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백인] 불굴의 혁명투사 김산과 그의 《아리랑》
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2)
2013년 06월 03일 16:28【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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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의 김산, 국민당경찰에 체포되여 일본령사관에 넘겨진 당시 모습. |
항일전쟁의 열화가 중국대지를 불태우던 1937년 6월,중국 혁명의 성지 연안의 초라한 방에서 미국의 저명한 녀기자 헬렌(스노우부인)은 조선혁명가이면서 중국공산당원인 이 "특수신분"의 혁명가 김산과 마주하고 그의 파란만장한 전투적 생애를 낱낱이 기록하고있었다.
손에 경련이 일도록 받아쓰면서 내심 감복과 찬탄, 신기함을 금할수 없었던 그녀는 후날 그들의 합동저서 《아리랑》에 "...그러한 준엄한 시련을 철학적인 과학성을 보존하며 견정한 태도로 맞받아 이겨내면서 의젓이 살아갈만한 사람 과연 몇사람이나 있을가...김산은 현대에 있어서 가장 피비린내 나고 가장 험악하며 가장 혼란한 대동란가운데 뛰여든 민감한 지식인-그의 근본바탕은 리상주의시인이며 작가인 지식인의 한사람이다..."라고 써넣었다.
망명길에 나선 나어린 구도자
김산의 원명은 장지락(張志樂, 장명,장지학,류한평,류청화 등 가명으로 지하투쟁 진행),1905년 3월 10일 조선 평안북도(平安北道) 룡천군(龍川郡) 하장동(河張洞)의 한 자작농의 셋째 아들로 태여났다. 그는 1919년 평양의 "3.1"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의 피 비린 탄압을 목격하게 된다. 나라 찾는 길을 대체 어디에 있는걸가?
1919년 여름, 여라문살되는 그는 불타는 구지욕을 앞세우고 일본 도꾜제국대학에 가 고학을 하면서 맑스레닌주의를 접하게 되고 "인간해방의 비책"을 배우고저 씨베리아를 향해 북상한다. 그 길에 그는 중국의 신흥무관학교(독립운동기지)에서 군사학을 배우고상해를 거쳐 북경협화의과대학에 가 공부한다. 거기서 중국공산당창시자들인 리대소 등의 영향으로 조기공산당간행물 《혁명》잡지를 발간하면서 맑스주의를 학습하고 그 진리를 탐구한다.
이시절 그는《나라라고 하는 지리상의 표현을 무시하고 사상과 주의를 위하여 싸우며 억압받고있는 모든 민족을 해방시켜 극동의 하늘아래 자유의 성화를 올리려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1925년 그는 중국혁명의 중심인 광주로 간다.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법률과 철학, 경제도, 외국어도 배운다. 또한 중국공산당 조선지부의 지도자로, 조선혁명청년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혁명행동》기관지 부주필로 활약하면서 많은 조선인들을 단합시키고 혁명에로 이끌었다.
1927년 조선혁명가들과 함께 국제주의기치를 들고 광주무장봉기에 뛰여든다. 허나 봉기는 실패하여 200여명 조선인혁명가들도 무참히 희생되였다. 중국의 첫 쏘베트구역 해륙풍에서 퇴각해가면서 그는 전우들의 의지를 북돋우고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노래 "아리랑"을 부른다. "아리랑"을 부르는 그들의 두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수차의 전투와 실패속에 전우들은 희생되고 흩어졌다. 구사일생으로 나루배를 타고 산두, 향항으로 빠져나온 김산은 상해에서 행동방향을 확정하고 다시 북경에 이른다
북경에서의 지하투쟁과 체포
1929년 5월부터 김산은 북경에서 본격적인 지하투쟁을 전개하면서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대학의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중국공산당 북평시당위원회 조직부장사업을 떠메였다. 당시 북경대학은 공산주의를 전파하는 요람이고 중국신문화운동의 중심이였다. 그는 경찰들의 눈을 피해가며 북경청년학생 5.1국제로동절경축행사를 조직하였고 당강습반을 조직하면서 우수한 공산당원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조선혁명청년동맹의 대표로 동북에 파견되여 조선인, 중국인 농민동맹을 조직하였으며 그들의 정치적각성을 높여주고 명확한 행동방향을 제시하였다.
이 시기 그는 저술활동도 힘차게 진행하였다. "장북성"이라는 필명으로 일본학자 사노가꾸의 《무신론》을 중문으로 번역, 발표하며 조선의렬단 오성륜의 의거를 소설화한 작품 《기이한 무기》를 출판하였다. 한시 《한해동지를 그리며》, 《동지들이여 싸우자》등을 발표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들과 굴함없이 투쟁하려는 공산주의자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 외에도 "일본정치상의 봉건주의", "독일대통령의 권력"을 《국제역보》에 발표하였으며 《포이에르바하, 레닌, 맑스의 인생관》번역본의 서언을 쓰면서 맑스주의철학을 터득하고 공산주의실현에 대한 굳은 신념을 다진다.
1930년말 그는 국민당밀정들에게 체포되여 갖은 혹형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분과 조직관계를 절대 밝히지 않았다. 김산은 중국국적이 아니였기에 국민당은 그를 직접 살해하지 못하고 천진의 일본령사관에 넘겨 처리할수밖에 없었다. 일본경찰들은 김산의 입과 코에 도관을 넣어 머리카락을 끌어어당겨 머리를 낮추는 비인간적인 물료법으로 지독한 심문을 가했다. 하지만 김산으로부터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자 "중국사회에 위험을 조성하는자는 3년간 중국에 체류하지 못한다"는 재판을 내렸다.
재판을 받고 고향에 돌아간 그는 일제통지하의 암담한 현실에 질식할 지경이였다. 그는 하루빨리 중국혁명의 승리를 쟁취하고 조선의 독립을 가속화하며 나아가 아세아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전취하리라 다짐하였다. 1932년초 김산은 가혹한 고문에 페결핵에 걸려 신음하면서도 북경으로 다그쳐 돌아왔다. 하지만 북평의 공산당조직에서는 그의 석방을 오해하고 믿어주지 않았다. 그는 괴롭기 그지 없지만 계속 당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는 리대소가 꾸린 하남직예(直隶)제2사범학교에 가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진보적인 력사관을 전수하면서 당조직을 도와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일본경찰들의 갑작스런 포위로 또 피신하여 고양소학교에 가 교편을 잡았다. 거기서 당지의 300여명 농민학생들에게 강의하는 한편 화북대중운동에 대한 검토를 하고 농민무장폭동을 지도하였다.
천길나락 함께 나는 파랑새
여전히 북경의 당조직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그는 조직활동을 할수 없게 되였고 허약한 몸과 빈궁으로 곤경에 빠져있었다. 이때 조아평(赵亚平)이라는 젊은 녀대생이 과일과 책을 사들고 자주 그를 보러 왔다.김산은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발표하면서 체력을 회복하고 다시 혁명에 나설 준비하고있었다.
1933년 5월 1일 아침, 국민당 "람의사"(蓝衣社)특무들이 김산이 하숙하는 방에 뛰여들어 두 련인을 함께 체포하였다. 호송차에서 두사람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산은 다시 뵐수 있을지 모르는 련인에게 조용히 노래를 불러주며 격려하였다.
"흰새 두마리가 두터운 구름속을 날아가네/ 저 아래 세상이 닭알만하게 보이네/그 자유롭던 나래가 지금은 우리속에 갇혔구나/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리지 말지어다!"
또 그는 천진일본령사관으로 넘겨졌다. 놈들은 군화발로 걷어차고 게다짝으로 뼈가 드러날 때까지 정갱이를 때리고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잡아당기면서 귀에 피가 나도록 때리는 등 악독한 취조를 들이댔다. 하지만 김산은 강인한 의지력과 지혜로 적들과 싸웠다.
1934년 1월, 고향에서 얼마간 몸을 추슬리고 만기석방되여 또다시 북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김산은 여전히 당조직의 외면을 받았다. 모진 정신적 고통에 모대기고있을 때 장가구에 있던 조아평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혁명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련인은 간소하나 행복한 살림을 차렸다. 여기서 김산은 《정치경제지리》, 《제3차문화위기》를 비롯한 저서를 편찬해냈다.
1935년 가을, 김산은 조아평과 함께 석가장으로 향했다. 그는 당지 공산당원들과 련계를 맺고 평한(平汉)철도 부륜학교(扶轮学校) 당지부를 설립하였으며 왕서량(王书良), 강서화(康瑞华), 도희진(陶希晋) 등 7명 당원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해방후 전국인대 법률위원회 고문, 중앙조사부 부부장, 석가장시 시장, 국가감찰부 전원, 운남성 부성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요직을 맡았다.
김산과 조아평은 적극 사업하여 부륜학교당지부를 토대로 하북성당위원회 직속 석가장사업위원회를 조직하고 수많은 학생과 로동자들을 동원하여 북경의 "12.9"애국운동을 성원하였다. 그들은 거리에 떨쳐나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웨치면서 성세호대한 시위를 진행하였다.
투사는 죽지 않는 불사조
1936년 8월 김산은 상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파견을 받고 천신만고를 겪으며 중화쏘베트지구로 간다. 이듬해 1월 연안에 이른 그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초청으로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와 화학, 물리 등 학과를 강의하였다.
그해 4월 김산은 안해 조아평로부터 아들이 태여났다는 희소식을 접한다. 그는 "아들이 크면 꼭 백의동포의 후손임을 알려주고 군대에 보내 민족해방을 위해 분투하게 하라"는 격정의 회신을 보냈다. 6월, 그는 미국 녀기자 헨렌과의 인터뷰를 가졌다. 그러나 이 시기 그는 숨막히는 고통에 시달리고있었다. 육체적으로는 결핵때문에 자주 각혈하고 페에서 고름이 배출되는 아픔을 견뎌내고있었고 정신적으로는 당시 섬감녕변구 보안처로부터 일본간첩으로 의심받고있는중이였다. 그러던 1938년 10월경 그는 끝내 비밀리에 처형되였다. 그때 그는 33세였다.
미국에 돌아간 녀기자 헬렌은 1941년 "님.웨일즈"라는 필명으로 김산의 일대기를 다룬 저서 《아리랑의 노래》를 영문판으로 뉴욕에서 출판하였다. 그후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로 번역출판되면서 이 비운의 조선혁명가 김산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김산은 《아리랑》에서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한다. "내 전 생애는 실패의 련속이였다.또한 우리 나라의 력사도 실패의 력사였다...다행스럽게도 내가 경험했던 비극과 실패는 나를 파멸시킨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나에게는 환상이라는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력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있다. 력사의 의지를 알 사람은 누구일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을 뒤엎지 않으면 안되는 피억압자일뿐이다...."
위험천만한 백색테로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쟁을 밀고나아갔던 김산, 그는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피압박자들의 승리를 확신한 공산주의자였다.
김산의 아들 고영광은 어른이 되어서야 자신은 조선족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는 절대로 변절자가 아니다"는 확신을 얻게 되고 또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자상히 소개된 아버지의 사적을 알게 되면서 로동지들을 찾아 료해하였다. 그리고 자신있게 중앙조직부와 공산당총서기에게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판정을 시정해줄것을 바라는 편지를 띄웠다.
1983년 1월, 중앙조직부에서는 몇년간의 조사를 거쳐 “장명동지에 대한 그릇된 판결을 취소하고 그의 당적을 회복할데 관한 결정”을 내렸다. 결정에서는 “장명동지의 죽음은 특정한 력사시기에 발생한 하나의 억울한 사건이므로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 "장명동지는 당에 충성하였고 우리 나라 인민의 혁명사업에 기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김산동지는 비록 억울하게 죽었지만 그의 드팀없는 혁명지조와 확고한 공산주의신념, 조선민족의 강인한 의지는 《아리랑》과 더불어 영원히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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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연안에서 미국녀기자 스노우 헬렌의 취재를 접수하고 남긴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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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녀기자 스노우 헬렌과 《아리랑의 노래》초판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