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문학 그 자체”로, “문학외의 어떤것으로도 대체할수 없는 궁극적인 실체”(《창작수기》에서)로 인식하는 소설가, 그녀가 바로 김서연이다. 그만큼 김서연에게 있어 문학은 삶의 일부분으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이 될것이다. 요즘과 같이 문학이 홀대를 받는 시대에 이처럼 문학을 삶의 일부분으로 간주하는 신세대 소설가가 있다는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김서연은 한동안 소설을 통하여 성의 문제, 성과 사랑의 문제에 집착하여왔다. 초기의 다수 작품은 이런 내용이 주되는 모티프를 이룬다. 단편 《나의 버려진 처녀》(2004), 《육정》(2005), 《아이》(2005)등 작품은 기본적으로 성과 사랑의 문제를 다루고있고 《룰루랄라~ 랄라랄라~》(2006)에서는 조금 다른 실험을 하다가 《4am》(2007)에 오면 다시 성과 사랑, 그리고 복수의 주제를 얽어서 다루고있다. 물론 작품마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면서 문제성의 강도에서는 점차 강화되고 심화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성을 핵심으로 작품의 문제를 풀어간다는 점에서는 같은 경향을 이어왔다 할수 있다.
우리 문단에서 사실상 금기시되여왔던 성의 문제를 대담히 실험했다는 점에서 김서연의 작업은 값진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빈번한 성의 로출이나 수의성은 오히려 도덕적인 문제성을 야기할수도 있다. 그리고 김서연이 다룬 성과 사랑의 문제는 아직 성장소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있어 필자로서는 좀더 진일보한, 혹은 성숙된 문제의식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생각해왔다. 그런데 최근 김서연은 이런 한계를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을 선보이고있다. 특히 《내 인생의 고양이 한마리》(2007)부터 주제의식은 큰 변화를 보인다. 그리고 이번의 단편 《파리, 비둘기, 고양이, 301호 남자 그리고 우방타워》에서는 또다시 진일보한 변화의 모습을 보이고있다.
이 작품도 일인칭으로 씌여졌고 기본적으로 사적인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일인칭 “나”의 시점에서 “나”와 파리, “나”와 비둘기, “나”와 고양이, 그리고 “나”와 301호 남자의 관계가 이 소설의 기본적인 갈등관계이다. 비둘기와 고양이의 관계가 있지만 그것 역시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 관계이다. 이와 같이 사소설적인 범주를 아직 탈피하지 않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는것은 이들 사적인 상황인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인식들이 오늘날 현대인이 가지는 공통의 과제 혹은 공통의 문제들이기때문이다.
비둘기와 고양이, 우방타워라고 하는 건물, 건물신축공사의 소음, 모두가 도시인이 흔히 경험하게 되는 존재이다. 단, 파리는 특수한 경우가 되겠는데, 비둘기나 고양이는 물론, 파리마저 애완동물로 키우는 도시인은 고독하다. 그러나 그 고독은 일부는 아빠트숲속의 도시생활이라는 객관적인 요인에 의해 야기되는것이지만 일부는 인간자신이 만들어놓은, 흔히 말하는 “귀찬니즘”때문에, 그것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귀차니즘때문에 조성된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애완동물을 키우다가 언젠가 싫어지면 곧바로 포기하는것이 현대 도시인의 속성이다. 작품에서는 비둘기와 고양이의 격투결과로 생겨난 비둘기의 시체를 식용함으로써 도시인의 모순된 심리, 아니 일회용적인 삶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는 삶을 일회용으로 인식하고(물론 인생이 일회용인것은 사실이지만) 일관된 삶의 목적이나 가치지향이 없이 그냥 그때그때 삶을 즐기고 고민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를 보여준셈이다. 그것을 우리는 어쩌면 실용주의적인 삶의 태도라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작품에서는 그러한 삶의 양상을 수기식으로 드러내고있다.
실용적인 혹은 일회용적인 삶의 태도는 파리를 통해, 비둘기나 고양이를 통해 고독을 달래다가 싫어지면 그대로 포기하는 행위들에서, 특히 비둘기고기를 먹는 행위에서도 보여지지만 301호 남자와 “나”의 관계의 “일회성”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파리는 방안에서 귀찮은 곤충임에 틀림없다. 음식물에 잘 앉아 병균을 퍼뜨리기때문에 모두들 파리를 보면 잡으려 한다. 그러나 작품의 주인공은 그렇게 더럽고 귀찮은 파리를 애완동물로 키운다. 밥알을 먹이면서까지. 그리고 파리에 관련된 자료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며 즐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가을이 되여 파리가 죽게 되자 곧 잊어버리고만다. 주인공의 표현을 빌면 “파리의 죽음이 근본적으로 나의 죽음과는 다르”며 “그래서 그 죽음에 련민을 느끼지 못”하기때문이다.
파리만이 아니다. 비둘기 역시 미물인만큼 “나의 죽음과는 다”를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양이에게 물려 죽은 비둘기의 시체는 식용으로 안성맞춤인것이다. 사실 비둘기를 집에 들여올 때부터 “나”는 애완동물로보다는 식용동물로 생각하고있었는지도 모른다. 광장의 분수못에서 만난 비둘기를 보며 “내가 살면서 구워먹은 비둘기가 너희 친척들만큼 될거다”고 생각하며 군침을 흘리는 심리에서 그 점은 확인된다. 그러나 집안에 들여놓은다음부터는 애완동물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맛있는 먹이감으로 먹어버리고만다.
“나”와 고양이의 관계 역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양이를 구입해서는 파블로프의 “고전적조건형성”과 스키너의 “조작적조건형성”으로 녀석을 교육시킨다. 교육의 목적은 “주인을 무조건 따를것”과 “주인에게 무조건 복종할것”이였다. 그 원인을 주인공은 “녀석에게나마 나는 우쭐거리고싶었다.”고 고백한다. 살면서 느끼는 고독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한 방편으로 고양이를 키운것이다. 파블로프의 리론에 따라 교육하다 잘 되지 않으니 먹이를 마구 먹이며 녀석이 집안에 키우던 비둘기를 죽여놓자 동맹자가 되여 비둘기고기를 나눠먹기도 한다.
심지어 “징어”라 이름을 붙인 고양이에게 와인을 먹여 거품을 토하게까지 한다. 어쩌면 일종의 학대일지도 모르지만 결국 주인공에게는 고양이 역시 자신을 위해 필요한 한 미물에 불과하다. 단, 징어라고 이름을 붙인 그 고양이가 발정하여 집을 나가자 “징어 가출, 알코올이 심히 필요함.”이라는 메모를 301호실 남자에게 남겨 함께 와인을 마시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는 행위는 이례적이라 할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역시 미물은 미물이다.
미물만이 아니다. 301호 남자 “윤” 역시 “나”에게는 일회용의 존재일뿐이다. 관계라야 가끔 만나 옥상에서 와인을 마시고 드라이브 몇번 하고 그런 관계였지만 남자와 녀자 단둘의 만남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을것이다. 그러나 “나”는 담담하게 대하고 심지어 그 남자 “윤”에게 애인이 생기고 헤여지고 또 생기고 했을 때도 별다른 표정을 나타내지 않는다. 단, 윤의 새차 조수석에 누군가 앉았던 흔적이 보였을 때 불쾌감을 느낄뿐이다. 그게 전부이다. 애인관계는 아니지만 역시 “남녀관계”인데 그렇게 덤덤하고 가볍다. 일회용이란 쓸만큼 쓰고나서는 그대로 미련없이 버리는것일진대 이들 두사람의 관계 역시 그런 관계라 할수밖에 없는것이다.
이처럼 김서연은 이 소설에서 파리마저 애완용으로 키울수밖에 없는 고독한 도시인(주인공 “나”는 원룸에서 사는 학생으로 되여있으나 고독한 현대인의 한 전형이라 보아도 무방하다)의 생활방식, “일회용” 삶의 양상들을 제시하고있다.
김서연의 소설이 대개 그러하듯 이 작품에도 치렬한 갈등은 없다. 속도감이 뚜렷한 묘사로써 갈등의 결여를 커버하고있다 하겠는데, 현대인, 특히 젊은이들의 삶의 실상을 보여주었다는 면에서는 성공적이며 어느 정도 문제성 혹은 전형성을 띤다 하겠는데 어딘가 긴장감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예전의 작품에서 느낄수 있었던 긴장감이이 소설에서 약화된 주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심리적갈등의 약화가 아닐까 한다. 앞에서 든 이전의 작품들은 비록 인물들간의 치렬한 갈등은 별로 보이지 않지만 보기에 담담해보이는 관계들속에 치렬한 심리적인 갈등들이 얽히면서 긴장감을 조성하고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심리적갈등마저 희석시키고 숨겨버리고있다. 이점은 이 작품의 약점이다. 치렬한 심리적갈등을 약화시켰으면 이를 커버할수 있는 새로운 갈등이 만들어져야 소설적인 긴장을 보장할수 있지 않을까? 소설이란 결국 대결에 의해 이루어지고 대결은 갈등에 의해 만들어지며 갈등이 있어야 플롯이 형성되는것이다.
아직 사적인 영역에서 탈출하지 못한 점 또한 이 작품의 한계이다. 소설에서 엮어진 사실들은 어느 정도 전형성을 띠지만 시각이 지나치게 사적인 영역에 한정됨으로써 사회성을 획득하는데는 실패하고있다. 그러나 새로운 비상을 위한 날개짓이라면 그만한 대가는 치루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좀더 공동체적인 삶에 눈길을 돌리면서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소설과는 달리 수필은 기본적으로 사적인 영역에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매력을 유발한다. 제목에서도 알수 있는것처럼 “찜질방”에서 보고 듣고 느낀것들을 스케치식으로 제시한 이 작품은 “찜질방”이라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통해 사회 구성원의 진실한 면모를 드러낸 동시에 거기에 드러난 현상을 통해 작가의 가치판단을 은근히 제시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되돌아볼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극도로 실용화된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문학을 꿈으로 가꾸며 살아가는 소설가 김서연. 그 꿈을 크게 이루기를 기원한다. 김서연들이 있음으로 하여 우리의 문학은 좀더 풍성해지고 우리의 삶 또한 좀더 의미가 있게 될것이기때문이다.
래원: 인민넷 | (편집: 임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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