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일 오전, 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쑈전쟁 승리 80주년 기념대회가 북경 천안문광장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였다.
기념대회가 시작되기 전 습근평은 항일전쟁 로전사, 로동지 대표들과 친절하게 악수하면서 그들에게 가장 숭고한 경의를 표했다.
이 6명의 로전사들은 누구인가? 아래에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신병신(99세)
당령 82세인 신사군로전사
“공산주의는 내 평생의 신앙”
신병신(申秉宸)은 1926년에 태여나 1941년에 입대하고 194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44년 회북군구 무장사업대에 편입되여 항일전쟁, 해방전쟁에 참가했다.
항일전쟁시기, 회북 숙현 유격지대 전사, 회북군구 무장사업대 대원으로 있었다.
새중국이 창건된 이후 3급해방훈장, 중국인민해방군 독립공훈영예장을 수여받았다.
장평(100세)
항일전쟁, 해방전쟁, 개국대전에 참가
1939년, 일본군이 산서 풍령도를 점령했을 때 섬서에서 살던 장평(张坪)은 과감히 혁명대오에 가입했다.
1941년, 장평은 연안 조원의 중앙정보부 제3실로 전근되였다. 1943년, 그는 기병려에 가입했다. 그는 특별히 필기책을 준비하여 중국공산당 창립 이후의 영웅들을 베껴쓰면서 “영웅이 되려면 싸울 때마다 자신을 희생할 준비를 해야 하며 당과 인민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고 적었다.
이제 100세 고령이 된 그는 전쟁부터 평화까지의 세월을 돌아보며 “내가 오늘날까지 살아 나라가 번창하는 것을 보게 되니 참으로 큰 행운이다. 이 모든 것은 당이 인민을 령도한 성과이다.”고 감탄했다.
류세월(94세)
1938년 총대보다 작던 그는 ‘어린 팔로군’으로 되여
8세에 참군하여 나라를 지키고 19세에 베쮼국제평화병원의 안과의사가 되였으며 64세에 퇴직한 후 28년간 의료봉사를 한 류세월(刘世钺)은 평생을 바쳐 어떻게 ‘인민에게 가장 유리한 사람’이 되는지를 해석했다.
1940년, 팔로군은 백퇀대전을 발동했다. 류세월이 속한 129사는 백퇀대전의 주력부대였다. 1945년 항일전쟁 승리 전, 류세월은 연안으로 갔고 다음 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이후 북방대학 의학원에 파견되여 공부하게 되였다. 1948년 10월, 해방전쟁 태원전역이 시작되였을 때 류세월은 군의의 신분으로 다시 전선으로 달려갔다.
1949년, 새중국이 창건되기 전, 19세의 류세월은 중국인민해방군 베쮼국제평화병원에 배치되여 안과의사가 되였다.
1994년, 64세의 류세월은 40여년간 일하던 직장에서 퇴직한 후 항상 인민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후 28년 동안 류세월은 비바람을 무릅쓰고 한번도 멈추지 않고 자원봉사를 했는데 루적 자원봉사 진료회수는 연인원 3만명을 초과했다.
부영(102세)
백퇀대전, 반‘소탕’ 등 전역전투에 참가
1938년 6월, 부영(傅英)은 혁명에 참가했다. 1942년 5월, 일본군이 우리 나라 기중에 대한 ‘5.1대소탕’을 시작하자 부영은 전우들을 이끌고 적과 사투를 벌였으며 두달 동안 여러차례 격전을 펼치다가 결국 중상을 입고 전장에서 의식을 잃은 후 백성들에 의해 구조되였다.
로영웅의 등에는 아직도 총상이 하나 보이는데 “왜놈의 총알이 가슴에 박혔는데 심장과 몇센치메터 거리밖에 되지 않아 겨우 목숨을 건졌다.”
부영은 선후로 3급해방훈장, 3급독립자유훈장, 독립공훈영예장,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60주년 기념장을 수여받았고 2등공 1회, 3등공 2회를 세웠다.
그는 자신은 평범한 병사일 뿐 영웅이라고 할 수 없다면서 “전쟁에서 내 옆에 쓰러진 수만명의 전우들이 진정한 영웅이다!”고 말했다.
라경휘(94세)
향항이 함락된 후 아동단에 가입하고 1943년 혁명에 참가
라경휘(罗竞辉)는 향항 사두각 남용라옥촌의 사람으로 향항이 함락된 후 동강종대 항구독립대대에 가입했다.
라경휘가 속한 부대는 당시 적선 약 20척을 격멸하고 120명 이상의 일본군을 포로로 잡거나 사살했으며 대량의 일본군 총기와 탄약, 의약식품 등 물자를 탈취했다.
항전의 세월을 겪은 라경휘는 조국은 늘 향항의 강력한 뒤심이라고 감탄한다. 그는 오늘날의 평화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민의 희생을 대가로 한 것으로서 력사를 잊어서는 안되며 젊은 세대들이 혁명정신과 애국심을 계속 전해내려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기상(100세)
형제 5명 중 3명이 입대하여 항일해
1925년, 송기상(宋其祥)은 의창 의도에서 태여났으며 1942년 3월 불과 17세의 나이로 국민혁명군 제79군 림시편대 제6사의 전사가 되였다.
항일전쟁기간 송기상은 여러차례 첨병소대에 참가하여 가장 위험한 진지공격임무를 수행했다.
1943년 11월, 상덕회전이 시작되였다. 송기상이 속한 부대는 명령을 받고 진지를 사수하며 적과 나흘 동안 밤낮으로 혈전을 벌였다. 포탄이 비발치듯 떨어지고 터지며 흙이 흩날리고 연기가 자욱했다. 주변의 전우들이 하나둘씩 쓰러졌지만 그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적과 백병전을 벌이며 일본군의 여러차례 공격을 완강히 물리쳤다.
이후 3년 동안 송기상은 항일전쟁이 승리를 거두기까지 상남에서 전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 송기상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행복수로’를 수건할 때 그는 다시 한번 앞장섰다. 그는 “싸우는 것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수로를 건설하는 것은 자손을 위한 것이므로 모두 큰일이다!”라고 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