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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층동향

호북성 대오현 간부와 군중, 위대한 항일전쟁정신 전승—

홍색이야기, 분발정진하는 열의를 북돋워주어(력사를 명기하고 선렬들을 기리다)

2025년 06월 20일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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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오산 기슭은 무더위가 한창이다. 한 80세 로인이 호북성 효감시 대오현 방판진 백과수만촌의 한 소박하게 꾸며진 집 앞에 멈춰섰다. 자세히 살펴본 후 로인은 “이것이 바로 나의 부모님이 살았던 집이다”라고 말했다.

로인의 성함은 임전승으로 신사군 제5사 정치부 주임 임질빈의 아들이다. 임전승은 신사군 제5사 사령부 유적지의 벽돌담을 만지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80여년전에 대오산 아래에 자리한 백과수만이 신사군 제5사 사령부의 주재지가 되였다. 전민족이 떨쳐일어나 항일전쟁을 하던 시기에 대오산의 이야기가 이로써 펼쳐지기 시작했다…

옛사진에 담긴 이야기

현지에 자리한 신사군 제5사 기념관에 들어선 임전승은 기념관에 전시된 많은 옛사진들에 대해 훤히 꿰고 있었다.

기념관에 꼬마전사와 미국기자 스메들리가 함께 찍은 사진이 소장되여있었다. 꼬마전사는 성국화로 당시 12살밖에 안되였다. 스메들리가 성국화를 입양해 공부시키려고 그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그는 “모든 전사들은 모두 반드시 전선에 남아있어야 한다”, “적을 물리치고 승리한 후에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답했다.

그후 성국화는 유감스럽게도 전투에서 희생되여 조용히 공부할 그날을 맞이하지 못했다. 항일전쟁기간에 신사군 제5사의 사상자수는 1만 3,200명에 달했는데 그들은 대오산에 영용하고 장렬한 이야기들을 남겼다.

임전승은 장가루자회의 유적지를 담은 사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1943년초, 악예변구 당위원회 확대회의가 대오산 장가루자에서 개최되였는데 회의에 참가한 전사들의 말들이 협곡을 따라 2리 길이로 줄지어 메여져있었다. 그때 큰눈이 내려 회의에 참가한 전사들은 마른 풀을 깔고 땅바닥에 드러누워 서로 꼭 끌어안으며 체온으로 추위를 견뎠다.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이 찢어진 마을사람들은 잇달아 방을 비워주고 잠자리를 내주거나 옷과 이불을 갖다주었다.

마을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그믐날 그들이 잠든 후 신사군전사들은 집집마다의 문에 장작 한묶음씩 기대여놓고 붉은 종이에 은화 한잎을 싸서 그 우에 올려놓았다. 설날 아침, 신사군전사들이 집집마다 세배 드리러 다니자 마을사람들은 닭알, 납육, 찰떡을 전사들의 손에 쥐여주었다.

신사군 제5사 전사들은 대오현에 머무르는 동안 낮에 한가할 때면 마을사람들을 도와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그들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냈다. 임전승은 “마을사람들은 안방에서 자고 가운데 방을 전사들에게 내여주었다”라고 말했다.

항일전쟁기간에 신사군 제5사는 선후로 15만명 일본군과 8만여명 괴뢰군의 진공을 막아냈는바 일본군, 괴뢰군과 치른 주요전투는 1,260차례에 달하고 섬멸한 일본군 및 괴뢰군은 4만 3,000명 이상에 달했다. 1945년 8월 15일, 신사군 제5사 전사들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들었다. 항일전쟁은 이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대오현당안관 부관장 하엽명은 “안타깝게도 5사의 많은 력사자료들이 전쟁시기에 류실되였다”고 말했다. 신사군 제5사가 대오산에 머물던 시기의 력사를 더욱 전면적으로 복원하기 위해 최근년간 사업일군들은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해왔다. 현재 대오산 당안관에 관련 문헌자료, 회상기, 력사사진, 음반영상자료 등이 2,000여부 소장되여있다.

대오산의 전투이야기는 천천히 복원되고 더욱 잘 명기되고 있다.

해설원 시각에서의 전승

오전 9시 넘어 대오현 천수실험학교에서 중간휴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학생들이 잇달아 교실에서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자 교수청사 1층의 력사주제복도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력사사진과 영웅렬사이야기들을 담은 게시판이 그 복도 량켠에 설치되여있었다. 6학년 학생 오재이는 “적지 않은 항일전쟁사적들은 대오에서 일어난 것이기에 영웅렬사들의 사적들을 해설할 때에 낯설지가 않다. 그분들은 우리 곁에 살아숨쉬고 있다”고 말했다. 오재이는 한 작문에서 “나는 ‘홰불할아버지’처럼 앞으로 해설원이 되여 홍색이야기를 전해가고 싶다”고 썼다.

‘홰불할어버지’의 성함은 진의만으로 대오현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으로 있었다. 그는 퇴직후 줄곧 홍색이야기 선전사업에 몸을 담아왔다. 진의만은 기록을 정리하고 책을 쓰며 수업자료를 만들고 다큐멘터리를 촬영해왔는데 그가 조직한 홍색교육 선전활동은 이미 100여차례나 되고 참여한 청소년은 연인원수로 3만명 이상에 달한다. 진의만은 “한가지 일을 잘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꾸준히 잘해나가는 것이다. 나는 초심을 고수하면서 홍색문화 선전원역할을 잘 발휘해나갈 것이다”고 말했다.

최근 몇년 동안 대오현은 600여명의 ‘어린 홍색안내원’을 양성했는데 그들은 주말과 휴가를 리용하여 연구자와 관광객에게 1,100여차례의 자원봉사 해설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리고《대오봉화》 등 연극을 창작해 농촌에 찾아가는 공연, 혜민공연 등을 통해 홍색이야기를 잘 전달했다. 또한 ‘대별산에 붉은 기 휘날리며’ 주제활동을 개최하고 호북, 하남, 안휘 3개 성의 대별산지역 10여개 현, 시를 조직하여 붉은 이야기를 선전하고 홍색문화관광을 추천했다.

“전승의 전제는 전파이므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력사를 리해하고 탐구하도록 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홍색이야기를 발굴하고 몰입식 및 상호 작용식 전시를 잘 구축해야 한다. 년령대별로 다른 전파방식을 취하여 이러한 이야기들이 관중들을 더욱 잘 사로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오현혁명전통교육기지 관리위원회 부주임 부파가 말했다.

최근년간 대오현 당안관은 ‘홍수대별산’이라는 숏폼계정을 개설했는데 하엽명이 운영을 담당하여 홍색영상자료를 발표했다. “많은 군중들이 우리에게 문의를 남겼는데 어떤 군중들은 력사적 사실을 료해하러 왔고 어떤 군중들은 우리의 자료를 바탕으로 가족을 찾으러 왔으며 또 어떤 군중들은 단서를 제공하여 우리가 확인해주기를 바랐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력사를 자세히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의 의의이다.” 하엽명이 말했다.

소학생부터 퇴직로인까지, 전문인원부터 일반대중까지 대오산의 홍색이야기는 조금씩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들고 있다.

치부의 길이 가져온 변화

백과수만촌의 로인은 항일전쟁시기에는 산 속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하루종일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촌민 리령의 기억에 따르면 30년전 이곳의 마을통로는 ‘빨래판길’이였다.

현재 고속철도역에서 백과수만촌까지는 차로 30분 거리이며 촌 밖에서 사령부 옛터로 가는 길은 아스팔트도로로 되였다. 백과수만촌의 홍색자원을 바탕으로 리령은 농가음식점을 차렸는데 해마다 10만원 이상 벌 수 있었다. 지금의 생활에 대해 리령은 매우 만족해하며 말했다. “큰딸은 기념관에서 해설원으로 일하고 있고 막내는 대학교 2학년 재학중이다. 마을에는 차공장, 전자상거래, 관광업이 있어 생활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

마을로 통하는 이 길을 따라 차로 몇분 거리에 백과수만촌과 린접한 대오산촌에 도착할 수 있다. 오후 2시 반, 대오산촌의 한 가정라이브방송에서 촌민 하연과 남편이 농산물을 포장하고 있었다.

라이브커머스 쇼호스트 하연은 2019년 마을로 돌아와 현재 4명의 라이브방송팀을 구성했다. 크지 않은 이 라이브방에는 진렬대, 컴퓨터, 삼각대, 조명 등 설비가 모두 갖추어져있다. 하연은 “마을사람들이 달걀, 야채를 가져오고 린근 차공장에서 차잎을 가져오면 우리가 책임지고 판매해드린다.”라고 말했다.

치부의 선두주자로서 하연은 대오현의 추천을 받고 호북직업기술학원에 가서 공부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시야를 넓히고 기술도 익혔다”고 한다. 마을에 돌아온 후 그는 물류비용을 낮추는 방법을 강구하고 농산물의 품질을 엄격히 통제하여 사업이 점점 더 잘되고 있다.

하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면 대오산의 차밭이 뚜렷하게 보인다. 대오산촌에는 집집마다 차밭이 있다. 매년 봄철 차잎 수확시기가 되면 마을 전체에서 5만근의 신선한 차잎을 수확할 수 있다. 최근년간 대오현은 차산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켜 적지 않은 특색브랜드를 출시했는바 류집진의 ‘반산금고•다향캠프(伴山金鼓•茶乡营地)’, 대오차산업과학기술시범원 등이 한창 건설되고 있다.

대오산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고 하연도 새로운 계획을 밝혔다. “다음 단계에는 홍색관광과 결부하여 민박을 발전시킬 계획이지만 먼저 정책, 시세와 부지선정을 연구해야 한다. 여기엔 모두 학문이 담겨져있다.”

1998년에 임질빈이 별세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임전승은 그의 유골을 대오산에 뿌렸다. 임전승은 “이곳의 변화는 너무나 크다. 아버지와 전우들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라고 말했다. 하연은 “대오산은 그들의 영웅적인 사적을 지켜봤으며 우리의 분투이야기도 지켜보고 있다. 그분들은 분명히 ‘보고’ 계실 것이고 우리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