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시기 화물을 만재한 상선이 중국 연해항구, 조선반도와 일본사이에서 쉴새없이 드나들며 "해상실크로드(교통로)" 3대 항로중의 하나인 "동양항로"를 형성했다. 이 항로는 아주 긴 시간동안 중국과 조선반도, 일본렬도사이 물질문화교류의 "대화의 길"이 되였다.
백여년동안 중단되였다가 지난 세기 90년대에 중한수교와 더불어 이 해상실크로드가 다시 한번 개통되여 량국의 해상교류가 점점 더 빈번해졌다. 오늘날 이 해상실크로드가 강한 생명력을 발산하면서 중한 량국의 경제무역과 인문교류 역시 전례없이 번창한 시기에 진입했다.
신안고선(新安古船) 번영했던 실크로드 반영
한국국립목포대학 섬문화연구원 강봉용원장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동양항로"는 진나라시기부터 점차 통항하기 시작했고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대량의 비단, 도자기, 향료 등 화물이 녕파 또는 봉래에서부터 흑산도, 영암, 조선반도 남부해안을 거쳐 신라 수도 경주까지 련결됐다. 송나라와 원나라 시기에는 녕파 또는 봉래에서 출발해 흑산도, 영암, 조선반도 서해안을 거쳐 고려왕조 수도인 경주까지 이르는 해상실크로드무역이 전성기에 달했고 송나라와 고려왕조의 사신, 상인들이 빈번하게 오갔다.
강봉용은 《고려사》의 기록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012년부터 1278년까지 송나라 상인이 해로를 통해 고려로 진입한 회수가 129회에 달했고 조선반도를 찾은 송나라 상인 규모가 5000여명에 달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丽图经)》은 1123년 송나라 사신이 배를 타고 녕파에서 출발, 주산군도를 거쳐 개성에 도착한 항해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후 조선과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으로 인해 량국사이의 해로가 막혔고 교류는 주로 륙로를 통해 추진됐다. 그후부터 해양은 왜적들이 제멋대로 략탈하는 지대가 되여버렸다.
새 세기 중한경제무역협력 비전 기대할만하다
1992년, 중한수교이후 오래동안 중단되였던 해상실크로드가 다시 개통되면서 량국의 해상교류가 빈번해지고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한국의 인천항, 부산항과 제주도에는 중국에서 온 대형 컨테이너 화물선과 중국려객을 만재한 유람선이 날마다 정박해 상선이 오가고 화물이 풍성한 성황이 재현되고있다.
"현재 중한무역은 여전히 해상무역을 위주로 하고있으며 량국사이 〈해상실크로드'는 이미 아주 활성화되여 있다. 중한사이 21세기 해상 실크로드의 건설과 깊이있는 발전을 추진할 경우 량국사이의 교류는 더 편리해지고 원가도 더 저렴해질것이다" 한국주재 중국대사관 경제상무처 공사참사관인 주장정은 이같이 말했다.
그외 중한사이는 예로부터 빈번했던 인원교류 역시 해상실크로드발전에 기반을 마련해줬다. 2013년, 중한 인원왕래는 연인수로 800만명을 초과했으며 한국은 이미 중국 최대의 입국 객원국(客源國)이 되였다. 한편 재중 한국류학생과 재한 중국류학생도 상대 국가 외국류학생수에서 최다 점유률을 보유하고있다.
주장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한경제무역협력을 추진하려면 량국 지방 정부 및 기구 사이 협력과 교류를 끊임없이 심화해야 하며 새로운 협력방법을 탐구해야 한다. 중한자유무역협정이 성공적으로 체결될 경우 량국 량자무역의 대부분 제품에 부가되는 관세가 대폭 하락 또는 취소될것이며 이는 "해상실크로드"를 위해 새로운 발전동력을 제공할것이다(신화사).
래원: 길림신문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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