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듯, 물 마시듯… 문학은 나의 일상
2016년 11월 25일 16:12【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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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살의 박송천씨, 시인에게 정해진 나이는 따로 없지만 요즘처럼 문학이 외면받는 시대에서 한 문학인으로써의 인생을 살아가기에 그는 너무 젊다. 23일, 그를 만나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과 창작담을 들어보았다.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한것은 17살, 그는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있는 사춘기 소년이였다. 남들보다 감수성도 예민해 걸핏하면 눈물을 잘 보이기도 하는 마음 약한 소년인 그에게는 다른 누구한테도 말할수 없는 자신만의 고민과 비밀들이 참 많았다.그러한것들을 글로 적는것이 일상이 되였던 날들, 어느 하루는 수업시간에 쓴 작문 한편이 당시 담임였던 어문선생님의 칭찬을 받게 됐다. 그후 좀더 자신감을 갖게 된 그는 부지런히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내려가는 일을 계속했다.
고중 2학년이 되던 해인 2009년, 박송천씨는 자신의 처녀작인 시 “외로워서”를 《길림신문》에 발표하면서 비로소 시창작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그후에는 더욱 절실한 마음으로 시를 쓰게 됐다.
“처음엔 시라고 쓰는것들 모두가 저의 넉두리들뿐이였죠.” 지난날을 떠올리며 그는 쑥쓰럽게 웃는다. 그때문에 고중시절 한수, 두수 지어진 시들은 소중히 그의 책갈피속에서 잠들어있다가 이후 박송천씨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시에 대한 공부를 다시 시작한후 재삼 다듬어져 《장백산》, 《연변문학》, 《흑룡강신문》, 《송화강》등 문학지와 신문의 문학부간에 실려 빛을 보게 됐다. 하지만 시공부를 비롯해 그의 문학공부는 모두 스스로 배우고 터득한것, 대학시절 그의 전공은 문학이 아닌 방송사회였기때문이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지원하고싶었지만 당시 저의 모든 학과목성적은 별로여서 입학점수선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하여 어떻게든 우리 말과 글을 배울수 있는 전업을 고르고 골라 선택한것이 연변대학 연극학부의 방송사회전업, 난생처음 접해보는 방송사회였지만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해내고야마는 성격때문에 끈기로 달라붙어 덕분에 전업시험에도 무사히 통과됐다. 방송사회는 시쓰기와는 엄연히 다른 분야였지만 묘하게도 들어맞는 구석이 있었다. 특히 시랑송은 그가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발휘할수 있는 또다른 공간이였다. 이후 그는 조문학부 학생들의 교과서며 과외자습독본들을 사서 스스로 문학공부를 시작했다.
문학의 길에는 스승이 따로 없다는 말이 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한다는 가르침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로 감성으로 써야 하는것이 글이기때문이다. 더구나 작가의 예민한 감수성과 천부적인 재능을 토대로 하는것이 시창작이다. 오로지 자신과의 대화로 배워가는 문학의 길에서 박송천씨는 과연 얼마를 얻었을가.
지금까지 발표한 시(동시)가 300여수, 시집 《가슴 시린 계절에 사랑을 묻는다》와 동시집 《달은 레몬, 달은 바나나》를 펴낸 젊은 시인 박송천씨, 그동안 많은 문학지들에 글을 발표했고 우리 주 최고 문예상으로 꼽히는 진달래문예상 새별상까지 수상하게 된 그지만 아직은 시인이란 이름에도 쑥쓰러워 어쩔바를 몰라하는 소박한 젊은이다.
“사실 아직도 저는 문학이 무엇인지, 시쓰기가 무엇인지를 그 정답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시는 언제까지나 저 자신과의 대화이고 시를 쓰는 시간들은 잃어버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수 있다는것만은 분명합니다.”
오래전 시로 사춘기를 알아가던 한 소년, 밥을 먹듯, 물을 마시듯, 아침이면 깨고 저녁이면 잠이 들듯 시쓰기는 아직도 그의 일상의 한부분이다. 문학의 봉우리로 톺아올라가는 길에서 하나둘씩 깨달음을 얻으니 점점 더 어깨가 무거워나는것도 사실, 이젠 넉두리가 아닌 진정한 프로의 정신으로 시창작에 몰두하겠다고 그는 말한다. 그제날 자신이 시를 통해 위안을 얻었듯, 다른 누군가에게도 따뜻한 위안이 돼줄수 있는 그런 시를 쓰고싶다고.
글·사진 박진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