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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서서 멀리보다:구추백 “문건처리방법” 기초(휘황한 려정)
- 중앙서류관 소장 진귀 력사서류 배후의 당사이야기(5)
2016년 06월 21일 13:04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중앙서류관에는 중국공산당 조기 주요지도자의 한사람인 구추백이 1931년에 쓴 한부의 친필원고 “문건처리방법(文件处置办法)”이 있다. 이 서류를 작성한지 4년이 지난뒤 36세 밖에 되지 않은 구추백은 정의를 위해 선뜻 목숨을 바쳤다. 중국공산당의 가장 일찍한 서류문건관리에 관한 이 규정은 당의 력사문헌 관리보존에 크나큰 주요역할을 발휘했는바 한 공산당원의 통찰력과 탁견을 보여주었다.

이 “문건처리방법”은 총 7개 조목으로 서류분류정리, 목차, 보관, 페기의 원칙과 방법, 자료의 수집, 보관 등 내용을 규정했다.

기초문건의 말미에 구추백은 특별히 이렇게 써넣었다. “ 총주(总注): 만약 가능하다면 물론 가장 리상적인것은 매 한부를 두부씩 만들어 한부는 보존검열(예비조회, 즉시 귀환)하고 한부는 입고시켜 장래(우리 천하)에 당사위원회에 교부시키는것이다.” 구추백은 “장래” 두글자 옆에 방점을 찍어 강조했는데 그가 문건을 기초할 때 혁명전도에 대해 필승의 신심으로 충만되였음을 표명했다.

1988년1월 29일, 구추백은 강소 상주에서 태여났고 1917년 가을 북경 로씨아어 전문연수관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5.4운동이 폭발한 뒤 그는 거대한 열정으로 북경애국학생운동에 뛰여들었다. 1920년 가을, 구추백은 기자신분으로 쏘베트로씨야에 가서 현지취재를 하여 2년간의 시간내에 수십편의 통신과 저작을 써냈고 자신이 보고들은것들로 로씨야 10월혁명이후의 쏘베트로씨야의 진실한 정황을 객관적으로 소개했다. 1921년 5월, 그는 모스크바에서 장태뢰의 소개로 련합공산당(볼세위크)당조직에 가입했고 1922년2월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이적했다.

1923년 1월 귀국후 구추백은 중공중앙 기관잡지 《신청년》, 《선봉》의 주필과 《향도》의 편집을 담당했으며 대량의 정론문장을 발표하여 당의 사상리론건설에 개척적인 공헌을 했다. 1923년 6월 15일, 《신청년》계간 창간호는 처음으로 그가 번역배사한 중문판 “국제가”를 발표했는데 프랑스문 “국제”는 “인더나쑈날(英德纳雄纳尔)”로 음역했는데 지금까지 사용되고있다. 같은해 7월, 그와 등중하 등은 상해대학을 기획설립하고 교무장 겸 사회학부 주임을 담임했다. 이 국공합작대학은 중국혁명을 위해 많은 인재들을 양성해냈다.

서생으로부터 령수에 이르기까지 구추백은 짧지만 휘황한 일생을 걸었다.

1927년 “87회의”이후 구추백은 중공중앙 림시정치국 위원, 상무위원을 담임하고 당중앙의 사업을 주관했다. 1928년 6월 18일부터 7월 11일까지 중국공산당은 모스크바에서 제 6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했는데 구추백과 주은래 등이 대회를 사회했으며 또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6차대회가 결속된 뒤 구추백은 공산국제주재 중공대표단 단장을 담당했다. 1930년 8월 상해에 돌아온 뒤 또다시 당중앙의 사업을 주관했다. 1931년 1월, 왕명의 착오적타격을 받아 중앙지도임무를 해임당한 이후 백색테로로 뒤덮인 상해에서 문예위원회와 좌익작가련맹을 지도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레닌저작을 번역하고 로신과 깊은 우의를 맺었다.

로신은 구추백에게 아래와 같은 대련을 써준적도 있다. “일생에 지기 한명만 얻어도 족하며 나는 그대를 이 세상에서 마음과 뜻이 같은 친구로 삼느니라.”

상해지하투쟁이 날따라 잔혹해지면서 1930년 4월 “비밀공작을 하는 중앙 각 부위원회 동지들에게 보내는 중공중앙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환경이 렬악하기에 여러 기관은 문건보관을 하지 않으며 무릇 “불필요한 문건은 반드시 문건보관처에 보내여 보존하해야 한다.” 1930년 9월, 중공 6기 3중전회후 문건보관처는 이미 20여 상자의 문건, 자료를 집중시켰는바 중국공산당의 제일 첫 비밀서류고가 이때로부터 탄생되였다(당내에서는 습관적으로 “중앙문고”라고 칭함).

1931년초, 주은래는 중앙비서처에 가서 시찰하고 문건을 찾아보았다. 시찰중 이곳에 소장된 문건, 자료들은 한보따리, 한묶음으로 정리가 되지 않은것을 발견했다. 그는 즉각 “문건은 응당 자세히 분류하고 분류정리해야 한다”고 지시했으며 동시에 배동한 중앙비서처 책임자를 보고 “문건정리방면에서 당신들은 아추(구추백)을 찾아 토론하고 그더러 문건처리방법을 만들게 하라”고 지시했다.

구추백은 흔쾌히 동의했고 재빨리 비교적 계통적인 “문건처리방법”을 기초했다. 기초과정에서 구추백은 다음과 같이 제출했다. 모든 문건에 대해 “반드시 년월일을 표기하고 상세할수록 좋다.” 중앙 및 각급과 각 단체의 기관보들은 전부 보관이 필요한것들을 응당 “많아서 두사람만 알고 있는 곳, 그리고 물론 돈이 많이 들지 않는곳에 타당하게 보관해야 하며 동시에 력대의 기관보에 실린 론문들은 분류목록을 편찬(동시에 매편에 작성 날자를 표기)해야 한다.”

기초문건을 본 뒤 주은래는 “시험실시하여 편리 가능한지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이 “문건처리방법”은 중공의 첫 서류문건관리제도로 되였고 중앙문고에서 처음으로 집행했다. “방법”의 실시는 대량의 진귀한 당사서류자료들로 하여금 보존되게 했는바 중요한 력사적의의를 갖고있다.

1934년 2월, 구추백은 중앙혁명근거지 서금에 도착했다. 중앙홍군이 장정을 시작한뒤 그는 남방에 남아 유격전쟁을 견지했다. 1935년 2월, 복건 장정현에서 국민당에 의해 체포되였다. 적들은 그의 신분을 안 뒤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투항을 권고했지만 모두 그에게 위엄있는 거절을 당했다. 6월 18일, 그는 태연하게 형장에 나갔고 연도에서 “국제가”와 “홍군가”를 불렀으며 “중국공산당만세”, “공산주의만세” 등 구호를 높이 불렀다. 형장에 도착한 뒤 풀밭에 무릎을 틀고 앉아 총알을 맞고 피 뿌리며 정의를 위해 선뜻 목숨을 바쳤다.

1950년 12월 31일, 모택동은 《구추백문집》에 제사를 써서 그를 높이 찬양하며 말했다. “혁명이 어려운 시절에 영웅의 립장을 견지했고 하수인의 칼을 향해 걸어갈지언정 굴복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인민을 위해 일하는 이런 정신과 어려움앞에서 굴하지 않는 의지와 그의 문자로 보준되여온 사상은 영원히 살아있고 죽지 않을것이다.”

  래원: 인민넷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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