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호서촌의 앞날을 그려보는 박광석서기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였다 |
10년전 생계도 유지하기 힘들어 촌민들이 고향마을을 등지고 하나,둘씩 빠져나간 마호서촌, 오늘날 외국, 외지로 로무나간 촌민들이 고향을 찾아 싼값에 팔아버린 집터를 되찾고 새 삶은 일구는 행복의 요람으로 화려한 변신을 실현했다.
돈화시 강원진의 유일한 조선족행정촌-마호서촌은 조선족촌민들의 끈질긴 사랑과 피땀으로 되살린 우리 민족 삶의 터전이다.
지난 11월, 기자일행은 한옥을 모방하여 개조건축된 아담하고 널직한 마호서촌 박광석서기의 자택에서 바닥치고 일떠선 마호서촌의 간고한 발전려정을 들어볼수 있었다.
★ 파산에 이른 빈곤촌에서 치부의 활주로로
마호서촌은 돈화시 강원진의 유일한 조선족행정촌이다. 전 촌은 86가두에 325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호적상 전부 조선족이다.
2000년부터 련속 3년동안 자연재해를 본 마호서촌은 무수확으로 촌민들이 생계마저 유지하기 힘들었다. 2003년 박서기를 중심으로 한 촌간부들은 촌의 수전을 한전으로 바꾸자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조선족들이 한전을 잘 다루지 못한 상황에 비추어 수전을 한전으로 바꾼후 전부 한족들에게 임대시켜 심게 하고 조선족촌민들은 그 임대료로 2,3산업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치부의 길을 개척했다.
박서기의 인솔하에 촌에서는 처음으로 40헥타르의 수전을 한족들에게 임대를 주었다. 이렇게 수전에서 손을 땐 촌민들은 조선족민속음식점을 개업하기도 하고 한국,일본 그리고 국내 기타 도시로 로무나가기도 했으며 중약재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조선족과 한족이 함께 어울려진 마호서촌은 치부의 길에서 민족단결의 조화로운 풍경선을 이루었고 촌경제도 날로 활성화됐다.
★ "농촌에서도 잘 하면 한국가기만 낫다"
현재 마호서촌 촌민들은 약재와 더덕 등 경제작물을 심기도 하고 양식합작사를 꾸려 5-6호씩 묶어서 소, 닭 등을 양식하면서 짭잘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새로운 항목을 보급할때마다 촌간부들이 먼저 앞장서서 시험해보았다. 금년에도 박서기는 실험으로 산들깨를 10쌍 심었다고 한다. 결과 곡식심기보다 수익이 크고 인공이 적게 들며 경제효과성이 좋았다. 금년에 50만원의 톡톡한 수입을 본 박서기는 산들깨항목을 주문식농업의 방식으로 앞으로 전 촌에 보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로무송출도 마호서촌 경제수입창출 주요항목의 하나이다. 해마다 한국, 일본, 태국 등으로 30여명 송출, 년 300만원이상의 로무수입을 보고 있다. 해외로무나간 촌민들은 일정한 정도로 돈이 저축되면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에서 집을 사고 2,3차산업에 종사하면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 고향에 집터 되찾아달라는 부탁이 날로 늘어
"요즘에는 한국이나 외지에 나간 분들이 고향에 집터를 되찾아달라는 부탁이 날로 늘어나고 있어요". 박광석서기는 촌경제가 활성화되고 촌 기초시설건설이 날로 완벽해지면서 이전에 팔았던 집터를 되찾아달라는 고향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전에 3000원하던 집터가 근 5년사이에 10배 오른 3만원으로 값이 뛰여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촌민들은 고향에 돌아와 추억을 찾고 행복한 생활을 갈망하고 있다. 출국로무로 번 돈으로 고향에 아담한 한옥식 복식주택을 짓고 집안의 인테리어는 한국을 모방하여 깨끗한 온돌바닥을 설치한다. 주방과 화장실은 도시 아파트 못지 않게 아담하게 만들었고 태양에네르기를 리용하여 24시간동안 더운 물을 사용한다. 박광석서기는 "이전에 집터를 싼값에 팔아버린 촌민들이 많이 후회하고 있어요. 지금 와서 집터를 찾기가 많이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돌아오려는 촌민들을 위해 힘껏 쟁취하고 있어요"라고 한다.
★ 한국 농촌을 본받아 새 농촌건설에 쏠쏠한 재미를 붙혀
"마호서촌은 한장의 화지이고 촌간부를 비롯한 전체 촌민들은 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 할수 있어요" 박서기가 말한다.
마호서촌에 들어서면 쭉쭉 뻗은 세멘트길 량켠에는 한옥을 본받은 촌민들의 주택이 독특한 풍경선을 이루었다. 산뜻한 색상의 기와, 깨끗하고 아담하게 정리된 마당, 처마밑에 달아맨 빨간 고추와 노란 옥수수가 행복한 생활을 속삭여주고 있다.
마호서촌에 한갈래 강이 있는데 촌에서는 도랑을 설계하여 도랑물이 매 가두의 앞으로 흘러들게 했다.
2006년 조선족, 한족 촌민들은 공동으로 힘을 모어 1000평방메터의 민족조화문화광장을 수건했다. 농한기가 되면 조선족, 한족 형제들이 이곳에서 문구놀이도 하고 노래와 춤으로 즐기기도 했다.
★ 거리 하나 사이둔 사이좋은 조선족, 한족 형제마을
마호서촌의 동쪽에 거리 하나를 사이두고 마호동촌이라는 한족마을이 있다. 마호서촌이 3년 자연재해로 가장 어려웠던 시기 마호동촌의 촌서기, 주임 곽진문(郭进文)이 촌대표들과 함께 박서기를 찾아와 그의 손을 잡으면서 어려움을 함께 이겨나가자고 약속한적이 있었다.
곽진문은 "촌이 발전하자면 길이 열려야 한다. 우리 촌은 산도 있고 강도 있다.그리고 촌집체수입이 마호서촌에 비해 좀 나은편이다. 우리 함께 힘을 모아 길을 열고 치부로 나가보자"고 제의했다. 이렇게 마호동촌에서 60만원, 마호서촌에서 20만원 출자하여 4킬로메터의 길을 닦았고 이 거동에 감동을 받은 돈화시위, 시정부 지도자 그리고 교통부문은 그들을 협조하여 4킬로메터의 길을 더 닦아주었고 또 마호서촌과 동촌의 집집 앞으로 세멘트길을 닦아주었다.
한족형제마을의 도움으로 촌경제가 활성화된 마호서촌은 한족형제들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경제가 호전되자 마호서촌은 촌의 기초시설건설에 중점 투입했고 원유의 낡은 나무바자를 철공예바자로 바꾸었다. 박서기는 또 마호동촌의 촌지도자들을 찾아 일부분 자금을 내주면서 마호동촌의 나무바자를 철공예바자로 전부 바꾸어주었다.
2009년 마호서촌은 돈화시정부로부터 민족단결진보 중점촌으로 평선됐다.
농업실용기술서적을 무료로 받고 있는 촌민들 |
래원: 길림신문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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