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음악학원 우영일 교수,“우리 음악 대내외에 어필해야…”
2018년 02월 02일 09:28【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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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제6차 대표대회와 "새봄맞이 진달래의 꿈"중국조선족음악회 행사차 연변을 찾은 중국음악학원 우영일 교수(58세)를 만나 짧지만 깊이 있는 인터뷰를 나누었다. 적극적으로 취재진의 요구에 응해나서는 소탈한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알고 보면 우영일 교수의 어린시절 ‘음악 계몽선생’은 원 연변문련 주석인 박서성이다. 두 집안은 일찍부터 가까이 지냈고 우영일 교수는 바이올린을 켜는 박서성이 부러웠던 나머지 함께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중학교시절 학교 선전대에서 꼬마연주원으로 활약하면서 음악창작에도 흥취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 음악의 길로 나아간 첫시작이다.
우영일 교수는 성장의 길에 고정불변 음악을 견지한 것이 아니였다. 일찍 연변예술학교를 꿈의 전당으로, 자기의 인생목표로 정했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아 길림시 영길사범학교에서 일본어를 전공했고 졸업 후엔 교하의 중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와중에도 음악창작을 계속 견지한 덕분에 교하에서는 음악분야에서 꽤 이름이 알려져있었다.
후에 그는 연변림업문공단에서 작곡과 지휘를 맡았으며 성음악가협회에서 조직한 림구 문예골간 양성반에 추천받아 음악리론 학습을 할 기회를 가졌다. 길림예술학원 작곡교연실 리명준 주임은 그가 제출한 졸업작품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대번에 알아봤으며 대학시험을 치도록 적극 이끌어준 덕분에 25세의 다소 늦은 나이에 길림예술학원 음악학부에 합격했다.
1987년, 심양음악학원에 파견받아 작곡과 지휘를 배웠으며 졸업 후에는 심양항공학원 예술교연실에 배치받았다.
우영일 교수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였다. 배움의 갈증을 해소하고저 북경의 유명작곡가 시만춘(施万春)한에게서 반년간 지도를 받다가 시만춘의 제의하에 1993년 중국음악학원 작곡과 작곡기술리론 석사연구생에 도전해 수석으로 합격했으며 1995년 졸업 후 중국음악학원 작곡학부에 배치받아 화성, 가곡 창작과 분석 등 과목을 가르쳐왔다.
“음악은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즉 군중을 위해 봉사해야죠. 군중을 떠난 작품은 의의가 없습니다.”
우영일 교수는 작곡가라면 다양한 쟝르의 창작을 시도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 또한 그렇게 실천해왔다. 가곡은 물론 교향악, 실내악, 가극, 무극, 영화와 드라마 음악도 꾸준히 창작해왔다.
일찍 중앙텔레비죤방송 및 지방텔레비죤방송의 문예야회에 다양한 형식의 음악작품을 내놓았는데 그중 <동북의 양걸>은 중앙텔레비죤방송의 1993년 음력설야회 시작음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우영일 교수 또한 2007년 중앙텔레비죤방송의 음력설 가무야회의 음악 총감독을 맡은 바 있다.
그가 주요 창작인원으로 참여한 다수의 드라마 음악들은 금영상 1등상, ‘5가지 1’ 프로젝트상 등을 수상했고 노래 <고향의 비>는 아시아음악제에서 창작가곡 금상을 수상, <중국, 나의 주제가>, <어머니 축복>, <홍엽송> 등과 함께 전국 음악고등학교 음악교재에 수록되기도 했다.
그는 교하에서 나서 자랐지만 연변도 고향이라고 말한다.
“우리 민족의 고향, 조선족의 정신적 고향이죠. 저는 어려서부터 부모한테서 조선족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비록 지금껏 줄곧 한족들과 어울려 살았지만 민족적인 것들은 제 뼈속 깊이 물들어있었나 봅니다.”
우영일 교수의 작품에는 조선족의 선률 특징이 농후한 것이 많다. 작곡분야의 많은 지인들이 “우영일 교수에게는 우리가 따라할 수 없는 조선족 고유의 음감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며 그 말을 들었을 때 엄청난 민족적 긍지감을 느꼈다고 했다.
“저는 음악적인 기교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바르면 모든 것은 순조롭게 따라올 것입니다.”
한편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오다 나니 지금껏 민족의 음악을 위해 크게 해놓은 것이 없었다고 겸손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우리의 음악 발전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무보수로 발벗고 봉사할 것이라 말했다.
“우리 음악의 창작활동은 끊긴 적이 없고 수준도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음악을 대내외에 적극 알리려는 노력은 좀 더 필요해 보입니다.”
우영일 교수는 단순히 작품성만 갖고 론할 것이 아니라 멀티미디어시대에 음악분야와 선전부문에서는 협력해 작품을 포장하고 홍보하는 등 군중들에게 적극 어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또한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가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임무이기도 하다며 민족음악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