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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백인34]조선족시단의 영원한 "별" 윤동주

중국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애국시인

2013년 07월 17일 09:09【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전문


올해는 “별의 시인” 윤동주가 일본 후쿠오카형무소 류치장에서 희생된 68주년이 되는 해이다. 윤동주(아명 윤해환)는 중국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이며 애국시인으로 29세(실제로 27년 1개월)의 젊은 나이에 영원한 별이 된 세계적인 시인이다.

1917년 12월 30일, 화룡현 명동촌(지금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용(독립운동가, 교육가 김약연의 누이)의 장남으로 태여난 윤동주는 중국이민 조선인 3세다. 윤동주네 집은 1886년 증조부 윤재옥때에 조선 함경북도 종성에서 북간도 자동(지금의 룡정시 개산툰진)에 이민왔다가 1900년 조부 윤하연때에 명동촌으로 이사왔으며 소지주로 생활이 비교적 넉넉하였다.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1895년에 출생하였으며 명동중학교출신으로 북경, 도꾜에서 류학했다.

윤동주는 1925년 4월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명동소학교는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선생의 규암서숙으로부터 발전한 학교로서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던 학교였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할때까지 윤동주는 이 학교에서 조선력사와 민족주의 및 독립사상교육을 받았다. 당시 명동소학교를 함께 다닌 급우들로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외사촌 김정우 그리고 문익환 등이였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달라자소학교 6학년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하다가 그 이듬해 룡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고 그의 집도 룡정가 제2구 1동 36호로 이사를 온다.

명동소학교시절부터 아동잡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하고 문학적 재질을 나타낸 윤동주는 은진중학교를 다니며 급우들과 함께 학교내 문예지를 발간하고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등 활약상을 보였는데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방울”이라는 제목으로 1등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동양사와 국사학문을 가르치면서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깨우쳐준 명의조선생이였다.

1934년 “삶과 죽음”, “초 한대”, “래일은 없다” 등 시작품을 쓰면서부터 윤동주는 자기 작품에 창작날자를 기록하였다. 1935년 9월 명양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창작활동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 “남쪽하늘”, “창공”, “거리에서”, “조개껍질” 등 작품들이 창작되였다. 이듬해 신사참배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페교되자 윤동주는 다시 룡정에 돌아와 광명중학교 4학년에 진입하여 학습하면서 연길에서 발행하던 “카톨릭소년”지에 “병아리”, “비자루”, “오줌싸개지도”, “무얼 먹구사나”, “거짓부리” 등 동시들을 발표하였다.

1938년 윤동주는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서울) 문과에 입학하였는데 송몽규와 함께 기숙사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그는 “새로운 길”, “슬픈 족속”, “사랑의 전당” 등 시작품과 동시 “산울림”, “고추밭”을 썼다. 1941년 25세때 윤동주는 유명한 “서시”와 “또 다른 고향”, “십자가”, “별 세는 밤”, “눈오는 지도”, “눈감고 간다”, “새벽이 올때까지”등 십수편의 원숙한 시작품을 창작하였다. 그해 12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19수로 된 자작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려 하였으나 당시 일제치하의 조선어말살정책으로 책자 발간이 무산되였다.

1942년 윤동주는 일본에 건너가서 도꾜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일제가 일본식 창씨개명을 강요하였고 또 일본에 가는 수속의 편리를 위해 히로우마로 창씨개명하였다. 일본에서 윤동주는 “쉽게 씌여진 시”,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등 작품을 썼다.

1943년 7월 14일, 도지샤대학 영문과를 다니던 윤동주는 됴꾜대학 재학중인 송몽규와 함께 사상범으로 체포되였고 그 이듬해 “독립운동”이란 죄목으로 2년도형에 언도받고 후꾸오까형무소에 수감되였다.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매일 이름모를 주사를 맞다”(송몽규)가 의문의 비명사로 생을 마감한다. 송몽규도 윤동주가 사망한지 23일만인 3월 10일에 옥사하였다.

윤동주의 유해는 한줌의 재가 되여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 룡정에 돌아왔고 가족과 친지들에 의해 룡정동산마루에 위치한 교회묘지에 안장되였다. 그 해 단오무렵 그의 묘소에는 가족들에 의해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1947년 정지용, 안병욱, 리양하, 김삼불, 정병욱 등 3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윤동주타계 2주기 모임이 서울 소공동 플로워회관에서 있었고 그 이듬해 1월에는 유고 31편이 정지용의 서문과 함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 의해 간행되였다.

1955년 윤동주타계 10주기를 맞으며 정음사에서는 88수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하였다.

1968년 연세대학교에서는 윤동주가 지내던 기숙사앞에 윤동주시비를 세웠고 1970년 10월 15일에는 윤동주타계 25주기 기념 친필유고, 유품전시회를 가졌다.

2013년 2월 27일 연세대학교는 “윤동주 유고•유품 기증 특별전”을 열고 윤동주 시인의 유족들이 전달한 시인의 육필원고, 유품 등을 공개했다. …

윤동주는 일본에서도 아세아의 평화와 화해의 상징으로 부상하였다. 1995년 일본 도지샤대학 아마데와교정에 윤동주시비가 처음 세워진 뒤를 이어 교또의 조형예술대학교정에서도 윤동주시비제막식을 성대히 치르는 등 윤동주를 기리는 행사가 이어졌다. 교또조형예술대학 교정은 윤동주시인이 일본 도지샤대학 류학시절 주숙했던 아빠트가 있는 곳으로서 윤동주시인이 그곳에서 창작의 불꽃을 지폈던 마지막 보금자리였다.

한국에서는 윤동주시인을 추모하는 좌담회, 세미나와 문학예술제 등 각종 행사가 해마다 이어지고있으며 윤동주기념사업회, 시인윤동주기념비건립위원회, 윤동주선양회와 같은 민간단체들도 설립되여 활발한 활동을 하고있다. 윤동주의 이름을 딴 문학상도 한국과 중국내에서 활발하게 운영되고있다.

윤동주의 시집도 조선어,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체코어로 번역되여 간행되여 세계각지로 전파되였다.

“별의 시인” 윤동주를 고향과 연변문단이 재조명하게 된것은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이였다.

1985년 5월, 일본 와세다대학 오오무라교수가 연변대학 권철교수와 룡정중학교 력사교원 한생철의 도움으로 룡정동산에서 윤동주시인의 묘소를 찾아냈고 그때로부터 연변에서의 윤동주연구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92년에 룡정중학교 대성중학옛터에 윤동주시비가 세워졌고 1994년 8월에는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윤동주시인의 생가가 원모습 그대로 복원되였다. 2010년 6월에는 동시 “참새”가 새겨진 윤동주시비가 연길공원 동시동네에 세워졌다. 윤동주시인의 모교 룡정중학교에서는 1985년부터 현재까지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 되면 시인의 묘소를 찾아 추모활동을 진행한다.

2012년 5월에는 연변주문련과 연변주민정국의 허가를 받고 학자, 문인 등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무어진 (사)연변윤동주연구회가 탄생하고 윤동주관련 연구사업을 폭넓게 진행하고있다.

2012년 8월 룡정시당위와 정부의 노력으로 윤동주생가는 윤동주시비를 비롯하여 그의 모든 시문(117수)을 조선문, 중문으로 새긴 시림과 경관등 35대, 생애를 담은 석판화 6폭 등으로 신선하고도 형상적인 구도로 확건되였다. 확건공사 준공식에서 전국정협 상무위원이며 원 중앙통전부 부부장, 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리덕수는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생가”라는 제자를 썼다.

“별의 시인” 윤동주, 비록 그의 몸은 오래전에 적국에서 식고 숨결은 멎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시정신은 창공의 밝은 별이 되여 영원히 빛나고있다.

뒤줄 오른쪽으로부터 윤동주, 문익환, 장준하
대성중학교옛건물앞에 세워진 윤동주시비 정면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다
2010년 6월, 연길공원 동시동네에 세워진, 동시 "참새"가 새겨진 윤동주시비
래원: 길림신문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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