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초심을 잊지 말아야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85년전 중앙홍군은 강서 우도 등지에서 출발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정을 시작했다. 20여일전에 습근평총서기는 특별히 우도를 찾아 중앙홍군장정출발지기념비 앞에서 사회주의현대화국가건설을 시작하는 새로운 로정에서 지난날을 이어받아 앞날을 개척하면서 재출발할 것을 전당에 호소했다.
새중국 창건 70돐을 맞아 전당적으로 ‘초심 잊지 않고 사명 명기’주제교양을 깊이 있계 전개하는 이때 인민일보는 오늘부터 ‘장려한 70년 분투의 새 시대•기자 다시 장정의 길 걸어’코너를 설치하여 혁명선배들의 발자취를 찾고 감동적인 장정이야기를 발굴하여 위대한 장정정신을 선양하게 된다. 혁명선렬들을 추모하고 홍색유전자를 전승하여 혁명력사로 하여금 현실을 조명하고 혁명정신으로 미래를 계발하려 한다.
련며칠 큰비가 내려 강서 우도 강물이 날따라 불어나면서 차량이 도강대교를 거쳐 대안에 이르는 데 5분 시간이 걸렸다.
85년전, 8만 6000여명이 우도강에 직면하여 분초를 다투면서 옹근 3일 동안이나 걸려서야 강을 건너 원정 길에 오를 수 있었다.
력사가 85년 세월을 뛰여넘었으며 세차게 흐르는 우도강의 한쪽은 력사와 이어지고 다른 한쪽은 현재와 이어졌다—1934년 10월 18일, 중공중앙, 중앙군사위원회는 중앙홍군주력을 인솔하여 남쪽으로 우도강을 건너 장정의 길에 올랐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전사들이나 백성들이나 막론하고 절대다수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나 모두 당을 따라 가려는 하나의 신념을 갖고 있었다.
당년의 우도강반은 추위가 엄습하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재빨리 부교를 놓기 위해 군중들은 문짝, 침대널판자 심지어 관널까지 모두 내놓았다. 고향사람들은 홍군을 따라가면서 계란, 경단 등을 전사들의 호주머니에 밀어넣었으며 오래동안 떠나려 하지 않았다. 당시 홍1군단 제1사 제1퇀 퇀장직을 맡았던 양득지가 후날에 “한기가 아주 심했다. 우리는 머리를 돌려 대안에서 등롱과 홰불을 들고 홍군을 전송하고 있는 군중들을 멀리 바라보면서 가슴이 저도 모르게 따뜻해지는 듯했다”고 회억했다.
력사자료의 기재에 따르면 중앙홍군은 장정도중에 도합 380여차 전투를 진행하여 영이상 간부 430여명이 희생되였는데 평균년령이 30살도 안되였다. 설산을 넘고 초지를 건넜으며 18개 큰 산을 넘고 24갈래 큰 강을 건넜다… 도대체 어떤 초심과 신앙이 이 대오로 하여금 백절불굴하면서 모든 애로와 난관을 이겨 나아가게 했는가?
우도현성에서 출발하여 계속 동쪽 방향으로 나아가노라면 1시간 남짓이 걸려서야 단옥향 한신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동양로인은 연한 붉은색의 렬사부를 꺼내여 한페지, 한페지 번지면서 그 때 나이가 제일 어린 애가 14살이였는데 1934년 이후에 더는 소식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신촌에서 당년에 100명이 장정에 참가했는데 나중에 돌아온 사람은 한명 뿐이였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아직도 많고도 많았다. 취재길은 너무나도 감동적이였으며 이따금 필을 멈추고 흐르는 눈물을 딲을 수 밖에 없었다. 출발전야에 우도인민들은 어머니가 아들을 홍군부대에 보내고 안해가 남편을 홍군부대에 보내여 한곳에서만 해도 병력 2만여명을 보충했으며 우도인민은 자신의 식량을 절약하여 1934년 5월부터 8월까지만 해도 홍군을 위해 식량 7만 9390석을 모았다… 단옥향 위상촌 동라만촌 촌민인 단구장은 바로 그 때에 홍군에 가입했다.
동라만은 홍1군단의 장정출발지이자 홍1군단 군부 소재지였는데 단구장이 송신기를 메고 초지를 건는 이야기는 동네방네에 소문나 모두들 잘 알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