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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층동향

하남 간부와 군중 위대한 항일전쟁정신 선양—

붉은 혁명의 땅, 새 시대에 새로운 활력 발산해(력사를 명기하고 선렬들을 기리다)

본사기자 장문호 장예개

2025년 07월 15일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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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성 복양시 남락현 천구진 장장집촌에 들어서면 촌위원회 앞 광장에 세워진 륙각형 비각이 유난히 눈에 띄는데 이는 ‘무장항일련방구(武装抗日联防区)’를 구성한 6개 마을을 상징한다.

항일전쟁시기, 일본군의 잦은 ‘소탕’에 맞서 이 6개 마을은 시종 적에게 ‘곡식 한톨, 돈 한푼, 인부 한명’도 내주지 않아 남락현의 ‘홍색 보루’가 되였다.

예북평원, 10만자의 원고 항일전쟁력사를 기록해

예북평원 중심부에 자리한 남락현은 공격하기 쉬우나 방어하기 어려운 곳인데 무장항일련방구는 어떻게 이를 지켜냈을가?

“인민대중은 당의 굳건한 령도 아래 고도로 단결했다.” 천구진 두가촌 역시 무장항일련방구를 구성한 6개 마을 중 하나였는데 올해 79세인 마을 주민 두회은의 집은 과거 무장공작대 대원들의 비밀련락처였다. 그의 어머니는 늘 그에게 무장항일련방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1941년, 팔로군 기중군구 남진지대의 한청주 패장의 제안으로 당의 령도 아래 주변 6개 마을 350여명으로 무장항일련방구를 결성해 상호 지원하며 유연한 유격전을 펼쳐 여러차례 일본군과 괴뢰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무장항일련방구에는 네가지 ‘보물’이 있었다. 첫째는 각 마을의 방호벽과 엄페호, 그리고 마을을 지키는 방호해자(垓子)였고 둘째는 갱도전경험을 참조해 마을 전체를 지하와 지상이 통하게 개조한 것이였으며 셋째는 다양한 전투방안을 세분화해 마련한 것이였고 넷째는 녀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마을사람들이 동원되여 항일활동에 참여한 것이였다.

“오늘날 장장집촌의 무장항일련방구당사관에서 자발적으로 해설을 맡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수십년에 걸쳐 무장항일련방구 영웅명단을 정리해온 이들도 있다… 우리는 이 력사를 기억하고 후대들을 교육하고 격려해야 한다.” 1967년부터 두회은은 수차례 무장항일련방구의 생존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인터뷰를 가지고 10만자에 달하는 원고를 써냈다—

두세은은 적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고 두세미 일가가 보살핀 부상병은 항일전쟁승리후 결혼해 아이를 낳고 두세미에게 편지를 보내와 아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두회은은 현재 일부 원고가 이미 정리되여 책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천구진을 거니노라면 무장항일련방구의 높은 벽, 깊은 해자, 지하갱도는 이제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곡식이 우썩우썩 자라는 고표준농지, 과일 향기 가득한 현대화 과수원, 송이송이 버섯갓이 펼쳐진 비닐하우스들이 줄지어 선 풍경이다…

홍색문화는 농촌관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무장항일련방구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해 천구진은 문제 련합해결, 경찰-주민 련동, 갈등 련합조정, 정보련통, 치안 련합방어라는 ‘5련(五联)’사업모식을 구축했다.

두회은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장집촌의 리모와 리가촌의 왕모는 한때 택지문제로 갈등을 빚으며 크게 다투었다.

두 마을의 당지부 서기는 진사법소, 마을 조정위원, ‘오로(五老)’인원들과 함께 조정팀을 꾸려가지고 줄자와 택지증명서를 들고 현장실측에 나섰다. 로당원들도 중재에 나섰다. “륙치항의 이야기를 들어봤지요? 서로 양보하면 길이 더 넓어집니다.” 사법소 일군은 법률지식을 조목조목 설명했고 결국 두 사람은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집은 화해했고 택지 경계도 새롭게 획정되였다.

천구진당위원회 서기 오정걸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천구진은 ‘석양홍(夕阳红) 로병의무순라대 15개, 총 300여명을 조직했으며 200여명의 거리골목 책임자가 법률선전 의무순라를 전개하고 있다. ‘5련’사업모식을 운용해 수많은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했다.

황하기슭에서 전통을 계승하고 분발정진하며 발전의 새로운 길을 잘 걸어나가

1943년 11월 16일 밤, 북풍이 황사를 몰고왔다. 붉은등을 신호로 전투가 시작되자 전사들은 외곽 해자와 담장을 넘은 후 마을 대문을 열어제끼고 일제히 돌입했다. 적이 눈치챘을 때는 이미 포위되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전투는 단 12시간 만에 종료되였고 수천명에 이르는 괴뢰군이 섬멸되거나 포로로 되였다.

—이 팔공교전투의 전선지휘부는 복양시 복양현 팔공교진 사가채촌에 설치되였으며 장소는 마을주민 사내민, 사왈선 부자의 집이였다. 현재 이곳은 팔공교전투기념관으로 바뀌였는데 청색 벽돌, 회색 기와로 된 뜰 안의 오래된 대추나무에 붉은등이 높이 걸려있어 80여년전의 그번 기습전을 조용히 전해주고 있다.

갱도, 비밀문, 기념관 안에는 온갖 장치들이 숨겨져있다. “당시 아버지는 공산당원이였고 지하정보활동에 종사하셨습니다. 림종 직전에 그이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후날 집안형편이 나아지면 꼭 혁명사적을 기록하고 전승하거라…’” 전쟁이 끝난 후, 사왈선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옛 사진과 이야기들을 수집했고 결국 자택의 옛집을 개조해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팔공교전투의 후방사령부는 범현 안촌포향 안촌포촌에 설치되였다. 당시 이곳은 기로예(冀魯豫)변구의 당정군수뇌부와 후방기관의 소재지로 황승강 등 많은 마을주민의 집에 팔로군이 머물러있었다.

“팔로군은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면 먼저 거리를 말끔히 청소하고 물을 긷고 마을사람들의 병을 봐주었으며 밀을 수확하고 집을 짓는 일을 도왔습니다…” 당시 황승강은 10세 남짓했는데 팔로군이 안촌포촌에서 출발해 팔공교전투, 남락전투, 양곡전투 등을 련이어 벌이는 모습을 목격했다. 여덟번의 전투에서 여덟번 모두 승리하며 기로예변구 각 분구는 점차 하나로 이어졌다.

“양곡현을 공격할 땐 사상자가 많았습니다.” 황승강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많은 마을사람들이 자식 같은 소년병사 한명이 돌아오지 못하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오늘날, 안촌포촌의 당시 사령부와 기관은 국가급 중점문물보호단위인 ‘기로예변구혁명근거지옛터(범현)’로 지정되여 관광객들이 참관하도록 하고 있다. 문 앞에는 새로 조성된 문화광장이 있고 마을가의 ‘소서호’에서는 새소리와 매미울음소리가 들려온다…

2018년, 황승강의 손자 황체기는 대학을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안촌포촌당지부 서기로 당선되였다. 그는 마을주민들을 이끌고 범현 안황재배축산농민전업합작사를 설립해 옥수수, 밀을 570무 재배하고 육우를 400여마리 사육해 년간 생산액 300만원 이상을 달성했다. 자원재생유한회사를 설립해 매년 약 10만톤의 건축페기물을 처리하여 수십만원의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최근 몇년간 마을은 비물과 오수 분리, 전선 지중화, 아스팔트길 포장 등을 추진해 마을환경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태항산 남쪽기슭에서 문화와 관광의 결합으로 홍색문화를 널리 알려

2023년 가을, 하남성 신향시 휘현시 평전촌에서 주민들은 진갱장군이 머물던 항일전쟁지휘부옛터 도색을 하던 중, 벽 속 비밀공간에서 권총 한자루를 우연히 발견했다.  

“총은 줄곧 장전된 상태였습니다. 총의 주인이 언제든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되여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해설원은 진렬장 속의 모제르총을 소개하며 관람객들의 상념을 다시 그 전쟁의 불길이 치솟던 시대로 돌아가게 했다.

1938년 여름, 진갱은 팔로군 129사 386려를 이끌고 평전촌으로 이동해 주둔했다. 9월 21일, 200여명의 군민이 “군민협력, 항전구국”의 구호를 웨치며 8킬로메터 길이의 철도를 파괴해 적군의 이동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철도 량옆으로 탄환이 비발치고 철망치로 레루를 내려치는 소리, 레루를 어깨에 멘 군중들의 분주한 웨침과 적탄의 폭음이 서로 경쟁하듯 울려퍼졌다.” 9월 22일자 진갱의 일기에서는 당시 파괴작전을 이렇게 묘사했다. 

지휘부옛터 옆에는 팔로군후방병원옛터가 자리하고 있다. 진갱이 부대를 이끌고 평전촌에 주둔하던 시기, 군민이 힘을 합쳐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파르고 은밀한 비밀오솔길을 따라 평원의 적점령구에서 부상병을 산 우로 업어 나르고 이곳에서 치료했다. “제가 학생일 때 그 흙길을 걸어다녔는데 경사가 60~70도 되였습니다. 산을 내려오는 데만 6시간이 걸렸죠.” 평전촌당지부 서기 연전근이 말했다.

오늘날 태항은 도로가 얼기설기 뻗어있고 사통팔달했다. 두 유적지 앞에는 자동차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호텔, 슈퍼마켓, 농가락, 농산물 및 특산품 로점이 길을 따라 줄지어 늘어서있다. 올해 1분기 휘현시는 관광객 379.98만명을 맞이하여 관광수입이 16억 9300만원에 달했으며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6.02%, 14.86% 증가했다. 

쾅! 폭발음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일었고 1:1로 복원된 전투기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무대 우에서는 리향양이 뛰여난 몸놀림과 신기에 가까운 사격솜씨를 선보인다. 남태행관광휴양구에서는 대형항일전쟁실경극 《태항산전기》가 올해 7월부터 상시화 공연되고 있다.

리향양의 이야기는 곽흥에게서 비롯되였다. 1940년, 한 팔로군부대가 휘현을 지나가던 중, 갓 16세가 된 곽흥은 키가 작다는 리유로 입대를 거절당했다.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부대를 따라 계속 달렸고 끝내 지도원의 손에 이끌려 현정부 공안대에 배속되였다. 이후 그는 무장공작대를 이끌고 벙커를 폭파하고 철도를 파괴했으며 일본군을 섬멸하고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는 등 전공을 세웠다. 그는 결국 적들이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는 ‘쌍총대장’이 되였다.

“태항산 곳곳에는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신향 남태항관광유한회사 부총경리 왕건신이 말했다. 올해 이 관광지는 다양한 시리즈행사를 추가로 선보일 예정인데 홍색문화자원을 발전동력으로 전환시켜 위대한 항일전쟁정신을 더욱 오래도록 빛나게 할 것이라고 한다.

홍색자원을 잘 활용하고 홍색유전자를 전승하면서 중원대지에서 홍색의 뜨거운 땅이 새 시대에 새로운 활력을 발산하고 있다.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임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