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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강택민동지의 사후유지를 계승해 분발의 힘을 단합, 결집해야

—전국 각지 간부, 군중들 강택민동지를 계속 심심히 추모

2022년 12월 05일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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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속 며칠 동안 전국의 광범한 간부, 대중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강택민동지의 탁월한 공훈을 깊이 기리고 강택민동지의 정신풍모를 깊이 느꼈다.

모두들 슬픔을 힘으로 바꾸고 강택민동지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20차 당대회 정신을 관철실시하는 실제행동으로 전환시켜 습근평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강력한 령도 아래 중국특색사회주의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습근평 새 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을 전면적으로 관철하며 마음과 힘을 합쳐 사회주의현대화국가를 전면적으로 건설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전면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해야 한다고 일치하게 표시했다.

광범한 간부, 군중들은 깊은 애도의 마음을 담아 강택민동지의 빛나는 투쟁생애를 돌이켜보았다

상해교통대학 캠퍼스내의 학교창립 100주년 기념비는 조용히 우뚝 솟아있다. 기념비에는 “지난날을 이어받아 앞날을 개척하고 고봉에로 용감히 톺아오르는 정신으로 교통대학을 세계 일류대학으로 건설하자”라는 모교에 대한 강택민동지의 기대가 담긴 글이 새겨져있다.

묵도하고 경례를 올리고 헌화하고 난, 2021급 석사연구생 장신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학교력사박물관의 자원봉사해설원인 장신이는 마음속에 진보적 학생 항일애국활동에 참가하고 당의 지하공작에 종사했던 것을 비롯한 강택민동지의 인생경력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는 “해설을 할 때마다 진리를 추구하고 나라와 인민을 위하는 강택민동지의 신념과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선배님, 우리는 영원히 선배님을 그리워할 것입니다.”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말했다.

전 포동신구 금교수출가공구개발주식유한회사 총경리 주효명은 “포동 개발 초기에 자금, 경험, 프로젝트, 인재가 결핍했지만 강택민동지와 당중앙에서 격려해준 덕분에 우리에게는 애국심과 지혜 그리고 창업혁신하는 용기가 생겼다. 우리들은 장원한 안목을 가진 강택민동지를 매우 존경한다.”라고 지난날을 회억하며 말했다.

강택민동지는 명령을 받고 장춘제1자동차제조공장의 설립에 참가했었다. 올해 89세 고령인 류인위는 당시 장춘제1자동차제조공장의 설립을 지원하러 온 쏘련 전문가 키레프의 통(번)역 담당요원이였다. 강택민동지가 세상을 떴다는 비보를 들은 후 그의 머리속에는 수십년 전에 강택민동지와 함께 일했던 장면이 저도 모르게 떠올랐다. 류인위는 력사는 강택민동지가 새중국 자동차공업과 동북공업기지 건설에 한 기여를 잊지 않을 것이며 그의 실사구시적인 과학적 태도, 간고소박한 작풍, 매사에 대중을 위하는 고상한 품격은 우리가 영원히 따라 배울 만하다고 말했다.

정태그룹주식유한회사 리사장 남존휘는 “광범한 민영기업들은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 개혁의 목격자이고 실천자이며 수혜자이다.”고 말하고 나서 강택민동지는 시종 민영기업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다면서 우리는 부탁을 명기하고 계속 실업을 발전시키는 것을 견지하며 끊임없이 혁신발전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1995년, 강택민동지는 무한우전과학연구원을 고찰할 때 국유기업의 발전을 추진하려면 반드시 사회주의시장경제의 요구에 부응해 개혁을 끊임없이 심화하고 기술개조와 기술진보를 추진하며 과학화 관리를 강화하고 기업의 시장경쟁능력, 과학기술혁신능력과 위험방지능력을 끊임없이 향상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무한우전과학연구원 부속품연구소 소장이였던 로국경은 “강택민동지의 꾸준히 개혁을 추진하는 정신은 우리들이 시종 세계 선단정보통신의 발전을 지향해 힘써 독창적 기술 발원지를 건설하도록 시시각각 격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86세 고령인 중국올림픽위원회 전 비서장 위기중은 강택민동지와 북경올림픽 유치 관련 이야기를 회억했다.

위기중은 “북경올림픽 유치가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2001년 7월 13일 저녁에 강택민동지는 북경 중화세기단에서 각계 대중들과 함께 희열의 순간을 보냈는데 그 장면이 지금도 머리속에 생생히 남아있다.”고 말하고 나서 올림픽유치과정은 중국인들이 분발하도록 격려해주었고 지금 중국은 보다 강대해졌고 인민들은 보다 자신감으로 넘쳐있으며 또한 중화민족은 보다 자강자립하고 분발향상하는 정신상태로 걸어나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광범한 간부와 대중들은 강택민동지의 일생은 빛나는 일생이며 투쟁으로 점철된 일생이라고 밝혔다. 70여년간의 혁명생애에서 그는 공산주의리상을 고수하고 당과 인민에 충성했으며 또한 초지일관하게 당과 인민의 사업을 위해 분투했다. 강택민동지는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강택민동지가 전당과 전국 여러 민족 인민을 인솔하여 세운 불후의 업적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시대는 기억한다

2000년 2월, 강택민동지는 광동에서 시찰하고 무명 고주시 지도간부 ‘3강(三讲)’교육회의에 참석했다. 광동성 무명 고주시 근자진 전임 당위서기 황무는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강택민동지가 중요연설을 발표했을 때 장내에 오래도록 울려퍼지던 박수소리를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5일뒤, 강택민동지는 광주에서 성당위원회 사업보고를 청취할 때 ‘세가지 대표’에 대한 요구를 명확히 제기했다.

“강택민동지는 전당의 지혜를 모아 ‘세가지 대표’중요사상을 창시하여 당이 지도사상 면에서 또 한번 시대와 병진하도록 추진함으로써 진정한 맑스주의자로서의 거대한 정치적, 리론적 용기를 보여주었다.” 황무는 말했다.

안휘 합비의 과학섬에서 중국과학원 합비물질과학연구원 스마트기계연구소 당위서기 오려방은 1998년 강택민동지가 섬을 시찰했을 때의 정경을 떠올렸다. 당시 박사과정 학생이였던 오려방은 강택민동지에게 이온빔기술이 돌연변이육종에 활용된 상황을 회보했다. “그는 과학기술의 사회생산력발전 추진에서의 중요한 역할에 깊은 중시를 돌렸으며 꾸준한 과학연구를 통해 국가의 식량안전보장에 힘을 이바지하라고 우리를 격려했다.”오려방은 말했다.

강택민동지는 과학연구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당시 중국과학원 합비분원에 ‘과학섬’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오늘날 이 3평방킬로메터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섬에 ‘인공태양’ EAST를 포함한 여러개의 큰 과학장치가 잇달아 건설, 운영되여 일련의 세계급 중대한 과학성과가 탄생했다.

1999년 6월, 강택민동지는 승리유전을 고찰할 때 당시 승리유전 컴퓨터센터당위서 기 서관학의 해설과 회보를 청취했다. “강택민동지는 매우 상냥하고 친절했다. 우리가 이룩한 진보에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창업정신을 발양하여 승리에서 승리에로 나아가자’라는 기념사를 기꺼이 써주었다.” 서관학은 이는 승리유전이 끊임없이 발전장대해지도록 격려하고 편달해주었으며 국가발전에 든든한 에너지 지원을 제공해주었다고 밝혔다.

“강택민동지는 대중을 존중하고 관심하며 시종 인민의 안위와 복지를 마음에 두고 가장 광범한 인민의 근본리익에 근거해 사업을 검증, 추진해왔다.”내몽골 바얀누르시 림하구 간소묘진 광련촌 당군서비스센터에서 촌민 왕유재와 촌 당지부, 촌민위원회 성원들은 강택민동지가 마을주민들에게 가져다준 격려와 따뜻함을 떠올리며 그를 추모했다.

1990년 9월, 강택민동지는 마을 과수원을 참관하고 촌민들의 전반적 소득상황을 알아보았다. “강택민동지는 우리에게 대담하게 일하라고 격려하면서 당의 정책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여 주민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전 마을은 세대별 생산량도급책임제를 안정적으로 실시하여 촌민들의 생산적극성을 충분히 불러일으켰다.” 왕유재는 말했다.

78세 나는 우국강은 심수증권거래소의 기획자중 한명이다. 그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강택민동지는 상해, 심수 두 증권거래소의 설립과 발전을 지지하여 우리 나라 금융체제개혁의 중대한 진전을 추동했다고 말했다.

“강택민동지는 리론혁신을 견지하고 시대와 더불어 전진하는 중국공산주의자들의 거대한 용기로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의 개혁목표와 기본틀을 확립했고 사회주의초급단계의 공유제를 주체로 하고 여러가지 소유제경제를 공동으로 발전시키는 기본경제제도와 로동에 따른 분배를 주체로 하고 여러가지 분배방식을 병존시키는 분배제도를 확립하여 전면적인 개혁개방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했다.” 우국강은 심수증권거래소는 하나의 창구이자 축소판이라면서 30여년 동안 심수증권거래소의 상장회사 수는 ‘빅5 증권사’에서 오늘날의 2,700여개로 발전했으며 앞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강택민동지는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문화는 전국 여러 민족 인민을 응집시키고 격려하는 중요한 력량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선진문화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던 그를 깊이 추모했다.
“중화의 우수한 전통문화에 대한 강택민동지의 열애와 중시는 우리를 크게 고무시켰다.”1994년 6월, 강택민동지는 복건 천주를 고찰할 때 남음(南音), 인형극 등 전통문화공연을 관람했다. 당시 천주 문화국 부국장 진일생은 “강택민동지는 공연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했으며 공연이 끝난 후 어린 배우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동소(洞箫)를 연주해보았다.”고 떠올렸다.

“당시 강택민동지와 악수를 나눈 아이들중 상당수가 천주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핵심인재가 되였다.” 진일승은 말했다. 강택민동지는 선진문화발전을 추진하는 것을 늘 념두에 두고 있었는바 새 시대의 위대한 실천과정에 사회주의정신문명건설을 추진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성과를 이룩하는 것은 곧 강택민동지에 대한 심심한 위로가 될 것이다.

유지를 계승해 사회주의현대화강국을 전면적으로 건설하기 위해 계속 단결분투하자

강서성 구강시 영수현 립신향은 일찍 1998년 장강 홍수와 침수 재해의 중재해구였다. 이곳 마을사람들은 그 당시 재해상황이 가장 엄중했던 날에 강택민동지가 비를 무릅쓰고 저습지 제방에 와서 재해상황을 살펴보고 대중들을 위문한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강택민동지는 나와 친절하게 악수하고 상하가 일심협력해 큰 재해 후 마을을 재건하도록 우리를 격려함으로써 대중들에게 거대한 지지를 주었고 대중들을 고무격려했다.” 당시 립신향 차계촌 촌민위원회 주임인 양장지는 “24년이 지난 지금도 어려움에 부딪치면 나는 그의 말을 생각하면 정신이 바짝 들고 일할 힘이 난다. 지금 생활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으며 우리는 마음속으로 그를 매우 그리워한다.”라고 감명깊게 말했다.

귀양 검도부이족묘족향 기룡촌 라의신채.

며칠간 48세 나는 기룡촌 당지부서기 류기운은 몹시 비통해했다. 1996년 10월, 강택민동지는 귀주성에서 고찰하는 기간에 일찍 라의신채에 가서 로아산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묘족동포들을 위문했다.

“강택민동지는 산간지역 소수민족대중들을 마음속에 두고 있으며 빈곤지역 대중들의 일상생활를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 당시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금방 마을에 와서 근무한 류기운은 해발 1,500여메터의 로아산에 당시 23가구의 묘족대중들이 살았는데 물이 부족하고 전기가 없으며 길도 통하지 않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빈곤한 면모를 개변하기 위해 당지는 산 밑에 라의신채를 건설해 대중들은 벽돌기와집으로 이사했으며 물, 전기, 길 ‘3통’을 실현했다.

“그때 우리는 금방 먹고입는 문제를 해결했는데 현재 전 촌의 년간 일인당 순소득은 2만원을 돌파했다.” 류기운은 이어 말했다. “우리는 새 시대에 계속 농촌진흥의 새로운 그림을 써내려가고 더욱 아름다운 생활로 강택민동지를 위로해야 한다.”

설역고원에서 장족동포들은 강택민동지를 깊이 추모했다.

강택민동지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84세 나는 로인 뤄쌍은 그가 강택민동지를 위해 하다를 바친 사진을 들고 깊은 추억에 빠졌다.

1998년 3월, 강택민동지는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 서장대표단을 찾아 대표들과 함께 정부사업보고를 심의했다. 당시 전국인대 대표이며 라싸시 성관구설주민위원회 당지부서기인 뤄쌍은 강택민동지에게 새하얀 하다를 바쳤으며 서장 여러 민족 인민에 대한 당중앙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세기가 교차하는 력사적 기회를 포착해 서부지역 개발의 발걸음을 다그쳐야 한다.” 1999년에 강택민동지를 ‘서부대개발’ 전략구상을 제기했다. 새로운 세기를 향한 이 중대한 결책은 서장의 급속발전을 위해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었고 제반 사업에서 전면적인 진보를 거두었다.

“오늘날의 서장은 강택민동지의 기대 대로 사회가 조화롭고 안정되며 인민이 편안하게 살면서 즐겁게 일하고 있다. 우리는 영원히 그를 그리워한다.” 뤄쌍은 말했다.

남해의 기슭에서 해남자유무역항건설선행구로서 양포가 부여받은 제반 선행시험개방정책이 서둘러 실시되고 있다.

“양포의 건설과 발전은 강택민동지의 관심과 배려를 떠날 수 없다.” 해남성 담주시 당위원회 상무위원이며 양포경제개발구 사업위원회 부서기인 임연신은 근 30년간 양포에 뿌리 박았다. 그는 “우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계속 전진하며 개혁개방을 심화하고 질 높은 발전의 길로 계속 나아가 양포를 해남발전의 아름다운 명함, 중국식 현대화의 새로운 하이라이트로 건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2006년 강택민동지는 《강택민문선》 제1권, 제2권, 제3권의 편집작업을 직접 주관하고 매편의 글들을 교열했다. 《강택민문선》의 편집사업에 참여했던 중앙당사문헌연구원 제3연구부 부주임 장명걸은 슬픔을 금치 못했다. 그는 “강택민동지는 언제나 시대발전의 맥박과 계기를 단단히 틀어쥐고 당과 인민의 생생한 실천으로부터 출발해 경험을 총화하고 길을 찾으며 착실하게 일하면서도 개척진취해왔다. 강택민동지의 우수한 품격과 고상한 풍모는 영원히 우리를 교육하고 격려할 것이다.”

광범한 간부와 군중들은 강택민동지에 대한 가장 좋은 위로는 새 시대 새 로정에서 계속 분발정진하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습근평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두리에 굳게 뭉쳐 ‘두가지 확립’의 결정적 의의를 깊이 터득하고 사회주의현대화국가를 전면적으로 건설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전면적으로 추진하는 데 보다 큰 새로운 기여를 해야 한다.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