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전국부녀련합회는 중국공산당 령도하에 있는 중국 각 민족 각계 부녀들로 련합된, 부녀해방을 주요목적으로 하는 군중조직이다. 부녀련합회는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영향력이 가장 큰 부녀조직으로서 설립된 이래 부녀리익을 보호하고 남녀평등을 실현하는 면에서 중요한 작용을 발휘해왔다고 할 수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련합회는 1952년 9월 15일에 설립되였으며 1950년 11월에 설립된 길림성민주부녀련합회 연변지방사업위원회가 부녀련합회의 전 조직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연변지역 각급 부녀련합회는 길림성부녀련합회에서 하달한 중앙정부의 사업정신과 지시에 따라 연변주 범위에서 각 방면의 부녀사업을 전반적으로 진행하였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련합회 부녀사업은 주로 로동생산 참여, 문명퇴치, 부녀간부 양성, 사회활동 참여, 부녀권리 보장 및 탁아복리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우선, 녀성들을 로동생산에 적극 참여하도록 동원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기 이전 연변지역 조선족녀성들은 가부장적 문화의 영향하에 시집 가서 남편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다고 인식했고 남존녀비사상이 뿌리깊이 박혔으며 렬등감 속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다. 이러한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연변주 각급 부녀련합회는 "로동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일이다"라는 사상을 끊임없이 선전함으로써 녀성들로 하여금 인식을 바꾸고 적극적으로 생산로동에 참여하도록 동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녀성들에게 농업합작화는 농민들이 빈곤에서 벗어나 공동으로 부를 창조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고저 했다.
다음으로, 문명퇴치를 중시하였다. 녀성들이 글자를 모르는 것은 녀성들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연변 각급 부녀련합회는 많은 녀성들을 야학, 식자반 등 다양한 형식의 학습반에 참가하도록 동원하여 문화, 기술을 배우고 녀성들이 취업하고 사회로 진출하는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연변지역에서 문맹퇴치사업은 식자방면, 기술습득방면 두 방면으로 나뉘여 진행되였다. 연변지역 각급 부녀련합회가 진행한 문맹퇴치사업은 연변 각 민족 녀성들에게 있어 아주 큰 의미를 가진다. 초급단계의 문맹퇴치사업은 식자에 중점을 두고 많은 녀성들로 하여금 문화수준을 향상시켜 각종 정보를 독립적으로 수집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했으며 일정한 문화지식을 습득함으로써 녀성들로 하여금 문자 관련 분야 례하면 타자원, 교사 등 일터에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나아가 기술전수단계에서 녀성들이 문자를 습득한 기초 우에서 하나 이상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어 기술을 활용하여 더욱 효률적으로 생산을 진행하는데 편의를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교사, 의사, 아나운서 등 녀성들의 우세를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 취직하여 경제적 자유를 실현하도록 함과 동시에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 유리한 물질적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그 다음으로, 녀성간부를 적극 양성하였다. 부녀련합회가 녀성간부를 양성하는 업무는 크게 두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단기 교육을 위주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급 교육을 위주로 하급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방식이다. 녀성간부 양성은 부녀련합회사업의 중요한 일환이다. 특히 녀성사업에 대한 녀성들의 인식전환이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부녀련합회는 녀성간부들의 사업은 당의 중임을 떠메는 일과 같으며 녀성해방에 있어 녀성간부는 중요한 담당자 혹은 개척자로서 위치에 있음을 항상 피력하였다.
넷째,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인도하였다. 연변 각급 부녀련합회의 동원, 조직하에 많은 연변녀성들이 각종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시기별로 보면, 1950년대에 연변녀성들은 항미원조에 참가했고 또 부녀련합회선거대회에 참여했으며 20세기 70년대에는 '3.8'붉은기수 경기에 참여했고 80년대에는 '5강4미'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연변녀성들의 항미원조 참여를 살펴보면, 연변녀성들은 주로 재봉대, 세탁대 등 후방에서 전선을 위해 봉사했다. 례하면 연길시 녀성들이 후방에서 전선을 위해 봉사한 건수가 3만여건이고 화룡현에서 전선에 참군한 녀성이 193명에 달했으며 14,036명 되는 녀성들이 6,483만원을 기부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애국주의선전교육을 받은 녀성들은 무려 105,442명으로서 전체 녀성의 약 80%를 차지하며 녀성선전위원은 1,899명에 달했다.
다섯째, 녀성권리를 보장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부녀련합회에서는 녀성들의 출산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녀성질병 발병률을 감소시키기 위한 일련의 조치 및 활동을 조직했다. 또한 혼인법을 관철하고 실시하는 데 중시를 돌렸다. 연변주 부녀련합회에서는 각종 업무에서 새로운 혼인법을 관철시키고 녀성들이 가정에서 학대와 박해를 받는 현상을 점차적으로 줄이며 남녀평등의 새로운 혼인관계를 수립하여 조화로운 가정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을 더욱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20세기 70년대에 이르러서 정부에서는 공산주의세계관을 수립하여 혼인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하고 평등, 자주, 서로 사랑하는 새로운 혼인관계를 수립하며 조혼을 반대하는 사상을 선전하였다. 20세기 80년대초에 연변주부녀련합회가 연길시와 화룡현의 혼인상황을 조사한 결과 합법적인 혼인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무작위로 조사한 기혼녀성 5,614명중 조혼이 0.04%를 차지하고 동거녀성비률이 0.01%를 차지했다. 그리고 부녀련합회에서는 녀성권익보호에 중시를 돌렸다. 1982년 "녀성 및 어린이의 합법적권익을 보호하고 어린이, 소년의 건강한 성장을 촉진하며 사회주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 을 건설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자"는 지시하에 연변주 각급 부녀련합회는 녀성과 어린이의 합법적 권익을 침해하는 행위들을 처분하는 것을 중요한 권익보호의 수단으로 삼았다. 1983년 도문시, 화룡현, 돈화현, 왕청현 통계에 따르면 당시 인민들이 고소한 사건이 512건, 그중 해결된 사건이 314건이고 신고를 197건 접수하였고 157건을 해결해주었다. 1985년에는 신고수가 증가되여 무려 519건을 접수하였는데 그중 91%를 해결해주었다.
마지막으로 탁아복리사업을 추진하였다. 탁아소사업이 발전함에 따라 유아들의 건강, 녀성들의 로동참여, 보육교육 수준 등이 동시에 향상되였다. 아이를 탁아소에 보낸 후 안심하고 생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였고 또 소득이 늘어남에 따라 가정이 화목해졌으며 단체로동회수가 많아지면서 서로 국가대사를 토론할 시간이 많아졌으며 아이와 녀성의 건강을 지키고 어머니들의 교양수준을 제고시킬 수 있고 또 아이를 탁아소에 보냄으로써 단체생활에 빨리 적응하도록 하는 등 유리한 점들이 있었다.
연변주부녀련합회의 일련의 녀성사업을 통해 얻은 녀성발전은 크게 개혁개방 이전과 개혁개방 이후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개혁개방 이전의 녀성발전은 녀성해방, 남녀평등 추구로 개괄해볼 수 있다. 녀성의 경제적 독립 및 가정에서의 경제적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선행조건을 제공해주었으며 녀성들이 학습반에 참가하여 문맹에서 벗어나고 가정과 사회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실현하는 데 유익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또한 부녀들이 독립적인 인격을 형성하는 데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새로운 혼인법이 반포된 후, 연변지역 각급 부녀련합회에서는 유관 부서를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민주적이고 화목하며 남녀평등하고 시부모를 공경하고 며느리를 사랑하는 신형의 가정과 모범부부를 표창하였으며 혼인법을 위반하는 사례들을 처리함으로써 간부와 군중들에게 혼인법을 선전하였다.
다음으로, 개혁개방 이후의 녀성발전은 녀성들의 경제사회적 지위 확보, 녀성 전면 발전의 적극적 추진 등으로 귀납할 수 있다. 우선, 연변주부녀련합회의 일련의 녀성사업을 통해 녀성들의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였다. 1978년 11기 3중 전회 이후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네가지 원칙을 지키며 개혁개방로선을 견지할 것을 제기했다. 부녀련합회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 농촌녀성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여 과학농업활동과 가정부업을 경영하도록 했으며 특히 녀성들로 하여금 문화, 과학, 기술을 습득하여 생산과정에서 벼재배관리원, 황연기술원 및 기타 각종 기술로 생산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골간역할을 하도록 했으며 따라서 "남자는 장군, 녀자는 병사"라는 기존 관념과 현상을 개변시켰다. 뿐만 아니라, 녀성들의 복리를 강화하여 가사로동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저 했다. 특히 생활에서의 서비스업을 발전시킴으로서 가사로동의 사회화, 현대화를 실현하는 데 일조하였다.
종합하면, 연변주부녀련합회는 국가의 호소에 따라 녀성들을 생산로동에 동원하였으며 문맹퇴치, 간부배양, 권익보장, 탁아복리 등을 녀성사업의 중점으로 삼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부녀들은 로동을 통해 일정한 정도에서 경제적 독립을 실현했으며 따라서 가정 및 사회에서의 지위가 제고되였으며 농업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집체생산로동을 통해 가부장제 규범과 인식에 변화를 가져오도록 했으며 생산과정에서 새로운 사회관계를 건립함으로써 사회진출의 발걸음을 내디디도록 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녀성해방’은 국가의 중시와 정책적 지원과 행위와 분리시켜 론할 수 없다. 때문에 국가의 다양한 제도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국가 제도, 정책에 따른 녀성들의 주체적 행위들을 동시에 파악함으로써 한 시대의 ‘녀성해방’의 실천과 의미를 깊이 있게 사고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