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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룡 선생, 우리 모두가 그이를 그리는 까닭

2014년 05월 15일 15:39【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들어가며

올해는 정판룡 교수 탄신 80주년이요, 서거 10주기 되는 해이다. 선생은 20세기 중국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교육자, 문학가, 사회활동가로 정평이 나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우리 모두가 선생을 그리는 까닭은 이런 공식적인 평가에 수긍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이는 그의 소탈한 미소와 걸걸한 목소리, 그의 신념과 사상, 사랑과 지혜가 이 연변대학교 캠퍼스의 상록수처럼 푸르싱싱하게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선생을 그리는 까닭, 그리고 선생을 기념하는 의미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고자 한다.

1. 한 편의 감동적인 성장소설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과 선택에 따라 운명을 결정하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훌륭한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Free Will)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거스를 수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고 왕후장상에는 씨가 따로 없는 법, 동서고금의 영웅은 모두 출신이 비천하지만 높은 뜻을 품고 초인적인 의지로 운명에 도전하고 시련을 이겨내고 성공하였다. 역사적 인물도 그러하고 허구적인 설화나 소설의 인물도 그러하다. 나폴레옹이 그러하였고 홍길동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선생 역시 출신은 비천하였다. 전라도 담양의 참빗장수의 아들이다. 1937년 3월, 여섯 살 나이에 부모님의 뒤꽁무니를 따라 압록강을 넘어 타발타발 만주의 영구로 왔다가 다시 아리랑고개를 넘어 저 북만의 상지로 이주하였다.

다 아시는 에피소드지만, 상지조선족초급중학교 3학년 학생이던 정판룡은 1949년 3월 연변대학이라는 민족대학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풍편에 듣고 친구 둘과 함께 불원천리 연변을 찾아왔다. 무작정 입학을 시켜달라고 림민호 부교장에게 떼를 쓰다가 퇴자를 맞았다. 귀뺨을 맞아도 은가락지 낀 손에 맞으라고 했던가, 그들 세 젊은이는 주덕해 교장을 찾아갔다. 입학시켜 주지 않으면 아침마다 교장님의 집무실에 출근해 청소부터 하겠다고 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위(政委)로 하르빈에 머문 적 있는 주덕해 교장을 큰집 어른처럼 믿고 마구잡이로 매여달린 것이다. 주덕해 교장은 슬그머니 림민호 부교장에게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이놈들을 일단 입학은 시키되 학급 학생들을 따라가면 그냥 두고 따라가지 못하면 잘 얼려서 노자를 줘서 돌려보내도록 합시다.”

수학학부에 입학한 정판룡은 그럭저럭 두 학기를 마쳤고 세 번째 학기부터는 어문학부에 자리를 옮기더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워낙 총기가 좋고 말주변이 좋고 공부욕심이 많은 정판룡은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1952년 10월 21세 약관의 나이에 연변대학 교원으로 되었다.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난것이다.

정판룡이 두 번 째로 림민호 부교장의 눈에 든 것은 아마도 1950년대 중반이리라. 국비류학생을 선발해 소련에 파견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신청 일자도 이젠 며칠 남지 않았건만 감히 신청하는 학생이 없다. 시험성적에 따라 선발하고 그것도 동북국에서 몇 사람 뽑지 않는데 시골대학 학생이 덤벼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장대 겨룸이라고들 학생들 사이에서 수군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청 마감일 림민호 부교장 집무실에 나타난 것은 역시 촌스럽지만 영민하고 오기가 있는 정판룡이었다. 림민호 부교장은 정판룡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래,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아는 법이지. 아무리 시골대학에서 공부한다고 하지만 뱃장과 패기까지 없어서야 되겠어. 왕후장상에는 씨가 따로 없어. 한 번 촌놈의 본때를 보여주는 거야!.”하고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정판룡은 불철주야 공부하였고 역시 우수한 성적으로 출국유학생선발시험에 통과되어 세계 일류 대학인 모스크바대학에 입학하였다. 끝없는 도전정신과 참다운 준비를 통한 무궁무진한 저력, 이게 정판룡 선생의 힘이자 매력이다.

청년 정판룡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과 분투는 계속된다. 중국의 북경, 상해에서 선발되어 온 유학생들은 시커먼 헐레브(빵)과 짓이긴 감자에 질려 배를 곯고 모스크바의 혹한에 움츠러들어 공부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해 갔다. 하지만 워낙 식성이 좋은 정판룡은 걸신이 든 사람처럼 헐레브와 감자를 달게 먹었고 밤낮 공부에 매진하였다. 5년 세월 와신상담 노력을 경주한 결과 《알렉세이 톨스토이 3부작 <고난의 길>에서의 인민묘사 원칙》이라는 논문으로 당당하게 문학 부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이 학위논문은 중국교육부로부터 우수논문으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중국의 귀공자들이 수토가 맞지 않아 피골이 상접하고 폐결핵까지 얻어가지고 어깨가 축 처져 돌아올 때 조선족청년 정판룡은 부둥부둥 살이 오른 얼굴에 멋진 러시아 털외투를 입고 동방의 미녀 왕유까지 끼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이는 우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는 영웅신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반세기 넘는 세월 정판룡의 신화는 얼마나 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꿈과 용기, 동산재기의 기회를 선물하였던가.

2. 탁월한 선견지명과 두둑한 뱃장

연변대학 와룡산 기슭에 서있는 정판룡문학비에는 그의 자서전 《고향 떠나 50년》에서 따온 다음과 같은 구절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다.

“내 자신의 전도를 위해 동포들의 부름을 거절할 용기는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1960년 5월 초 연길에 살구꽃, 배꽃이 필 무렵 나는 연변대학을 잘 꾸려보려는 꿈을 안고 북경을 떠나 북으로 가는 열차에 앉았다."

자신을 키워준 조선족동포와 연변대학에 대한 사랑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스크바대학에서 돌아온 선생은 북경 사회과학원이나 부인 왕유 여사가 나서 자란 상해에 가서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왕유 여사를 설득해가지고 은사 림민호 부교장이 계시는 연변대학의 품으로 돌아왔다. 가끔 동료나 제자들이 왜 북경, 상해에 남지 않고 부득부득 촌스러운 연변에 와서 고생하느냐고 물으면 선생은 껄껄껄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큰 나라에 가서 재상으로 사느니보다 작은 나라에서 왕으로 사는 게 좋지 않은가.”

이는“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倭國)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말을 유머러스하게 패러디하여 선생 자신의 동포사랑, 모교사랑을 대변한 말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많다. 그렇지만 까놓고 말하면 이는 반은 농담이요, 반은 진담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선생이 북경이나 상해에 안주하였더라면 우수한 학자로 유족한 삶을 살았을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족형제자매들이 우러르는“왕”으로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그는 조선족백성들 모두가 좋아하고 따르는 “민중의 벗”이요,“왕”이였다.

우선 선생은 타고난 총명과 근면성으로 《세계문학간사》(공저, 1981),《고리키전》(1985), 《외국문학강좌》(1990), 《제2차대전후의 세계문학》(1990) 등 저서와 교과서를 펴냈을 뿐만 아니라 전국 20여개 대학의 외국문학사 관련 교수들을 동원하여 4권으로 된 《외국문학사》를 펴냄으로써 중국 경내 대표적인 외국문학 연구자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굳혔다. 뿐만 아니라 선견지명을 가지고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의 우세를 충분히 살리고 중국 경내 한국학의 초석을 쌓은 대표적인 학자였다. 1980년 중국조선문학연구회를 출범시켰고 1986년 북경대학교 학자들과 함께 북경대학에서 처음으로 조선문학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89년 중국 경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연변대학교에 조선학연구중심을 창설하고 《조선학연구총서》를 발간하였으며 《간명한국백과전서》등 무게 있는 책자들을 출간하였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자기의 특성과 강세에 맞은 연구영역을 새롭게 개척하는 탁월한 선견지명, 전략적인 안목과 바다 같은 흉금으로 천하의 인걸들을 모아 값진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걸출한 리더십, 이것 또한 정판룡 선생의 힘이자 매력이다.

다음으로 선생은 상아탑에 갇혀 자기의 연구영역에만 몰입하는 학자들과는 달리 중국조선족사회의 역사와 현실, 미래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대중강연과 함께 회고록, 기행, 칼럼 집필에 혼신의 정열을 쏟았다. 그의 강연은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박학다식함으로 정평이 나있고 《세계견문》을 비롯한 기행들은 변화된 세계의 신선한 바람을 중국조선족사회에 몰고 왔으며 우리 모두의 세계사인식과 의식의 전환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다. 특히 선생의 자서전 《고향 떠나 50년》은 비단 정판룡 선생 자신의 일대기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족 이민사, 정착사의 축도(縮圖)로 된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은 한국 웅진출판사에서 《내가 살아온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재판되었는데 한국인들에게는“중국을 알게 하는 안내서”로 널리 알려져 있고 지금도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조선족의 뿌리 찾기, 조선족의 문화 살리기에 초점을 둔 선생의 학문은 풍부한 사료, 실사구시의 전통, 심오한 철리와 형상적인 비유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정판룡선생은 현대대학경영의 이념과 체계를 본격적으로 연변대학교에 접목시킨 걸출한 교육자이며 행정가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정판룡 선생은 대학의 최고 자산과 기반은 교수진이며 대학교는 얼마나 많은 우수한 교수를 확보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경영의 성패, 지명도의 높낮이가 좌우지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천편일률적인 자대로 교수를 선발하지 않았다. 수호(水滸)의 108명의 영웅호걸처럼 교수는 적어도 18반 무예가운데서 한두 가지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선생은 설사 오척단신이라 하더라도, 술 잘 마시고 가끔 실례를 한다 하더라도 오직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고 강의를 잘하고 연구를 잘하면 그들을 안아주고 키워주었다. 연변대학의 김영덕, 김병수, 이해산, 허룡구 교수는 오척단신의 교수들이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고 고전번역에 멋진 강의로 소문이 났다. 서일권 교수는 중년에 상처하고 늘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갔지만 그의 어진 천품과 강한 행정력을 높이 사주고 학부장으로 발탁시킨 분이 정판룡 선생이다. 또한 최상철 교수로 하여금 습작학에서 신문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중국조선족신문사를 정립하고 일가(一家)를 이루게 한 분 역시 정판룡 선생이다.

그리고 선생은 적어도 연변대학교에서 대학교 교과서체계를 확립하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연변대학교 교과서는 1950년대 림민호 부교장 시절 평양에서 지원받은 소련의 교과서와 조선의 교과서로 충당되었고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원인으로 말미암아 많은 학과목들은 교과서가 없이 강의되고 있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교수는 중요한 대목들을 두 번 세 번 읽어야 하였고 학생들은 팔목이 부러지게 필기를 해야 하였다. 개혁, 개방 후 이러한 열악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선생은 림휘, 허호일, 서일권 교수와 함께 선참으로 《세계문학간사》(상, 하)를 펴냈다. 선생은 또 문학이론을 강의하는 임범송, 현룡순, 김해룡 교수를 내세워 《문학개론》을, 중국문학사를 강의하는 김영덕, 김병수, 허룡구 교수를 내세워 《중국문학사》(상, 중, 하)를, 습작학을 강의하는 박상봉, 최상철, 전국권, 김만석 교수를 내세워 《습작학개론》을 속속 펴내게 하였다. 이로써 교과서가 없이 강의하는 국면을 최초로 타개하였고 연변대학에서 자체로 편찬한 제1대 교과서체계를 확립하였다.

아무래도 선생의 가장 큰 기여는 조선언어문학 석사학위 수여권한과 박사학위 수여권한을 쟁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다문박식함과 중국학계 거물들과의 폭넓은 인맥과 교유는 선생이 석사학위, 박사학위 수여권한을 쟁취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바탕으로 되었다. 문학이론계의 태두인 전중문(錢中文) 교수와는 모스크바대학시절 동기동창이다. 저명한 외국문학전문가이며 중산대학의 오문휘(吳文輝) 교수는 “연변대학의 정판룡 교수는 박식하고 말솜씨가 좋고 조직능력이 강한 교수”라고 말했다. 더욱이 동방의 석학(碩學)으로 불리는 계선림(季羨林) 교수는 “동북에서 동방문학학자로 정판룡 선생을 손꼽는다”고 하였다. 선생은 생전에 김병민, 김관웅, 이암, 전학석, 강은국, 채미화, 윤윤진, 최웅권, 김호웅, 허휘훈, 이애순, 문일환, 김형중 등 20여 명의 박사를 키워내고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를 국가급중점학과로 육성하는데 초석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사를 주관하는 부총장으로서 한국 통일원 전임 차관 동훈 선생, 한양대학교 이종은 교수 등과 손을 잡고 수십 명의 젊은 학자들을 미국, 일본, 한국 등 나라에 보내어 외국체류경험을 쌓고 학문을 연찬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정판룡 선생은 우리 연변대학이 산해관을 깨고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연 분이다.

3. 스승에 대한 존경과 제자에 대한 사랑

뛰어난 인물의 배후에는 반드시 위대한 스승이 있다. 아난(阿難)의 배후에는 석가가 있었고 베드로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가 있었으며 안연(顔淵)의 뒤에는 공자가 있었고 서애(西厓)의 뒤에는 퇴계(退溪)가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판룡 선생의 배후에는 림민호 부교장이 있었다. 정판룡 선생은 림민호 부교장을 성심성의껏 본받고 배우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 사숙(私淑)하고 존경하였다. 옛날에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말하자면 임금님과 스승과 아버지를 같은 자리, 같은 가치에 놓고 생각했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 정판룡 선생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자기의 스승과 은사들을 극진히 모신 것 같다. 선생은 자신의 은사들인 림민호동상, 이욱문학비, 김창걸문학비를 세우는데 앞장을 섰고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진정이 넘치는 명문들을 남겼다.

선생은 임종을 앞두고 사모님과 우리 제자들을 앞에 두고 림민호 선생의 동상 주변에 골회 한 줌 뿌려줄 수 없겠느냐고 간절히 소망하였다. 림민호 선생의 유가족도 흔쾌히 허락을 해주어서 우리 제자들은 림민호 선생의 동상 주변의 잔디밭에 좁다란 홈을 치고 정판룡 선생의 골회를 정히 뿌렸다. 천당에 가서라도 존경하는 은사님을 옆에 모시고 도란도란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정판룡 선생, 스승에 대한 그분의 다함없는 존경에 우리 모두가 가슴이 뭉클했던 일이 어제 일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일찍《곡절 많은 인생》(1〜2, 1989)이라는 글을 통해 림민호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최초로 소상하게 복원시켜 놓음으로써 일제치하 항일투쟁을 하다가 서대문감옥에서 7년 동안이나 옥고를 치렀고 연변대학 초대 부교장으로 18년이나 봉직한 탁월한 혁명가, 교육가의 빛나는 형상을 부각하기도 하였다. 결초보은의 사제 간의 의리, 세상인심이 조석으로 변하고 자그마한 명리를 탐내서 동가식서가숙 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정신인가.

정판룡 선생의 제자 사랑은 특별한 데가 있다. 남을 가르친다고 해서 누구나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박식한 학자라 해서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위대한 학자와 좋은 스승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세상에는 위대한 학자이면서도 한 사람의 제자도 가지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 냉정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젊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젊은 생명의 앞날에 기대와 희망을 품고 그 생명의 성장과 발전에 깊은 관심과 두터운 애정을 가질 수 있는 자만이 스승이 될 수 있다.

선생은 시시콜콜 잔소리를 하고 제자가 한 일을 미주알고주알 캐고 드는 분이 아니다. 선생은 무조건 제자를 믿고 일을 맡긴다. 비판보다는 칭찬을 많이 한다. 특히 자신의 평민적인 성격과 고금을 넘나드는 학문의 깊이, 전략적인 안목과 선견지명, 그리고 지행합일의 행동력으로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인다. 제자를 많이 두다 보면 영악스러운 자가 있는가 하면 어질고 약한 자도 있다. 모든 일을 똑 부러지게 처사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물 덤벙 술 덤벙 실수를 하는 자도 있다. 선생은 모든 제자를 다 껴안아주되 언제나 약한 자를 두둔하고 우선 실수를 한 자를 구해주고 본다.

1980년대 말 이 아무개라는 학생이 면회를 온 처녀와 함께 남성기숙사에서 잤다(실은 이 아무개라는 학생이 처녀와 저녁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취침시간이 지났고 처녀는 사범학교로 돌아갈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남성숙사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조용히 잔 것이다)고 당장 퇴학처분을 내린다고 학교 당국에서 야단을 칠 때 정판룡 선생은 허허 웃으며 다음과 같은 유머로 난제를 풀어주었다.

“왜 젊은이인가? 실수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야. 실수를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른으로 될 수 있거든. 젊은 놈이 조금 실수를 하고 한 번 죄를 지었다고 해서 단매에 때려눕혀서야 되겠소? 다른 남학생들이 있는 데서 좋아하는 처녀와 한 침상에서 잤다고들 하는데 여관을 잡을 돈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사실 외국에서는 대학생이면 결혼도 할 수 있는데 뭘. 한 번 봐 주라구.”

이렇게 철딱서니 없이 실수를 했지만 정판룡 선생 덕분에 처분을 받지 않고 무난히 공부하게 된 이 아무개라는 학생은 지금 박사가 되었고 교수로, 당위서기로 출중하게 일하고 있다.

선생의 은총을 입고 이 아무개 학생처럼 구제불능의 처지에서 헤어난 제자는 기수부지겠지만 여기서 우리 큰형의 사례만 하나 더 들기로 한다. 1964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큰형 봉웅 역시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다녔는데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닐 생각으로 두만강을 건너 조선에 갔었다. 쪽지 한 장을 달랑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는지라 우리 어머니가 큰아들을 잃어버렸다고 대성통곡을 했고 평소 우리 집에 잘 놀러왔던 김창락, 한석윤, 류은종 등 학급친구들이 정판룡 교수를 모시고 득달 같이 우리 집을 방문한 것이다. 그때 정판룡 교수는 30대 초반의 젊은 교수였는데, 그는 우리 어머니를 보고 허허 웃으며 “이 집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문학을 사랑하고 톨스토이를 숭배하는 젊은이가 아닙니까? 문학을 사랑하고 톨스토이를 숭배하는 사람은 부모님과 동생들을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이제 사나흘 지나면 반드시 자기를 뉘우치고 어머니 곁에 돌아올 겁니다. 제가 봉웅이 어머니 앞에서 장담을 할게요.”하더니 김창락 등 학급 친구들을 둘러보면서 “봉웅이는 이삼일 후 분명 돌아오는 거야. 내가 알았으면 됐어. 호들갑을 떨며 학교에 보고할 건 없어. 봉웅이가 돌아온 후에도 내색을 내지 말고 이전처럼 스스럼없이 지내야 해. 알겠어?"하고 다짐을 따고 나서 “봉웅이 어머니, 애들이 정심도 먹지 않고 헐레벌떡 쫓아왔으니 정심이나 차려주십시오. 저도 이 친구들에게 잡혀오다 보니 정심을 걸렀거든요.”하고 비위 좋게 껄껄껄 웃었다.

정판룡 교수의 말대로 큰형은 사흘 만에 돌아왔고 무탈하게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 때 우리 동생들은 토끼처럼 귀를 강구고 문틈으로 정주방의 동정을 살폈는데, 그 때 뵌 정판룡 교수의 준수한 얼굴과 서글서글한 눈매를 잊을 수가 없다. 큰형의 일이 있은 후 우리 형제들의 눈에 정판룡 교수는 일개 교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비쳤고 우리 형제들은 정판룡 교수의 말씀을 성자(聖者)의 예언처럼 믿게 되었다.

선생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이야기할진대 정판룡교육발전기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라도 깍쟁이라는 말도 있지만 전라도 담양 출신인 정판룡 선생은 의식주에 있어서 동전 한 푼도 아껴 쓴다. 솔직히 말하면 고급 구두 한 컬레 없고 정장도 별로 여벌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이른 아침이면 장바구니를 허줄한 자전거 핸들에 걸고 남새시장에 나가 남새장수 영감, 고기장수 아줌마들과 한 푼 두 푼 깎으며 흥정을 한다. 일본, 한국과 구미 여러 나라를 순방하고 돌아올 때도 카메라 하나, 전기면도기 하나 사오지 않는다. 그러니 전라도 깍쟁이라는 말을 들을 만도 하다.

하지만 의미 있게 돈을 쓸 줄 아는 분이 바로 정판룡 선생이다. 선생은 사모님과 함께 1980년대 초 스톡홀름대학에 가서 강연할 때 한 달에 4천 달러씩이나 받았지만 그 돈을 몽땅 유럽 각국을 여행하는데, 미국의 아라스카를 거쳐 하와이, 일본, 한국을 에돌아오는데 썼다. 거의 날마다 라면이나 끓여먹으면서 꼬박꼬박 장학금을 모아서는 대형 텔레비전이나 냉동기를 사들고 돌아오는 방문학자나, 외화를 움켜쥐고 돌아와 마치 금의환향을 한 듯이 거들먹거리는 방문학자들과는 워낙 격이 달랐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감동을 먹지 않을 수 없는 것은 1996년 한국의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을 때 정판룡 선생은 상금에서 10만 원을 떼어내어 정판룡교육발전기금을 마련하였고 임종을 며칠 앞두고 사모님과 합의를 보고 다시 11만 원이라는 거금을 정판룡교육발전기금에 내놓았으며 병상에서 불우한 학생들을 불러놓고 일일이 장학금을 쥐어준 일이다.

참으로 선생을 다만 청산유수와 같은 주변으로 외국의 자금을 유치하는 사회활동가로만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피와 살로 마련한 평생의 자산을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내놓음으로써 기부문화의 풍토를 조성하고 사랑의 실천에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4. 다문화주의 사고방식과 유머와 위트

연변대학의 교훈(校訓)은 진리, 사랑, 융합(求眞, 至善, 融合)이다. 이를 진리를 추구하되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 껴안으면서 더불어 살고 마침내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해도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다. 이 교훈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다민족국가에서 조선족 중심의 민족대학을 경영하고 있는 우리 연변대학의 성격과 위치 및 바람직한 진로를 잘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들 간의 평등과 존중에 의한 공존과 융합이라는 다문화주의 사고방식을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다문화주의 사고방식, 중국식 표현을 빌자면 이러한 조화(和諧)의 사상은 연변대학 초창기 주덕해, 림민호 선생에게서 비롯되어 박문일, 정판룡 선생을 거쳐 김병민 교장을 대표로 하는 현 지도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림민호 부교장은 모스크바 동방대학 졸업생이라 일찍이 국제주의, 바꾸어 말하면 다문화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었고 이를 대학교 인재양성을 통하여 구현하고자 하였던 교육자였다. 1951년 봄, 북경대학 동방언어학부 조선어학과의 마초군 부교수가 불원천리 연변대학에 찾아와서 해마다 조선어학과 학생들을 연변대학에 보내서 1년 간 씩 실습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을 들었다. 이에 림민호 교장은 박규찬 교무장을 보고

“무조건 받아들이고 불편 없이 공부하도록 하게 합시다. 중국의 역대 정권이 주류민족더러 소수민족의 언어를 배우라고 권장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황차 천하의 수재들이 운집해 있는 북경대학 학생들이 아닙니까?”

연변대학에서 북경대학 학생들은 그야말로 칙사(勅使) 대접을 받았다. 연변을 찾아온 북경대학 학생들 중에는 나중에 대성해서 중국 경내 조선고전문학연구의 일인자가 된 위욱승(韋旭升) 교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때 그 일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고 있다.

“우리가 앉은 열차는 저물녘에 연길역에 도착했지요. 그 당시 교무장으로 계셨던 박규찬 선생께서 수십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마중을 나왔지 않겠습니까.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예쁘장하게 생긴 여대생들이 반갑게 달려 나와 우리 모두의 가슴게 일일이 생화를 안겨주더라구요. 똑같은 대학생인데 이렇게 열렬하게 우리를 환영할 줄은 미처 몰랐거든요. 개찰구를 빠져나오자 더욱 놀라게 되었어요. 반듯하게 학생모를 쓰고 학생제복을 입은 수백 명의 대학생들이 질서 정연하게 두 줄로 나누어 서서 우리 실습생들을 연도환영하지 않겠어요. 맨 앞장에 선 악대는 쿵작쿵작 환영곡까지 연주했습니다. 이게 국빈대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그해 여름에 북경대학 교장사무실 비서 진옥룡 선생이 다시 연변에 찾아와 림민호 부교장을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 때 림민호 부교장은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한어로나마 《시경(詩經)》에 나오는 문자를 동원해 “세상 사람들 모두다 형제(四海之內皆兄弟)가 아닙니까. 친자식처럼 돌보아줄 터이니 근심일랑 하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하고 껄껄 웃었다.

정판룡 선생은 림민호 부교장의 수제자나 다름없으니 그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요, 또한 정판룡 선생 역시 모스크바대학에서 다문화사회를 체험한적 있는데다가 왕유 여사와 더불어 다문화가정을 만들었는지라 그의 “며느리론”은 그러한 생활경력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하나의 사상이요, 절묘한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문화주의(muticulturalism) 는 전통적으로 공약(公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한다.“다름”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 “평등”을 이유로 동화를 강조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하면 사회구성원이 제 각각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향유하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가 다문화사회이다. 하지만 실지에 있어서 이러한 다문화주의 담론은 어디까지나 다수자 또는 중심부문화의 담론이며 이러한 담론에서 소수자 또는 주변부문화의 목소리는 외면되고 있다. 전자는 후자에 대해 시혜(施惠)의 우월감에 젖어있고 후자는 전자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동화(同化)의 비애를 맛보고 있다. 말하자면 다문화주의담론에서 소수자의 정체성과 주변부문화의 존재가치에 대한 옹호와 존중은 망각되고 있다.

이러한 다문화주의의 문제점을 가장 일찍이 간파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했던 분이 림민호 부교장과 정판룡 선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제간(師弟間)인 이들 두 선생은 다문화사회에서 소수자는 다수자와 담을 쌓고 협소한 민족주의를 고수해서도 아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낙후된 상태에서 다수자의 시혜만 받을 것이 아니라 다수자와 적극 교류하고 힘을 비축하여 다수자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의 존중을 받는 존재로 부상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이른바 평등을 이룸에 있어서 소수자의 주체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보다 널리 확산하고 우리 민족의 피와 살로 되게 하기 위해“며느리론”을 내놓은 분이 바로 정판룡 선생이다.“며느리론”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중국에 시집은 왔으되 허구한 세월 친정생각만 하고 시집살이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시집동네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시집 어르신을 잘 모시고 남편공대를 잘하면서 아들딸을 많이 낳아 훌륭하게 키워 시집마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 때라야만 비로소 친정을 도울 수 있고 친정마을과 시집마을에서 다 사랑과 존중을 받는 존재로 될 수 있다. 우리 조선족의 이중적문화신분을 염두에 둘 때, 디아스포라의 현지화는 역사의 필연이라고 할 때, 정판룡 선생의 “며느리론”은 우리 조선족의 진로 또는 우리 연변대학의 건학이념을 가장 형상적으로 풀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다문화주의 사고방식에 입각해 정판룡 선생은 중국의 거물급 학자들과 널리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나가서도 금발머리든 까만 머리든, 파란 눈이든 까만 눈이든 폭넓게 친구를 사귀었다.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고 한국인 교수를 만나면 나이를 따지지 않고 달갑게 아우노릇을 하였고 일본인 교수를 만나면 똑 부러지게 예의를 차리고 농담을 삼갔다. 또한 제자를 끝까지 옆에 두고 싶어 하는 스승들과는 달리 제자들이 자기의 날개를 키워가지고 중국 유수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훨훨 날아가 자리를 잡게 함으로써 중국 경내 조선-한국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우리 연변대학의 문화영토를 넓혀나갔다. 길림대학에서 일하고 있는 윤윤진 박사; 북경민족대학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이암, 문일환 박사; 상해 복단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강은국, 강보유 박사 등이 좋은 사례로 되겠고 전국 200여개 소 한국어학과 교수의 80%가 연변대학 출신이라는 점이 또한 좋은 사례로 되겠다. 정판룡 선생의 논리는 간단명료하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도 큰 법, 밤낮 우는 소리만 하고 받아먹기만 한다면 절대로 다문화공동체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문화주의 사고방식과도 관련되지만 정판룡 선생은 유머와 위트의 귀재였다. 유머와 위트는 바다 같은 흉금과 건전한 정신, 풍부한 경륜과 지식을 가진 자만이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 선생은 강연이나 글에서 가장 원론적인 문제를, 가장 복잡한 정치문제나 학술문제를 가장 쉬운 비유로 풀어서 청중과 독자를 포복절도케 하는 유머러스한 기질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평소 생활 속에서도 유머와 위트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해 난처한 국면을 타개하고 일을 추진하며 좌중을 즐겁게 했다. 선생이야말로 연변의 처칠이라 하겠다. 정판룡 선생의 유머와 위트를 알뜰하게 수집하면 책 한 권 분량은 충분히 되겠지만, 여기서 두 가지 사례만 들기로 하자.

첫째 사례:

선생은 무석에 살고 있는 왕씨 가문의 맏사위였다. 처갓집은 팔남매 대가족이라고 하는데 모두 공부를 해서 출세를 했건만 상해요, 요녕이요, 길림성이요 산지사방에 널려 살고 있었다. 한족가문에서는 대체로 막내네 내외가 부모님을 모시는 법인데 이 집안에서도 막내네 내외가 80고령의 노모를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형제자매들이 외지에 살다보니 노모에게 좀 등한했고 이를 막내네 내외는 은근히 섭섭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눈치를 챈 정판룡 선생은 어느 해 구정이 다가오자 여기저기 형제자매들에게 전화로 통문을 냈다. 이번 구정에는 반드시 무석에 있는 막내네 집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설을 쇠자고 말이다. 맏이의 분부에 동생들이 따라주었고 정판룡 선생은 밥상을 차리기 전에 동생들을 둘러앉히고 말꼭지를 뗐다.

“이 몇 해 간 막내네 내외가 어머님을 모시고 수고가 많았다. 우리 머리 큰 형제들이 어머님께 용돈도 부쳐드리지 못했으니 참으로 불효막심하다. 우선 맏이인 내가 깊이 반성을 한다.”

정판룡 선생은 좌중을 한 번 둘러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여기 앉은 형제들 중 중국공산당 당원인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 음― 다들 당원이구나. 우리 당원들은 달마다 당비를 내지 않는가. 다들 내겠지. 허지만 우리는 여태껏 정기적으로 모비(母費)만은 내지 않았어.”

“모비”란 말에 동생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입들을 싸쥐었다. 정판룡 선생이 다시 위엄스런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웃긴 왜 웃어. 내 말이 어디 틀렸는가. 당은 우리를 키웠다고 하지만 그것은 추상적인 존재야. 하나하나가 모여 당이 되었으니 구체적 실체가 없단 말이야. 하지만 어머님은 여기 앉아 계셔. 어머님은 배 아프게 우리를 낳아주었고 우리 팔남매에게 골고루 젖을 먹여주었고 공부시켜 주었어. 하지만 우린 당비만 내고 모비를 내지 않고 있었단 말이야. 이제부터 이렇게 하자구. 우리 부부는 다 대학교 교수니까 한 달에 두 몫, 200원씩 내겠어. 임자들은 한 가정에서 한 몫씩, 100원씩만 내라구.”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조선족 맏사위의 제안에 동의를 하였다. 그리고 대체로 언약을 지켜서 달마다 무석의 노모에게 용돈을 부쳐 보냈는데 그 무렵 10여 년 공령을 가진 공무원의 노임이라야 500원 되나마나 하였는데 노모가 오히려 2명 공무원의 노임을 받는 형국이 되었으니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왕유 사모님은 달마다 월급을 타서 노모에게 부치는 날이 한 달 중 제일 기쁜 날이 되었단다. 그리고 막내동서를 비롯한 형제들은 그때로부터 정판룡 선생의 말은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곧이들었다. 선생의 임종도 무석에서 온 막내동서가 지켜주었다. 이게 선생의 수완이고 멋진 유머이며 위트다. 이런 유머와 위트를 구사하는 데는 아랫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둘째 사례:

정판룡 선생과 현룡순 선생은 1950년대 초반부터 수십 년간 조문학부 동료로, 친구로 허물없이 지냈다. 하지만 평소 맑은 정신에 현룡순 선생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투로 존대어를 썼고 정판룡 선생은 “…그렇소”하고 하대를 하였다. 기실 현룡순 선생은 1927년 생으로 적어도 1931년 생인 정판룡 선생보다 네 살 손위였다. 하지만 제3차국내혁명전쟁에 참가하고 대학에 들어오다 보니 정판룡 선생의 후배로 되었고 현룡순 선생이 아직 학생딱지를 떼지 못하였을 때 정판룡 선생은 벌써 교원으로 되어 강의를 했다. 아무리 교원과 학생 사이라고 하지만 그게 고작 1-2년 동안이고 그 후로는 쭉 수십 년간 동료로 지내오지 않았는가. 황차 현룡순 선생 쪽이 네 살이나 나이를 더 먹었는데 그냥 정판룡 선생에게 존대어를 쓴다는 게 아무래도 기분이 좀 나쁜 일이었다. 그래서 현룡순 선생은 술 한 잔 나눌 때면 부쩍 용기가 나서“정 선생, 내 말 좀 들으시오. 내가 정 선생보다 네 살이나 더 먹었는데 왜 존대어를 써야 한다우. 이제부터는 너나들이를 하자구요, 너나들이를! 너나들이를 해도 내가 밑지지만 말이우.”하고 달려들면 정 선생은 허허 웃으며 “이거 안 되겠구만. 옛날 사진을 공개해야 하겠소. 세월이 열두 번 변해도 제자가 어떻게 스승에게 너나들이로 달려든단 말이요, 버르장머리가 없이!”이쯤 되면 워낙 착하고 주변이 없는 현룡순 선생은 좌중을 둘러보고 구원이나 청하듯이“저 양반은 생뚱 같은 사진을 가지고 공갈만 친단 말입니다.”하고 지고 만다. 이튿날 술이 깨면 현룡순 선생은 여전히 버릇처럼 정판룡 선생에게 “…그렇습니다”투로 깎듯이 존대어를 썼다.

그런 자리를 우리 제자들도 여러 번 보았는지라 다른 노교수님들에게 물어본즉 1950년대 초반 현룡순 선생네 학급 학생들이 봄나들이를 가서 찍은 사진이라고 하는데 새파란 정판룡 선생은 그래도 교원이랍시고 남녀학생들 복판에 틀거지 있게 앉아있는데 워낙 몸매가 왜소한 현룡순 선생은 정판룡 선생 무릎 앞에 한 팔을 고이고 누운 채로 다른 한 손으로 권총 모양을 해가지고 찍었다는 것이다. 두 분이 사제 간임을 증명하는 사진이라 이 사진 이야기만 나오면 현룡순 선생 쪽은 기가 죽고 말이 궁해지는 것이었다. 이처럼 선생의 유머와 위트는 동료들 사이, 스승과 제자들 사이의 활력소가 되었고 선생이 있는 자리는 마냥 즐거운 기분이 넘쳐났던 것이다.

나가며

사제애(師弟愛)는 우리 동양인의 가장 아름다운 전통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 전통을 면면히 계승해야 한다. 스승은 제자를 사랑과 정성으로 가르치고 제자는 스승을 믿고 따르고 존경해야 한다. 스승의 따뜻한 애(愛)와 제자의 돈독한 경(敬)이 서로 합쳐질 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학식이 깊고 덕행(德行)이 높아 남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우리는 사표(師表)라 하고 사부(師傅)라 한다. 스승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사도(師道)라 하고 스승으로부터 받은 큰 은혜를 사은(師恩)이라 한다.

중국 당나라의 위대한 학자 한퇴지(韓退之)는 유명한 《사설론(師說論)》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승은 제자에게 첫째로 도(道)와 진리를 전하고, 둘째로 학업을 전수하고, 셋째로 사리에 대한 의혹을 풀어주어야 한다. (師者所以傳道授業解惑也)”이것이 스승의 세 가지 임무요 사명이다. 하지만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드물다. 제자의 인격성장과 학문의 발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여 가르치는 스승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송나라의 대유(大儒)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自治通鑑)》에서 “경사는 만나기 쉬워도 인사는 만나기 어렵다.(經師易遇, 人師難遇)”고 하였다. 말하자면 경서의 자구(字句)를 가르치는 선생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지만 제자에게 공정한 도의를 가르치는, 사람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인도해주는 진정한 스승은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항상 배우고 본받으며 때로는 격려해주고 때로는 충고해주고 때로는 채찍질 해주는 뛰어난 스승은 참으로 인생의 보배요, 정신의 등불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정판룡 선생 같은 참스승을 만났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정판룡 선생은 하나의 성장소설이며 신화다. 그의 빼어난 총기와 패기,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과 근면성, 그리고 성공의 신화는 자라나는 세대들의 영원한 교과서가 되고 그들에게 무궁무진한 힘을 준다.

그는 세계문학의 연구분야에서는 더 말할 것 없고 조선족사회의 진로에 대한 모색을 통해 조선족백성들이 우러르는 “정신적 수령”으로 되었으며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해 평생의 피와 땀이 스며있는 사재를 쾌척하여 정판룡교육발전기금, 중국조선족아동장학회 등을 출범시킴으로써 후대사랑, 기부문화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전략가다운 혜안과 선견지명으로 연변대학의 특성과 우세 및 나갈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현대적인 대학경영의 이념으로 연변대학을 현대적인 종합대학으로 끌어올린 연변대학 명교수의 한 사람이며 걸출한 교육가였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온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후예로서 다문화주의적인 관점으로 중국사회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지위와 진로를 모색하였으며 협애한 민족주의를 넘어선, 소수자의 주체적 노력에 의한 여러 민족의 평등, 공존과 융합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특히 그의 평민적인 성격, 너그러움, 유머와 위트는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 어디서나 큰 힘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정판룡 선생을 그리는 까닭이다.

정판룡 선생의 정신은 우리 대학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며 그의 정신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빛을 뿌릴 것이다.

2011년 10월 2일


*본문은 연변대학 김호웅 교수가 2011년 10월 2일 "정판룡 탄신 80주년 기념 좌담회"서 행한 발언원고이다.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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