에 진입하였는데 오상산구에서 활동중 목표가 폭로되여 적들의 수차의 포위공격을 당해 엄중한 손실을 입었다. 4군 녀전사들은 5군과 합병후 1사를 따라 목단강 연안에 돌아와 정돈할때 겨우 8명 밖에 남지 않았다. 안순복은 이렇듯 가렬처절한 행군과 격전중에서도 시종 완강한 의지와 혁명적 락관주의 정신으로 준엄한 시련을 이겨냈다.

안순복의 남편 박덕산은 동북항일련군 제4군 4사 정치부주임이였다. 간고한 전쟁의 나날에 그들부부는 서로 떨어져 싸우다보니 함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몇달씩 종무소식일 때도 많았다. 1938년 여름, 박덕산은 부대를 따라 의란현 경내에서 대합탕(大哈塘)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전투는 의외로 매우 치렬하였다. 부대는 임무를 수행한후 원계획대로 철퇴하게 되였다. 박덕산은 정치부주임으로서 안전하게 후퇴할수 있었으나 그는 주동적으로 부대의 엄호임무를 맡았다. 그번 전투에서 박덕산은 불행하게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1938년 10월 초, 안순복은 부녀퇀의 7명 전사들과 함께 불탑밀(佛塔密)북에서 두도하자를 건너 해림의 반라자에서 적위군 산림무장경찰채벌대의 나무배 세척의 를 로획하여 목단강을 건넌 후 다시 망천령을 넘어 지금의 림구현의 동유수하자 북골에 진입하여 또 다시 몇 개의 대령을 넘어 조령의 삼가자촌을 돌아 우스훈하(乌斯浑河)가에 이르렀다.

어둠이 깃들자 항일련군 남전사들은 강 상류에 숙영하고 8명의 녀전사들은 하류에 숙영하였다. 부대는 이곳에서 하루 저녁 휴식한후 이튿날 목단강 입구에서 7~8리 떨어진 나루터에서 도강한후 극상극밀영의 5군 군부를 찾아가려 계획했다.

때는 늦 가을이 밤이 되자 엄습하는 추위에 견딜수 없었다. 몸을 덮이기 위해 100여명의 대오는 우스훈하강안을 따라 10개의 모닥불을 지폈다. 장거리행군과 전투에 지친 전사들은 모닥불가에 등을 맞대고 앉아 깊은 잠에 빠져들어갔다.

그런데 전사들의 몸을 녹여준 이 모닥불이 그들에게 재난을 가져다 줄 줄이야?!

양자골에 있던 특무 갈해록이 모닥불을 발견하고 즉시 당지 일본수비대에 보고하였다. 조령지구에 주재하던 일본군은 1400여명의 병력을 집중하여 밤새 서정군대오의 숙영지를 포위하였다.

이튿날 아침, 대오는 도강 준비를 했다. 당시 우스훈하는 물이 크게 불어 물살이 급했으며 원 나루터도 물에 잠겨버렸다. 만일 경우를 고려해 군 지도부에서는 물에 익숙한 김세봉참모가 안순복 등 8명 녀전사들을 건느리고 먼저 강을 건너게 하였다. 강변에 도착한 김참모는 먼저 물에 들어가 물 깊이를 시탐하면서 대안을 향해 헤염쳐갔다. 하지만 이때 갑자기 주위에서 총성이 요란스레 일어났다. 적들이 진공을 시작한것이였다. 력량 차가 너무나 현저한 이 뜻밖의 조우전에 대처하여 부대지휘원은 즉시 대부대를 조직하여 반격을 가하는 한편 대오를 지휘하여 산으로 철퇴하였다.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김참모장과도 헤어진 8명 녀전사들은 즉시 전투에 뛰여들었다. 그들은 3조로 나뉘여 각각 버들방천뒤에 은페하였다. 지도원 랭운은 대부대가 산으로 철퇴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자매들에게 사격 명령을 내려 적들의 화력을 자기들쪽으로 분산시키려 하였다.

안순복은 제일 먼저 지도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화력을 집중하여 일제히 적들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적들은 뒤에서 불의의 공격을 당하자 즉시 부분적 병력을 조직하여 녀전사들을 향해 사격해 왔다. 대부대는 이틈에 돌격하여 포위를 돌파했다.. 녀전사들이 강변에 포위된것을 알고 되돌아 공격하여 그들을 구하려 하였으나 적들의 화력이 이미 산구를 봉쇄하여 사상자만 늘어났다. 대부대는 유생력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는수 없이 밀림속으로 철퇴하였다.

적들은 대부대를 더 쫓을수 없게 되자 병력을 집중하여 녀전사들을 생포하려 시도했다. 녀전사들은 적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수류탄으로 불벼락을 안겼다.

드디어 탄알이 떨어졌고 수류탄도 마직막 3개가 남았다. 정면과 좌우 량면은 모두 적들이고 뒤에는 사품치는 강물이였다. 그들은 모두 헤염칠 줄 몰랐고 이미 2명전사는 부상을 입었다.

지도원 랭운과 안순복은 "우리는 공산당원이며 항일련군전사들이다. 물에 빠져죽을지언정 포로는 될 수 없다. 조국의 해방사업을 위해 싸우다 죽는것은 우리의 최대의 영광이다"고 자매들을 격려하면서 "생포하라! 생포하라!"고 고아대며 벌떼처럼 달려드는 적들에게 마지막 3개의 수류탄을 던진 후 의연히 강물에 뛰여들어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이틀후 안순복의 유체는 순난지에서 2리 떨어진 목단강과 합수하는 우스훈하하구에서 발견되였다.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23세였다.안순복은 항일련군 "8녀투강"영웅중의 일원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그녀의 혁명정신과 숭고한 민족 절개는 영원히 청사에 빛날것이다.

래원: 인터넷흑룡강신문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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