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1)
2016년 04월 19일 15:01【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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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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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에 내가 다닌 그 군관학교에서는 각 중대의 자명종들이 밤중만 되면 도보경주를 하였다. 하루밤사이에 한시간이나 시간반쯤 빨리 가는것은 례사로서 조금도 신기할것이 없는 일이였다. 그 학교를 꾸리는것으로 출세를 한 모질기로 이름이 난 딱장대교장—장개석으로서도 그것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다가 밤중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군복을 주어입고 두시간 동안 보초를 선다는것은 그러잖아도 잠이 늘 부족한 장래 군관들에게 있어서는 고역이나 진배 없었다. 하여 그들은 지구의 자전법칙을 무시하고 시계바늘을 마구 앞당겨 돌려놓고는 부랴부랴 달려가서 교대할 사람을 두드려 깨우는것이다.
하지만 낮에 보초를 서는것은 이와 사정이 전연 달랐다. 특히 사람의 출입이 잦지 않은 뒤문에서 혼자 보초를 서는것은 누구나 즐겨하는 일이였다. 모두들 그 번이 제게 돌아오지 않을가봐 왼새끼를 꼬는 판이였다. 낮에 거기서 보초를 서게 되면 그 딱 하기 싫은 교련을 면할뿐아니라 가외로 생기는 덤이 있었다. 교칙을 위반하고 수업시간에 학교를 빠져나갔던 동창생들이 몰래 돌아올 때는 다들 자진하여 “통행세”를 바치는것이다. 즉 가치담배 한갑 또는 땅콩사탕 한봉지를 코아래진상하는것이다.
어느날 내가 몰래 빠져나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해찰을 하다가 돌아온즉 그 행운의 자리에 마침 낯선 보초 하나가 서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와 면도질을 하지 않은 여윌사한 얼굴. 그가 몸차림에 류의하지 않는다는것은 한눈에 알수 있었다. 해도 그 채양밑의 속눈섭이 긴 까만 눈은 유난히 침착하고도 안상하였다. 거기에 소박하고도 멋진 자태가 서로 어울려서 그는 나로 하여금 미껠란젤로의 준수한 조각상을 련상케 하였다.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그의 얼굴에는 부끄럼타는 어린아이 같은 수집은 미소가 어리였다. 나는 아까와하는 마음에서 혼자 속으로 탄식했다. (가엾게도 저 친구 제가 지닌 매력을 조금도 자각하지 못하는군. 시골내기인 모양이지…)
나는 가치담배 한갑을 꺼내여 슬그머니 그에게 넘겨주면서 넌지시 그 가슴에 달린 이름표를 곁눈질해보았다. 거기에 적힌것은 “제2중대 김학무”라는 몇 글자였다.
“김가? —조선사람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은근히 놀라며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찌 알았으리, 바로 그 김학무가 후일 나의 지기로, 가장 가까운 전우로 될줄을. 더군다나 그때 나는 8년항전의 승리를 한해 앞두고 그가 죽을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소박하고도 강의한 나의 전우 김학무가 서른네살 아까운 나이에 항일의 봉화 타오르는 태항산에서 전사할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로형, 혹시 조선사람이 아니요?”
하고 나는 중국말로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웃는 낯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눈짓으로 나더러 “로형은?” 하고 되묻는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반가와서
“나도!”
하고 조선말로 웨치듯이 대답하였다.
그는 제가 알아맞춘것이 마음에 흡족한듯 입을 벌리고 웃는데 입술사이로 드러나는 이들이 모두 담배연기에 그을려서 가무스름한것을 보아 애연가가 틀림이 없었다. 그후 한두해가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의 지나온 소경력을 알게 되였는데—전에 그는 제남시내에서 대낮에 유명한 일본특무 한놈을 처단한 일이 있었다. 이렇게 안존한 사람이 그런 모험을? 나로서는 상상이 잘 가지 않는 일이였다. 나는 지금도 어떻거다 그하고 처음 만나던 때의 일을 생각하면 쓴웃음이 절로 나군 한다.—정말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몰랐지, 숫제 남더러 시골내기인 모양이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