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련재—《항전별곡》(16)
2016년 05월 11일 15:19【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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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 중대 100여명 학원, 학생들중에서 감히 김선생하고 롱담을 할수 있는 인물은 오직 문정일 하나뿐이였다. 그의 그러한 독특한 기량은 아무도 따라배우지 못하는 절묘의 기량이랄 밖에 없었다. 40여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나는 아직 그 비결의 소유를 모르고있다. 당시 문정일은 나나 매한가지 급료 12원짜리 학생에 불과하였다. 우리와는 달리 학원이란 명칭으로 불리는 동급생들도 있었는바 그것은 부대를 거느려본 경력이 있는 본교졸업생으로서 재입학한 사람을 일컬음이다. 그들의 급료는 우리보다 8원이 더 많은 20원이다. 그러한 8원씩을 더 받는 형장네도 김선생앞에서는 개개 다 숙연히 옷깃을 여미는 판인데 문정일이만은 기탄없이 너덜거려도 아무 일 없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라 아니할수 없었다.
“‘전쟁할 때’ 그친 너무 방자해서 못쓰겠는걸.”
김선생의 숙소에서 나와서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못마땅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더니 심운이는 대꾸 않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교문이 바라보이는데까지 왔을 때 그는 비로소 미소를 머금고 입을 뗐다.
“남들이 다 못하는노릇을 하는건 장점이라고 봐야 하겠지. 그 점은 인정을 해줘야 옳잖은가?”
“장점은 무슨 놈의 장점! 닥치는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여대는 장점?”
내가 경멸하는 어투로 이렇게 뇌까렸더니 심운이는 말없이 그저 빙글거리기만 하였다.
심운은 서울사람으로 1933년에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에서 반일활동에 종사하였다. 1940년 호북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이듬해에 팔로군에 참군하였다. 1944년 당의 파견을 받아 천진에 잠입하여 지하공작을 하던중 변절자 윤해섭의 밀고로 적에게 체포되였다가 1945년 8월에 서울 서대문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1948년에 그는 남조선반동당국에 의하여 체포되여 또다시 서울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였다. 당시 그는 서울에서 지하공작을 하고있었다. 1950년 6월, 남하한 조선인민군부대의 땅크가 벽돌담을 들이받아 무너뜨리며 서대문감옥으로 돌입하였다. 심운이는 그제야 비로소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두번째 해방을 맞이하게 되였다.
(다음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