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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어느 소수민족도 빠져서는 안된다”

—습근평 총서기 녕하 빈곤퇴치 난관돌파 및 초요사회 매진 사업 고찰 기록

2020년 06월 12일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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녕하 북부는 일명 ‘천구(川区)’라고 불리는데 황하의 지리적 우세 덕에 지세가 평탄하고 수로가 종횡으로 뻗어있으며 호수가 많아 강남수향 못지 않은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중부지대는 황량한 사막인데 기후가 건조하고 비가 적고 바람이 세차며 모래가 많고 토지가 척박하다. 남부는 구릉과 골짜기인데 주로 숲이 많고 기후가 음습하고 한랭하여 ‘가장 척박한 땅’이라고 이름난 국가급 빈곤지역의 하나이다.

빈곤에서 탈출하는 것은 녕하, 특히 녕하 남부 서해고 지역에서 수천 수백년간 해결책을 찾지 못한 난제이다.

20여년간 습근평 총서기는 녕하를 4차례 방문했다. 1997년 복건성에서 근무하던 기간 그는 민녕협력 맞춤형 지원사업에 앞장서서 처음으로 녕하를 방문했는데 서해고에서의 견문이 특히나 감명깊었다고 한다.

“정녕 서발 막대 거칠 것 없는 광경이였습니다. 집안에는 식탁이나 의자는 물론이고 침구조차 없었습니다. 집안의 유일한 ‘재산’은 대들보에 걸려있는 발채 한줌이였는데 그 발채를 팔아 기름, 소금, 간장, 초 등을 장만했습니다.”

그후 2008년과 2016년에도 그는 빈곤구제사업을 위해 녕하를 두차례 방문했다.

올해는 빈곤퇴치난관돌파전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관건적인 한해이다. 그는 빈곤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가난한 군중들을 늘 념두에 두었고 빈곤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생활이 아직 넉넉치 못한 촌민들을 항상 걱정했다.

6월 8일부터 10일까지 습근평 총서기는 녕하를 방문하여 고찰 및 조사연구를 했다. 3일간 무더운 날씨에도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오충, 은천 두 지역의 농촌에 들어가 황하를 시찰하고 지역사회를 방문하며 논밭과 연안지구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 20여년간 녕하의 도시와 농촌은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고 대중들의 생활은 나날이 향상되였다.

다만 변함없는 것은 중국공산주의자들의 일관되고 굳건한 초심과 사명이였다.

황하 신촌의 변화를 보며

1997년, 빈곤구제사업을 위해 녕하를 방문한 습근평은 한차례 중대프로젝트인 ‘빈곤 마을 전체적 이주’ 사업을 추진했으며 척박한 땅으로 삶의 터전의 마련이 어려운 서해고 주민 전체를 하란산 기슭의 황하 관개구에 이주시켰다. 그는 새로운 이주마을에 ‘민녕촌(闽宁村)’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지금은 비록 백사장이지만 장래에는 반드시 금사탄이 될 것”이라고 덕담을 해주었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은 화살처럼 빨리 지나갔다. 20여년 동안 녕하의 약 100만명의 대중이 남부의 산간지대를 벗어났으며 민녕촌만 해도 잇달아 4만여명의 이민을 받아들였다. 지난날의 ‘하늘에는 새들이 날지 않고 땅에는 풀이 나지 않으며 바람이 불면 모래가 흩날리’던 사막이 환골탈태했고 민녕촌도 민녕진으로 승격했다. 이번 고찰에서 습근평 총서기는 민녕진의 근황에 대해 특별히 알아보았다.

이번 고찰에서 습근평 총서기는 다른 한 생태이민촌에 대해 조사연구했는데 그 곳은 바로 황하연안의 새 마을인 홍덕촌이다.

홍덕촌은 오충시 홍사보구 홍사보진에 자리잡고 있으며 녕하의 중부에 위치해있다. 원래 이 곳도 온통 황량한 사막이였으며 바람이 불면 ‘밥 한공기에 절반이 모래’일 지경이였다. 20세기 90년대부터 여러 등급의 양수장에 의거해 황하수를 도입함으로써 오아시스를 자양했다.

회족 대중인 류극서 일가는 원래 서해고의 ‘깊은 산속’에서 생활했는데 8년전에 이 곳으로 이전해 정착했다.

습근평 총서기는 그의 집을 방문했다. 류극서는 총서기를 모시고 문어귀에 있는 외양간, 깔끔한 마당, 널찍하고 밝은 침실, 그리고 깨끗한 주방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주방에서 총서기는 솥뚜껑을 들어올리고 랭장고를 열어보며 수도꼭지를 틀어보면서 아주 꼼꼼히 살폈다.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장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