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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무의 스승

김희관

2015년 07월 28일 15:42【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10월 중순의 하루 한 낯선 녀성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가 연변문공단에서 농악무를 배워줬고 연변예술학교에서도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농악무를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 연변에서 농악무에 관한 보도나 론문에는 우리 아버지의 업적이 하나도 적혀있지 않다.”

필자는 전화를 받은 즉시 달려가서 북경에 살고있다는 60여세의 언니와 연길에 살고있는 동생 자매들을 만났다. 사연은 이러했다.

하태일(河兑镒)선생은 1906년 경상남도 남해군 동천리 한 농민가정에서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가난때문에 학교 문앞에 못 가본 소년 하태일은 다행히도 어릴 때부터 농악무를 가르치는 고향의 전통에 힘입어 7세부터 농악무를 배웠다. 그것도 농악무중에서 가장 인기높은 상모춤을 배워서 그 어느 아이보다 뛰여나게 춤을 추는 춤군으로 자라났다. 매년 추석이나 설 명절이 돌아오면 소년춤군은 농악대를 따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공연하러 다녔다.

1936년 하태일선생은 식구를 이끌고 “북간도”라 부르는 지금의 연길시에 와 등짐을 풀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연길시내에서 땅을 파고 상수도를 설치하는 고된 육체로동을 하면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그는 일이 없을 때는 경삼남도에서 이주해온분들이 모여사는 지금의 서시장북쪽에 있는 친구네집에 모여 농악놀이를 했다.

1951년 비오는 어느날, 하태일선생에게는 반가운 일이 생겼다. 그때 연변문공단에서는 민족문화예술을 발전시키라는 당의 지시와 자치주 주장이신 주덕해동지의 직접적인 배려로 연변문공단 김태희단장이 나서서 민간예인들을 초빙했는데 하태일선생도 그 민간예인중의 한분이였다. 그때부터 연변문공단에서는 매일 저녁 양마차로 아버지를 모셔가 배우들에게 농악무를 가르치게 하고는 양마차로 집에 모셔왔다. 얼마후 그는 문공단원에 채용되였다.

연변문공단의 저명한 발레무용가 조득현선생은 그때부터 하태일선생한테 한보한보 농악무를 배우면서 그 농악무를 무대공연 프로로 개편, 창작 하게 되였다. 하태일선생은 농악무를 가르치는 한편 젊은이들과 함께 주와 길림성, 동북3성의 문예콩클무대에 올라 여라차례 상을 탔다. 1957년 국가문화부 주최 전국무용대회에서 연변가무단에서 농악무를 올려 조득현선생은 농악무 안무우수상을 받았고 하태일선생은 주연 우수상을 받았다. 그때 모주석 등 령도동지들의 접견을 받았다.

1957년, 주덕해주장의 관심과 배려하에 연변예술학교가 창립되였다. 연변문공단에서 무용교원으로 50세를 훌쩍 넘긴 하태일선생은 1959년 7월부터 연변예술학교 무용교원으로 전근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태일선생은 춤군이면서 소리군이여서 “춘향전” 진도아리랑 등을 썩 잘 불렀다.

1975년 9월, 농악무의 스승인 하태일선생은 그 소중한 농악무유산을 후대들에게 더 많이 전수하지 못한 유감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났다.

이번에 하태일선생의 딸들이 연변무용계와 문예계의 여러 선배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니 이러한 “옛말”을 모두 잘 알고있었고 그외에도 생동한 “옛말”이 많았다고 한다.

이번에 얻은 교훈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우리가 아직 이러한 력사적인 조선족문화예술인물 특히는 이미 세상을 뜬 인물을 발굴하고 상세한 기록과 연구를 하는데 노력이 부족하다는것이다. 현재 우리앞에는 여러가지 력사저작이 펼쳐지고있지만 력사인물에 관한 더욱 구전하고 학술적가치가 있는 저작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혁명투쟁시기 력사인물에 대한 연구는 많은편인 반면 문화예술인물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적은것도 사실이다. 더우기 지금의 열린 세상에서 많이 흩어져 살아가면서 이러한 연구사업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영원히 되살릴수 없는 흠집을 남길것이다.

또 한가지는 우리가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정리함에 있어서 그 뿌리를 정확히 찾아내고 그 문화유산의 전승과정을 되도록 정확하게 밝혀내여 문화유산의 력사적인 흐름을 밝히고 계속 전승하는것이다. 민요 “아리랑”, “도라지”, “노들강변” 등은 어떻게 우리에게 전승되였을가? “농악무”, “장고춤”, “물동이춤” 등은 어떻게 전승되였을가? “춘향전”, “심청전” 등 고전은 어떻게 전승되고 무대에 올려졌을가? 이러한 과제는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깊이 진행될뿐만아니라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서 그런 문화유산들이 대중속에서 계속하여 전승되게 하는것도 아주 중요한 사명이다.

금년 7월, “연변인물연구회”가 연변인물과 중국조선족인물 연구의 대장정을 위해 닻을 올렸다. 앞으로 “연변인물연구회”가 실사구시적이고 력사적이며 넓은 시각으로 연변의 인물과 중국조선족인물들을 발굴하여 권위적인 “인물록”, “인물평전”, “인물전기” 등 책자와 인물영상다큐를 펼쳐낼것이라 믿는다.


10월 중순의 하루 한 낯선 녀성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가 연변문공단에서 농악무를 배워줬고 연변예술학교에서도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농악무를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 연변에서 농악무에 관한 보도나 론문에는 우리 아버지의 업적이 하나도 적혀있지 않다.”

필자는 전화를 받은 즉시 달려가서 북경에 살고있다는 60여세의 언니와 연길에 살고있는 동생 자매들을 만났다. 사연은 이러했다.

하태일(河兑镒)선생은 1906년 경상남도 남해군 동천리 한 농민가정에서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가난때문에 학교 문앞에 못 가본 소년 하태일은 다행히도 어릴 때부터 농악무를 가르치는 고향의 전통에 힘입어 7세부터 농악무를 배웠다. 그것도 농악무중에서 가장 인기높은 상모춤을 배워서 그 어느 아이보다 뛰여나게 춤을 추는 춤군으로 자라났다. 매년 추석이나 설 명절이 돌아오면 소년춤군은 농악대를 따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공연하러 다녔다.

1936년 하태일선생은 식구를 이끌고 “북간도”라 부르는 지금의 연길시에 와 등짐을 풀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연길시내에서 땅을 파고 상수도를 설치하는 고된 육체로동을 하면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그는 일이 없을 때는 경삼남도에서 이주해온분들이 모여사는 지금의 서시장북쪽에 있는 친구네집에 모여 농악놀이를 했다.

1951년 비오는 어느날, 하태일선생에게는 반가운 일이 생겼다. 그때 연변문공단에서는 민족문화예술을 발전시키라는 당의 지시와 자치주 주장이신 주덕해동지의 직접적인 배려로 연변문공단 김태희단장이 나서서 민간예인들을 초빙했는데 하태일선생도 그 민간예인중의 한분이였다. 그때부터 연변문공단에서는 매일 저녁 양마차로 아버지를 모셔가 배우들에게 농악무를 가르치게 하고는 양마차로 집에 모셔왔다. 얼마후 그는 문공단원에 채용되였다.

연변문공단의 저명한 발레무용가 조득현선생은 그때부터 하태일선생한테 한보한보 농악무를 배우면서 그 농악무를 무대공연 프로로 개편, 창작 하게 되였다. 하태일선생은 농악무를 가르치는 한편 젊은이들과 함께 주와 길림성, 동북3성의 문예콩클무대에 올라 여라차례 상을 탔다. 1957년 국가문화부 주최 전국무용대회에서 연변가무단에서 농악무를 올려 조득현선생은 농악무 안무우수상을 받았고 하태일선생은 주연 우수상을 받았다. 그때 모주석 등 령도동지들의 접견을 받았다.

1957년, 주덕해주장의 관심과 배려하에 연변예술학교가 창립되였다. 연변문공단에서 무용교원으로 50세를 훌쩍 넘긴 하태일선생은 1959년 7월부터 연변예술학교 무용교원으로 전근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태일선생은 춤군이면서 소리군이여서 “춘향전” 진도아리랑 등을 썩 잘 불렀다.

1975년 9월, 농악무의 스승인 하태일선생은 그 소중한 농악무유산을 후대들에게 더 많이 전수하지 못한 유감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났다.

이번에 하태일선생의 딸들이 연변무용계와 문예계의 여러 선배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니 이러한 “옛말”을 모두 잘 알고있었고 그외에도 생동한 “옛말”이 많았다고 한다.

이번에 얻은 교훈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우리가 아직 이러한 력사적인 조선족문화예술인물 특히는 이미 세상을 뜬 인물을 발굴하고 상세한 기록과 연구를 하는데 노력이 부족하다는것이다. 현재 우리앞에는 여러가지 력사저작이 펼쳐지고있지만 력사인물에 관한 더욱 구전하고 학술적가치가 있는 저작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혁명투쟁시기 력사인물에 대한 연구는 많은편인 반면 문화예술인물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적은것도 사실이다. 더우기 지금의 열린 세상에서 많이 흩어져 살아가면서 이러한 연구사업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영원히 되살릴수 없는 흠집을 남길것이다.

또 한가지는 우리가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정리함에 있어서 그 뿌리를 정확히 찾아내고 그 문화유산의 전승과정을 되도록 정확하게 밝혀내여 문화유산의 력사적인 흐름을 밝히고 계속 전승하는것이다. 민요 “아리랑”, “도라지”, “노들강변” 등은 어떻게 우리에게 전승되였을가? “농악무”, “장고춤”, “물동이춤” 등은 어떻게 전승되였을가? “춘향전”, “심청전” 등 고전은 어떻게 전승되고 무대에 올려졌을가? 이러한 과제는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깊이 진행될뿐만아니라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서 그런 문화유산들이 대중속에서 계속하여 전승되게 하는것도 아주 중요한 사명이다.

금년 7월, “연변인물연구회”가 연변인물과 중국조선족인물 연구의 대장정을 위해 닻을 올렸다. 앞으로 “연변인물연구회”가 실사구시적이고 력사적이며 넓은 시각으로 연변의 인물과 중국조선족인물들을 발굴하여 권위적인 “인물록”, “인물평전”, “인물전기” 등 책자와 인물영상다큐를 펼쳐낼것이라 믿는다.
10월 중순의 하루 한 낯선 녀성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가 연변문공단에서 농악무를 배워줬고 연변예술학교에서도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농악무를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 연변에서 농악무에 관한 보도나 론문에는 우리 아버지의 업적이 하나도 적혀있지 않다.”

필자는 전화를 받은 즉시 달려가서 북경에 살고있다는 60여세의 언니와 연길에 살고있는 동생 자매들을 만났다. 사연은 이러했다.

하태일(河兑镒)선생은 1906년 경상남도 남해군 동천리 한 농민가정에서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가난때문에 학교 문앞에 못 가본 소년 하태일은 다행히도 어릴 때부터 농악무를 가르치는 고향의 전통에 힘입어 7세부터 농악무를 배웠다. 그것도 농악무중에서 가장 인기높은 상모춤을 배워서 그 어느 아이보다 뛰여나게 춤을 추는 춤군으로 자라났다. 매년 추석이나 설 명절이 돌아오면 소년춤군은 농악대를 따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공연하러 다녔다.

1936년 하태일선생은 식구를 이끌고 “북간도”라 부르는 지금의 연길시에 와 등짐을 풀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연길시내에서 땅을 파고 상수도를 설치하는 고된 육체로동을 하면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그는 일이 없을 때는 경삼남도에서 이주해온분들이 모여사는 지금의 서시장북쪽에 있는 친구네집에 모여 농악놀이를 했다.

1951년 비오는 어느날, 하태일선생에게는 반가운 일이 생겼다. 그때 연변문공단에서는 민족문화예술을 발전시키라는 당의 지시와 자치주 주장이신 주덕해동지의 직접적인 배려로 연변문공단 김태희단장이 나서서 민간예인들을 초빙했는데 하태일선생도 그 민간예인중의 한분이였다. 그때부터 연변문공단에서는 매일 저녁 양마차로 아버지를 모셔가 배우들에게 농악무를 가르치게 하고는 양마차로 집에 모셔왔다. 얼마후 그는 문공단원에 채용되였다.

연변문공단의 저명한 발레무용가 조득현선생은 그때부터 하태일선생한테 한보한보 농악무를 배우면서 그 농악무를 무대공연 프로로 개편, 창작 하게 되였다. 하태일선생은 농악무를 가르치는 한편 젊은이들과 함께 주와 길림성, 동북3성의 문예콩클무대에 올라 여라차례 상을 탔다. 1957년 국가문화부 주최 전국무용대회에서 연변가무단에서 농악무를 올려 조득현선생은 농악무 안무우수상을 받았고 하태일선생은 주연 우수상을 받았다. 그때 모주석 등 령도동지들의 접견을 받았다.

1957년, 주덕해주장의 관심과 배려하에 연변예술학교가 창립되였다. 연변문공단에서 무용교원으로 50세를 훌쩍 넘긴 하태일선생은 1959년 7월부터 연변예술학교 무용교원으로 전근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태일선생은 춤군이면서 소리군이여서 “춘향전” 진도아리랑 등을 썩 잘 불렀다.

1975년 9월, 농악무의 스승인 하태일선생은 그 소중한 농악무유산을 후대들에게 더 많이 전수하지 못한 유감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났다.

이번에 하태일선생의 딸들이 연변무용계와 문예계의 여러 선배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니 이러한 “옛말”을 모두 잘 알고있었고 그외에도 생동한 “옛말”이 많았다고 한다.

이번에 얻은 교훈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우리가 아직 이러한 력사적인 조선족문화예술인물 특히는 이미 세상을 뜬 인물을 발굴하고 상세한 기록과 연구를 하는데 노력이 부족하다는것이다. 현재 우리앞에는 여러가지 력사저작이 펼쳐지고있지만 력사인물에 관한 더욱 구전하고 학술적가치가 있는 저작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혁명투쟁시기 력사인물에 대한 연구는 많은편인 반면 문화예술인물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적은것도 사실이다. 더우기 지금의 열린 세상에서 많이 흩어져 살아가면서 이러한 연구사업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영원히 되살릴수 없는 흠집을 남길것이다.

또 한가지는 우리가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정리함에 있어서 그 뿌리를 정확히 찾아내고 그 문화유산의 전승과정을 되도록 정확하게 밝혀내여 문화유산의 력사적인 흐름을 밝히고 계속 전승하는것이다. 민요 “아리랑”, “도라지”, “노들강변” 등은 어떻게 우리에게 전승되였을가? “농악무”, “장고춤”, “물동이춤” 등은 어떻게 전승되였을가? “춘향전”, “심청전” 등 고전은 어떻게 전승되고 무대에 올려졌을가? 이러한 과제는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깊이 진행될뿐만아니라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서 그런 문화유산들이 대중속에서 계속하여 전승되게 하는것도 아주 중요한 사명이다.

금년 7월, “연변인물연구회”가 연변인물과 중국조선족인물 연구의 대장정을 위해 닻을 올렸다. 앞으로 “연변인물연구회”가 실사구시적이고 력사적이며 넓은 시각으로 연변의 인물과 중국조선족인물들을 발굴하여 권위적인 “인물록”, “인물평전”, “인물전기” 등 책자와 인물영상다큐를 펼쳐낼것이라 믿는다.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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