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책들에 다르게 실린 리홍광의 초상사진. |
“우리의 하늘에 높이 걸려서 승리의 군기(軍旗)를 비춰주는 홍광 돌격하라! 우리의 제1로군! (高悬在我们的天空中 普照着胜利军旗的红光
冲锋呀我们的第一路军)”
항일전쟁시기 동북인민혁명군의 총지휘였던 양정우장군(1905~1940)이 작사한”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군가”. 이 “군가”에는 “홍광(红光)”이란 익숙한 단어가 핵심단어로 등장한다. 그렇다. 다름아닌 양정우장군의 가장 친밀한 전우이며 동북항일련군의 우수한 장령이였던 조선족항일명장 리홍광이다. 양정우장군이 친히 작사하여 노래로까지 기렸던 리홍광은 후날 중국의 모택동주석마저 “리홍광은 동북의 유명한 의용군 수령중의 한분이였다(李红光是东北有名的义勇军领袖之一)”고 높이 평가했던 위인이기도 했다.
투사들이 알고있는 리홍광
김일성동지는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5권 제14장(장백사람들), 제4절(남만의 전우들과 함께)에서 전우 조국안(1936년 희생)을 통해 다음과 같이 리홍광을 기술하고 있다.
길림성 영길현 태생인 조국안은 1934년 가을부터 1군 2사 사장 겸 정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가 지휘하는 1군 2사는 조선사람들이 반석에서 조직한 반일인민유격대를 모체로 하고 여기에 위만군과 산림대에서 넘어온 사람들로 구성된 1사 1련대를 포함시켜 꾸려진 사단이였다. 사단의 기본활동구역은 반석현과 그 주변일대였다.
1935년 8월 몽강현(현재 정우현) 나루훈에서 1군과 상봉하게 된 김일성주석은 인사하러 찾아온 조국안이 조선족출신의 전령병감을 한명 골라달라는 청탁에 흔쾌히 동의하면서 “조사장은 조선사람들과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게 아닌가?”고 묻는다. 이에 조국안은 “특별한 인연은 없는데 리홍광, 리동광(중공남만성위원회 조직부장. 1937년 희생)을 알게 된 다음부터 조선동무들에게 매혹되기 시작했습니다. 리홍광이 소본량을 료정냈을 때 우리가 얼마나 감탄했는지 간도사람들은 아마 다 모를겁니다.”하고 대답한다.
조국안이 말하는 소본량이란 류하현일대에서 인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략탈하던 위만군의 악질 고위장교였다. 당시 소본량이 둥지를 틀고있던 삼원포는 사방이 산들로 둘러싸여있고 그 지세가 험난하여 군사주둔요지로 알맞은 곳이였다. 당시 남만에 있는 여러 항일련군들이 수차 이곳을 공격하였으나 모두 성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삼원포를 공략한다는것은 범의 아구리에서 이발을 빼기보다도 더 어렵다”는 말이 나돌 지경이였다. 바로 이런 부대를 리홍광이 류하현 삼원포와 고산자, 량수하자 일대에서 녹여낸것이다. 리홍광은 소본량을 녹여낸 다음 량수하자부근에서 1군 지휘부가 적의 대병력에 의해 포위되였을 때 누구도 비할수없는 대담성과 높은 기지를 발휘하여 양정우를 구출한다. 그때로부터 양정우를 비롯한 1군 간부들은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용맹의 상징으로 총애하였다.
조국안은 리홍광이 전사했을 때 양정우이하 1군의 모든 간부들과 대원들이 얼마나 슬퍼했는지 다 말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항일련군 제1군의 전투력사과정에서 리홍광은 줄곧 양정우장군의 친근한 전우였으며 믿음직한 조수였다. 1934년 12월에 양정우장군은 중공만주성위에 보내는 보고서에 이렇게 적고있다.
“리홍광동지는 일처리에서 견정하고 군사상에서 자립적인 지휘능력을 가지고있으며 사업에서 적극적이다…”
영광으로 빛나는 장군의 발자취
1910년, 조선 경기도 룡암군 (지금의 한국 경기도 용암군)단동면에서 출생한 리홍광은 리홍해, 리의산이라고도 불렸다. 9살 되던 해에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에 못이겨 그는 부모를 따라 중국 길림일대로 이주했고 1926년에 길림성 이통현 류사저자툰에 정착했다.
1927년 리홍광은 농민동맹회에 가입하였으며 1930년 3월에 이통현 삼도구에서 로농적위대를 세우고 대장을 담임하였다. 적위대는 친일분자를 견결히 타격하고 악패지주를 엄벌하여 군중들의 옹호와 환영을 받았다.
1930년 8월, 중공반석현위가 성립된후 리홍광은 적극적으로 진보활동에 참가하여 당지 당조직의 신임을 얻었다. 이해 그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단원으로 되였으며 9월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 8월, 중공만주성위는 군중항일투쟁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반석중심현위를 건립하고 중심현위가 령도하는 쌍(양)이(통)특별지부를 내왔는데 리홍광이 특별지부 조직위원을 담임하였다.”9.18”사변후, 리홍광 등은 전문적으로 한간을 징벌하는”개잡이대”를 내왔는데 리홍광이 대장을 담임하였다. 1932년 2월, 그는 반석중심현위 위원으로 조동되여 반석적색유격대 대장을 담임하였다. 같은해 4월, 그는 반석”4.3”반일폭동을 친히 조직하고 령도하였다. 1932년 6월, 중국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동북 첫 항일무장- 만주공농반일의용군 제1군 4종대가 반석지역에서 성립되였는데 리홍광은 대부(隊部)에서 사업하였다. 그후 의용군은 중국공농홍군 제32남만유격대로 개칭되였으며 양정우가 대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교도대 정위를 담임하였다. 1933년 9월, 남만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로 개편되고 양정우가 사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군참모장 겸 제1사 사장을 담임하였다. 극히 어려운 조건하에서 리홍광과 양정우 등 공산당원들이 령도하는 동북인민항일무장은 동북지역에서 투쟁을 견지하여 일본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조선진공작전 전개, 25세를 일기로 희생
리홍광은 조선 국내진공작전도 활발하게 전개, 륙속 승전고를 울리며 조선인민들의 항일투지를 크게 고무하했다.
1934년 12월과 1935년 1월 리홍광은 200여명의 기마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북 후창군(현 김형직군) 하성읍과 동흥성을 습격했다. 그번 작전이 얼마나 신출귀몰했던지 당시”동아일보”등은 “리홍광은 약관의 녀비적”이라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특히 동흥성은 놈들의 방어공사가 든든하여 “금성철벽”이라 부르는 곳이였다. 하지만 리홍광은 부대를 이끌고 달밤에 동흥성을 들이쳤고 일본놈의 주구 열두놈을 체포했다. 또한 대량의 총과 탄약,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후날 사학가들은 이 전투가 “일본 불패 신화”에 타격을 줬다는데 그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1935년 5월 상순, 리홍광은 부대를 거느리고 일본괴뢰군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 망원경을 들고 적들의 기관총화점을 까부실 유리한 지형을 찾고 있는데 돌연 기관총탄이 그의 오른쪽 흉부를 꿰뚫고 나간것이다. 붉은 피가 그의 낡은 군복을 붉게 물들였다. 리홍광의 4명 경위원이 즉시 그를 담가에 메고 동쪽의 산등성이를 넘어 환인현 해청화부락으로 호송하였다. 그러나 상처가 엄중하여 구급치료를 하였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튿날인 1935년 5월 12일, 남만에서 위력을 떨치던 항일명장 리홍광은 불행하게 25세를 일기로 희생되였다.
깊은 산속에 모신 유체와 “리홍광지대”
리홍광의 유체는 당시 제1사 후근부 부장인 한진이 책임지고 비밀리에 지금의 신빈현 홍묘자촌 대청골의 큰 호두나무밑에 묻었다.
지난 1997년 신빈, 본계, 환인현 당사연구실이 합동 답사해 장군의 묘소를 확인했다. “답사록”은 “(길쭉한) 중국식이 아닌 (동그란) 조선식 무덤 형태 등을 볼때, 부하 한진이 그의 주검을 수습해 매장한 곳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장군의 묘소를 깊은 산속 음지에 쓴것은 일본군이 유체를 훼손할가봐서였다고 분석했다.
한편 장군의 존함으로 명명된 “리홍광지대”의 전신은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였다.(후에 동북민주련군 독립4사,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 등으로 개칭되였음) 사료에 따르면 “리홍광지대”는 1946년 2월 23일 통화시에서 창건되였다. 이날은 양정우장군 순국 6돐기념일이자 쏘련홍군 탄생기념일이기도 했는데 통화시 각계 인민들은 항일련군 제1로군 총지휘이며 정치위원인 양정우와 참모장 리홍광 및 기타 혁명선렬들을 추모하는 추도회를 열고 양정우동지와 리홍광동지의 빛나는 업적을 회고하였다고 한다. 료동군구의 지도자들도 이 회의에 참석하였는바 회의에서는 양정우와 리홍광 동지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료동군구의 명령에 의해 통화지대와 조선의용군 남만1지대를 각각 동북민주련군 료동군구”양정우지대”와”리홍광지대”로 명명하였다.
“리홍광지대”는 동북해방전쟁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해방후 장군이 유격대를 창건한 반석현에는”홍광”이라 명명한 거리, 상점, 공장, 학교들이 나타났다. 1988년 11월 25일, 반석시조선족중학교는 반석시홍광중학교로 개칭했다. 학교에서 세운 리홍광장군동상에 당시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계셨던 팽진위원장이 친히 “항일민족영웅 리홍광장군”이란 제사를 남겼다.
불령의 영령, 미스터리로 남은 사진
지난 2010년 11월 25일, 장군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료녕성 무순시에서는 장군의 탄생 100돌 기념 및 무순지구조선족항일장령연구학술회를 가졌다. 오래전에 이미 장군의 사적은 여러 책자와 신문, 잡지와 방송 그리고 혁명렬사사적관을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그번 대회는 다시 한번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빛나는 로정을 회고하는데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특히 우리글로 장군의 업적을 정리함에 있어서 미스터리로 제기되고 있는 부분들이 나타나 흥미를 자아내기도 했다.
민족출판사에서 1982년에 출판한 조선문판 “불멸의 투사”(흑룡강성사회과학원 지방당사연구소, 동북렬사기념관 편집)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1997년에 출판한 “연변조선족력사화책”(연변해외문제연구소 편저)에 실린 리홍광장군의 초상사진과, 연변인민출판사에서 1990년에 출판한 “중국조선족인물전”(한준광 주필) 그리고 “세기와 더불어”(김일성회고록 제5권)에 실린 리홍광장군의 초상사진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동일한 인물인데 왜 서로 다른 모습의 초상사진이 실리게 되였을가? 이 초상사진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것일가? 력사학자들의 진일보로 되는 연구를 기대해본다.
1988년 11월 25일, 반석시조선족중학교는 반석시홍광중학교로 개칭, 학교에서 세운 리홍광장군동상에 당시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계셨던 팽진위원장이 친히 “항일민족영웅 리홍광장군”이란 제사를 남겼다. |
래원: 길림신문 | (편집: 김성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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