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삼시인(1944년 3월생)은 체구가 작다. 하지만 그는 시로 시대의 량심과 겨레의 정신을 표현하면서 애면글면 중국조선족 북방문단을 지켜온 작은 거인으로 중국조선족시단에서 위망이 높다.
어린시절, 고향 연수현 평안향 성광촌에서 멀리 떨어진 마가점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삼촌의 집으로 오가며 책을 읽는데 재미를 붙여왔던 그가 습작을 시작하기는 1961년부터다. 이해 5월부터 고향의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했지만 그가 한 문우와 함께 결성한 “북방송화강문학청년습작회”라는 문학동아리가 공안국의 뒤조사를 받았고 동아리가 해산당하면서 시련도 맛보게 된다.
이 시기 강효삼은 신문에 시 “봄이 나간 날”을 발표하면서 창작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하지만 “10년 동란”과 함께 이 첫걸음마저 좌절당하고 그는 하루아침에 “현행반혁명”, “사상반동분자”라는 감투를 쓰게 되였고 28차 비판투쟁에 교직에서 해고당했다.
시인은 심신을 억압하는 정치감투를 쓰고 혹심한 로동개조를 하면서도 책과 필만은 놓지 않았고 쉬는 틈을 타 논이나 밭두렁에서 남몰래 글을 끄적거렸다.
결국 “10년 동란”이 결속되면서 시인은 억울한 루명을 벗고 다시 교단에 섰고 평소 부지런히 글농사를 한 덕분에 1978년에는 흑룡강작가협회 회원으로, 얼마후에는 향정부 문화소로 전근해 마음 놓고 시를 창작할수 있게 되였다.
1963년 처녀작을 발표해서부터 지금까지 강효삼시인은 시, 가사, 수필, 아동문학 등 천여편의 문학작품을 발표하고 아동시집 《봄비》, 성인시집 《먼 후날 저 하늘너머》 등 두권의 시집을 펴냈으며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재외동포문학상 등 여러가지 문학상 30여차 수상했다.
강효삼시인의 성인시집 《먼 후날 저 하늘너머》를 두고 “민족현황에 누구보다 민감한 반응을 보여주고있다”, “인도주의적 시심이 주류를 이루고있다”(한춘), “농민의 아들로서 전원목가적인 넉두리”(최삼룡), “우리 시단의 제1푸닥거리군으로서의 대표작품”(김룡운)이라고 평론가들은 높이 평가하고있다.
최근 강효삼시인은 몇십년을 살아온 북방 우리 민족의 삶을 조명한 련작시 “북방의 강(외 4수)”을 썼는데 이 시에 대해 평론가 리태복은 “개체적생명보다는 조선족이라는 단체적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있는 이 작품은 디아스포로라적 집단으로서 중국조선족의 력사와 현실을 상기시키며 이를 토대로 이 집단의 운명과 정체성에 대한 시적탐구를 보여주었으며…시 전편에는 이 집단에 대한 서정적주인공의 깊은 애착, 파국적현실에 대한 절망과 애달픔이 충일되여있다”고 평가했다.
강효삼시인에게 있어서 문학은 열번을 넘어지면 스무번을 일어나게 한 신념의 쌍지팽이였고 수십길 얼음의 봉쇄를 뚫고 솟아난 마음의 젖줄기였다. 그래서 강효삼시인은 돈도 명예도 아귀다툼도 다 잊고 오로지 시를 낳는 그 뙈기밭만을 홍수가 쓸어가지 말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안고 열심히 시심의 그 작은 뙈기밭을 가꿔가고있다(글·사진 김인덕 기자).
래원: 연변일보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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