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2세 고령인 푸츠런 할아버지는 자신이 처음 배운 한자인 사람 인(人)자를 줄곧 기억하고 있다.
푸츠런은 1944년에 서장자치구 시가제시에서 태여났다. 일가족은 농노주의 한 흙벽돌집에 세들어 살았는데 여름에는 비가 새고 바람이 들이닥쳤으며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가 뼈속까지 스며들었다. 마을의 많은 농노들은 사방으로 바람이 새는 낡은 천막에서 살았으며 어떤 영아는 외양간에서 태여나 그날 밤으로 불행하게 요절했다.
“서장봉건농노제하에서 생활했던 우리는 제대로 된 사람 취급도 못받았습니다. 그냥 농노주한테 얽매여 마구 버려지기나 하는 물건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태여나서 존엄도 없었고 희망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었습니다.” 고난했던 유년 시절을 되새기면서 푸츠런은 깊은 감회에 잠겼다.
당시 옛 서장에서 인구의 95% 이상을 차지하던 농노와 노예들은 모든 생산수단을 빼앗겼으며 인신자유는 꿈꿀 수가 없었다. 사찰의 승려와 상류 귀족들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바 전사회의 문맹률이 95%에 달했다. 광범한 농노들은 대대로 글을 몰랐고 법의 리치를 몰랐으며 또한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꿈에도 모른 채 살았다.
서장이 평화적으로 해방된 후 민주개혁의 봄바람이 고원의 곳곳에 불었다. 운명의 쇠사슬에서 벗어난 푸츠런은 드디여 꿈에도 바라던 교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선생님께서는 우리한테 두획이 좌우로 서로 기대여야만 사람 인(人)자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서장민주개혁 이후 우리는 비로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서게 되였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하늘을 떠받치고 땅에 우뚝 선 참다운 인간으로 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람 인(人)는 종자처럼 푸츠런의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는 “지식은 진주나 마노보다 더 귀중합니다.”라고 말했다. 글자를 깨친 후 그는 쉼없이 학업에 정진했다. 그는 시가제시에서 번역가로 일했고 49세에는 북경대학에 들어가 영어를 수학했으며 2007년, 환갑을 맞이한 그는 컴퓨터학습반에서 컴퓨터기초조작을 능숙하게 익혔다.
푸츠런은 “저는 이제 문맹이 아니라 정책을 리해할 수 있고 밖의 드넓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자신은 고향사람들을 위해 속마음을 털어놓을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의 실제적인 배려를 각 민족 군중들에게 전달하는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2021년 푸츠런은 서장백만농노해방기념관의 의무해설원이 되였다. 매년 3월 28일, 서장인민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이 특별한 날이 되면 그는 언제나 깔끔한 장족복장을 입고 일찍 기념관을 찾는다. 기념관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이 력사는 가슴 아픈 과거이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그 고난했던 력사를 몸소 겪었기에 있는 그대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후손들이 지금의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아끼며 살아가도록 일깨워줄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군 한다.
이외에 푸츠런은 또 라싸시사범학교 부속소학교의 교외도덕품성양성보도원이다. 다년간 그는 학생들에게 시대의 변천을 이야기해주며 소년아동들이 력사를 명기하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그는 “아이들이 꼭 리해했으면 하는 두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와 가정’입니다. 안정된 국가가 없으면 평안한 가정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국가는 단순히 교과서에 나오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 일생에서의 가장 튼튼한 버팀목입니다.”라고 말했다.
사람 인‘人’자를 깨치는 데로부터 평생을 바쳐 당당한 삶을 일궈낸 푸츠런의 긴 인생은 바로 설역고원의 거대한 변화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일 뿐만 아니라 더우기 백만 농노들이 신체적 해방에서 정신적 각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측면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배움의 기회조차 없던 데로부터 학문을 중시하는 데 이르기까지, 문맹률이 95%를 초과하던 데로부터 15년 공비교육을 전면적으로 시행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75년간의 분발정진을 통해 서장은 완비된 현대교육체계를 마련함으로써 세세대대의 고원의 학생들에게 혜택을 가져다주고 있다.
푸츠런은 “오늘날의 서장은 인간세상의 위대한 기적을 창조해냈다.”라고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