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 중앙통전부 부부장이며 2기에 거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련임한 리덕수는 40여년간 소수민족지구와 전국 소수민족사업을 위한 사업에 혼신을 헌신해온 조선족의 우수한 지도간부다.
리덕수는 1943년 11월 길림성 왕청현 동광향 전산자촌에서 출생했다. 고향에서 소학교, 중학교, 고중공부를 마치고 1962년 19살 되던 해에 리덕수는 연변대학 정치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학식을 넓혔을뿐만아니라 대학시절에 사회주의교육사업대 공청단위원회 부서기직무를 맡고 농촌에 내려가 단련하면서 정치적으로도 크게 진보하였다.
1968년 리덕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흑룡강성 수분하지구 해방군 모 부 농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농장에서는 그에게 학생련 반장직무를 맡겼으며 그는 농사에서 뿐만아니라 집수리, 채석 등 모든 일에서 앞장섰다.
1970년 리덕수는 고향인 왕청현으로 돌아와 현혁명위원회 정치부 조직조에서 사업하게 됐다. 때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인지라 극 "좌"사조가 여전히 범람했으며 많은 대학생들이 공장에서 육체로동을 하면서 단련받았다. 리덕수는 공장에 내려가 대학생좌담회를 조직하면서 우수한 인재를 발견하면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그의 노력으로 여러명의 대학생들이 지도일군으로 선발되였으며 그중에는 후에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주급 지도일군으로 된 간부도 있다.
1972년말부터 1978년 2월까지 리덕수는 선후로 왕청현당위 상무위원과 공청단서기, 선전부장, 현당위 부서기로 사업하였다. 그리고 1978년 3월에는 공청단길림성위 부서기으로 임명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난지 얼마 안되는지라 혼란상태를 바로잡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우파로 획분된 5명의 간부에 대해 조사하고 전부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두가지가 돌출한"간부를 처리함에 있어서도 실사구시적이고 차별없이 대함으로써 적지 않은 간부를 보호하였다.
1983년 3월 리덕수는 연변으로 돌아와 연길현(지금의 룡정시)당위 서기로 사업, 그해 11월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서기 겸 자치주 주장으로 발탁되였다.
1984년 중국공산당 제12기 3중전회에서는 중국 정치, 경제 형세를 전면 분석하고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결정을 선언하고 나섰다. 연변도 개혁하지 않으면 더는 출로가 없고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했다. 리덕수는 연변에서 바다로 나가는 길을 뚫은 사람이다. 두만강출해권을 회복하기 위해 그는 적극적으로 국가 관련 지도자와 관련 부서에 이 정황을 꾸준히 회보하였으며 그들의 지지를 쟁취하기에 성공했다. 리덕수의 적극적인 노력과 국가 관련 부서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드디어 두만강출해의 꿈은 현실로 바뀌였다.
두만강항로 출해권 회복에 이어 리덕수는 또 연변의 하늘길을 열기 위해 동분서주, 그의 노력으로 연길ㅡ북경항로가 개척되였으며 도문ㅡ북경철도도 개통됐다. 리덕수가 연변의 지도자로 사업한 시기, 연변의 9년제의무교육과 고등교육은 큰 발전을 가져왔는바 과학기술대학이 새롭게 건립되였으며 연변예술학교와 연변사범학교는 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90년 11월, 리덕수는 47년간 생활해오던 길림성을 떠나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으로 임명되였다.
1990년부터 2008년 3월까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중앙통전부에서 사업하는 기간 리덕수는 "흥변부민행동", "인구가 비교적 적은 민족의 발전계획", "서부대개발", "소수민족사업'11.5'계획" 등 일련의 프로젝트들을 실천했다.
"발전은 민족사업의 근본임무다" 리덕수는 우리 나라 전반 소수민족사업의 중심고리이자 귀결점을 발전에 뒀다. 그는 자신과 민족사업에 종사하는 사업일군들에게 무엇보다 청렴하고 맡은바 사업에 충직할것을 요구하면서 "민족사무위원회 간부들은 반드시 민족지구에 깊은 감정을 가져야 하며 민족사업에 깊은 애정을 가져야 한다. 민족이란 밥가마의 밥을 먹는 국가공무원으로서 소수민족 형제자매들에게 미안한 일을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말했다.
1999년 국가민족사무위원회는 국무원의 여러 부서와 련합하여 "흥변부민"행동을 발기, 5년동안 중앙에서는 변강 소수민족지구에 110억원의 자금을 투입했으며 2만개의 대상을 가동했는바 2100만에 달하는 백성들이 혜택을 입었다.
개혁개방이래 우리 나라 소수민족사업은 큰 발전을 가져왔으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여전히 뒤떨어졌있으며 조화사회 건설을 저애하고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번째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사령탑을 잡은 리덕수주임은 대오를 인솔하여 우리 나라에서 첫번째로 되는 소수민족사업 5년 계획 작성에 들어갔다. 이렇게 출범된것이 바로 국가 "소수민족사업 제11차 5개년계획(2006ㅡ2010)"이다. 생활형편이 어려운 소수민족군중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민족기초교육을 지원하며 민족대학교 건설, 소수민족전통의약 발전, 소수민족문화발전, 인재육성, 법제건설, 대외교류, 민족사무관리정보화, 소수민족현황조사, 민족사무서비스체계 건설 등 11개 부분으로 된 이 계획은 소수민족사업의 지도성적인 문건으로 되였다.
리덕수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틀어쥔 "흥변부민계획", "22개 인구가 비교적 적은 소수민족 발전계획"과 "소수민족사업 제11차 5개년계획(2006ㅡ2010)" 등 3개 프로젝트는 전부 국가발전계획에 들어갔으며 국가의 전략행동으로 실천에 옮겨졌다. 그는 또 3차례나 중앙민족사업회의를 준비하고 조직했는바 우리 당에서 민족문제와 관련한 정책과 방침, 교훈을 총화하고 새로운 시기 시대의 발전에 부합되는 리론과 정책을 새롭게 제정하고 민족문제 및 민족사업의 기본리론과 정책, 연구방법 등 적잖은 면에서 돌파를 가져왔다.
"국가의 통일은 여러 민족 인민들의 최고리익이며 민족단결은 여러 민족 인민들의 공동한 념원이다. 56개 민족 인민들의 의지를 단합하고 그들의 적극성과 지혜를 남김없이 발휘한다면 우리는 꼭 초요사회의 웅대한 목표를 실현할것이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할것이다" 민족이라는 밥가마의 밥을 먹는 간부ㅡ리덕수는 40여년간 민족지구와 전국의 소수민족사업을 책임지고 사업해오면서 마음속으로 항상 인민들을 생각했으며 소수민족지구의 경제사회 건설과 안정을 위해 실천하면서 동분서주해왔다.
래원: 길림신문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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