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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의 길"에 묻힌 예술의 혼

-한락연과 그의 예술세계

리화(연길시직업고급중학교) 

2012년 12월 03일 09:04【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저명한 조선족화가 한락연(본명이 한광우)은 화가일뿐만아니라 혁명가이며 고고학자이다.

1898년 12월 8일, 길림성 연길현(지금의 룡정시)의 가난한 조선족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한락연은 1919년 룡정에서 "3.13"항일시위에 가담하였고 1929년부터 1937년 사이에는 프랑스에 류학하여 그림을 배우는 한편 국제공산주의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37년 귀국한후에는 전쟁보도와 그림, 촬영을 무기로 항일구국운동에 뛰여들어 싸우다가 국민당헌병에게 체포되였다.

1943년 당조직의 도움을 받아 가석방된 그는 서북지역에 추방당하여 사생과 고고학연구에 종사하였다. 그는 선후 두차례에 거쳐 돈황과 신강에서 고대 벽화를 연구, 모사하였는데 특히 신강의 커즈얼석굴의 벽화를 대량적으로 모사하였고 석굴에 진귀한 문자표기와 한씨작품의 일련번호를 남기였다.

그는 서북지역의 고고학연구를 거쳐 신강 고고학연구 5개년계획과 서북박물관을 설립할 웅대한 상상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1947년 7월 30일, 군용비행기를 타고 우루무치에서 란주로 가는 도중 그는 비행기추락사고로 불행히 사망하였다.

한락연은 비록 50년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중국 전역뿐만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넘나들면서 풍성한 문화예술 유산과 고고학성과 그리고 불굴의 혁명정신과 예술정신을 후세에 남겼다. 

★한락연의 회화창작

1923년, 한락연은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수료하고 그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4년에 당조직의 파견으로 동북지역에 가서 공산당지부 창립에 참가하였고 봉천미술전문학교를 창설하여 미술교육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할빈보육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청년시절의 한락연에게 있어서 예술과 혁명은 동시에 인생의 목표가 되였다.

1929년, 한락연은 프랑스로 고학을 떠났다. 빠리 루브르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는 본격적인 화업을 시작하였고 야외사생에 주력하는 일면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고전작품을 모델로 그림을 익혀나갔다. 그는 프랑스에서 류학하던 8년간, 유럽 각국으로 사생을 다니면서 유럽 고전문화의 특징을 터득하였고 유화와 수채화 화법에서 천재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한편 프랑스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전유럽화교항일련합회"에 참가하여 반파쇼 투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37년 한락연은 오랜 기간의 유럽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는 동북지역에 파견되여 "동북구국총회" 기관의 간행물인 "반공"을 집필하였고 표지제작을 담당하였다. 그는 "전민항전"이라는 대형 유화작품을 창작하여 무한의 황학루에 걸었고 연안을 방문하여 항일전쟁시기 민족문화예술에 대해 연설하기도 하여 화가로서뿐만아니라 리론가로서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전쟁보도와 그림, 촬영을 무기로 최전방에서 항일통일전선결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던중 1940년 보계에서 한락연은 국민당헌병부대에 체포되여 서안으로 압송되였고 험난한 3년간의 감옥생활끝에 당조직의 도움으로 1943년에 가석방되였다.

한락연은 가석방되여 출옥한후에도 행동의 자유가 없었다. 그는 "고통속에 있는 대중"을 그리는 등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묘사에 제한을 받았지만 당국의 압제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의 회화세계를 축소하지 않았다. 그가 당시 제자였던 황주에게 "미술을 하려면 인민들의 생활속에 깊이 들어가 그 진의를 씹어서 소화해야 하는데 마치 모래에서 금을 씻어내는것처럼 련마하여 제것으로 만들어야 전도가 있다"고 가르쳤던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의 회화미학과 그것을 통한 력사관을 한층 더 깊이 인식할수 있다.

한락연은 "예술이 투기의 길을 가는것을 반대하였고 자연주의의 재현을 의미없다"고 피력한 근거를 이러한 맥락에서도 찾아보게 된다. 오히려 그는 1943년 이후부터 하서주랑의 소수민족의 민속주제와 석굴벽화를 모사하는 작업에 전념하여 확고한 력사적의식을 나타내고있다. 그의 이런 관점은 1945년에 그린 유화 "라부렁사원에서의 가무", "광명을 찾아가는 유목민" 등 작품에서 잘 표현되고있다. 

"라부렁사원에서의 가무"에서 그는 푸른 하늘아래 가지각색의 꽃들이 만발한 라부렁사원앞의 언덕에서 장족인민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을 생동하게 묘사하고있다. 유작중에서 가장 큰 이 작품에는 평화적인 생활에 대한 한락연의 기대가 담겨있다고 볼수 있는데 이가 바로 그가 줄곧 분투해온 리상이기도 하였다. 

"'라부렁사원에서의 가무'를 한락연의 락관적인 정신의 정면표현이라고 한다면 '광명을 찾아가는 유목민'은 오히려 비극적감정이 뒤받침된 투쟁정신의 상징"이라 할수 있다.

"광명을 찾아가는 유목민"에서 작가는 짙은 구름사이로 해빛이 스며드는 초원에서 진한 자홍색 옷을 입은 장족부부와 그들의 딸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허리를 굽힌채 걸어가고있는 모습을 그리고있다. 화면속의 인물들이 오로지 태양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표현하고있는 그림은 광명은 바로 앞에 있지만 여전히 분투하며 전진해야 한다는 한락연의 투쟁정신과 광명에 대한 추구를 남김없이 보여주고있다.

★한락연의 벽화연구

화가인 동시에 고고학자인 한락연은 유럽 류학시절, 중국의 많은 문물들이 강탈되여 외국에서 전시되고있는것을 보면서 앞으로 더욱 많은 예술품들을 발굴하고 보호하리라 결심하고 부지런히 그림을 배웠다. 그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그의 작가로서의 "력사적의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것을 볼수 있다. 그는 당시 고통속에서 허덕이는 대중들의 생활과 소수민족들의 민속을 화필에 담았고 고대벽화를 모사했다. 특히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우를 오르내리면서 벽화작업을 계속했던 일은 그 점을 잘 말해준다.

한락연은 1944년에 란주에서, 1945년에는 서장에서 민속풍물을 화폭에 담았고 늘 인물을 중심으로 하였다. 또 그의 벽화모사 작업이 본격화된것도 1945년 가을부터였다.

1945년 10월, 돈황에 간 한락연은 막고굴을 찾아 많은 벽화를 모사하였다. 또한 그곳에서 헤여진지 10여년만인 상서홍을 다시 만나 서로 그림을 담론하며 시간가는줄 몰랐다. 상서홍은 당시 한락연이 사생한 그림을 보면서 매폭마다 "빛과 색이 명쾌하여 화면이 자연스럽고 수채화기법의 세련미를 갖추고있다"고 극찬하였다.

1946년 봄, 한락연은 신강의 고대고창유적을 거쳐 커즈얼천불동에 이르러 벽화를 조사하고 모사작업을 서둘렀다. 그는 커즈얼석굴의 벽화를 연구한 최초의 사람으로서 석굴에 진귀한 문자표기와 75동의 번호, 그리고 수십점의 모사작품을 남겼다. 커즈얼탐사에 이어 한락연은 돈황에 체류하면서 많은 벽화를 모사하였고 그 이듬해 다시 커즈얼석굴을 탐사하여 30여점의 커즈얼벽화 유화 모사도를 제작함으로써 중국 벽화연구사상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그의 유고를 통해 커즈얼 천불동벽화가 돈황 막고굴벽화에 비해 석굴수는 못 미치지만 회화적가치가 높고 년대도 더 일찍하다는것을 알수 있다.

한락연은 "커즈얼천불동벽화 특점과 발굴된 경과"라는 문장에서 커즈얼석굴의 벽화에 대해 "화가들이 빛의 표현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인체표현이 정확할뿐만아니라 아름답게 완성했으며 인체해부도를 나타낸 등의 특징을 보면 그들은 보통 화가가 아닌 사상적으로 훈련된 신도임이 틀림없다"고 해석하면서 고대 화가들의 "자부심과 락관적인 태도"와 "예술정신"을 높이 찬양하였다.

1947년 7월, 4개월의 고찰과 회화를 마치고 우루무치로 돌아온 한락연은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에서는 벽화모사도가 주류를 이루었고 그중 그가 새로 발견한 특1호를 포함한 벽화그림모사가 주목을 받았다.

한락연의 벽화작품중에서 돈황막고굴보다 커즈얼천불동에서 모사한 작품이 대부분이였고 주로 유화와 수채화로 그려졌다. 우리는 그를 유화, 수채화와 같은 서양화예술의 표현수단으로 중국 벽화를 모사한 첫 화가라고 할수 있다. 그는 작품에서 전통문화와 예술창작의 결합, 회화와 고고학의 융합을 시도함으로써 고대문명을 보호하는데 개척성적인 역할을 하였을뿐만아니라 오늘날 커즈얼벽화연구에 귀중한 연구자료와 력사자료를 제공해주고있다.

한락연은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걸출한 화가이고 항일운동에 앞장선 혁명가이며 중국 예술사에 진귀한 유산을 남긴 고고학자이다. 그는 중국에서 커즈얼석굴을 발견하고 연구한 최초의 고고학자이며 유화, 수채화 형식으로 중국고대벽화를 모사한 최초의 화가이다. 또한 중국미술계 첫 조선족공산당원으로서의 그의 험난한 경력, 충실한 예술신념, 근면한 예술정신은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가져다줄것이다.

래원: 길림신문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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