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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층동향

화천현 성화촌: 신시대 제1집단농장 만반의 준비로 새 출발 시도

2023년 10월 26일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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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한부의 력사라면 가목사시 화천현 성화조선족향 성화촌의 력사는 평범하면서도 위대하다.

한때 이곳은 새중국 제1 집단농장, 첫번째 트랙터조합, 첫번째 대면적 다수확 돌파 지역, 첫번째 농촌주제 다큐멘터리 촬영지, 첫번째로 소학교교과서에 수록된 집단농장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생활방식이 변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농장 사람들이 흑토를 떠나 외지 로무길에 올랐다. 어떻게 신시대에 성화촌의 옛 영광을 계속 쓸 것인가? 촌주재 업무팀과 촌당지부, 촌민위원회는 전촌 간부와 대중을 이끌어 '한점의 불꽃으로 료원의 불길을 지피는' 기세로 빈곤 퇴치에서 초요생활로 나아갔다.

오늘날 성화촌은 기층 당조직의 전투보루역할과 당원들의 선봉모범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여 민족문화를 음식, 숙박, 관광, 쇼핑 및 오락의 전반 사슬에 융합하고 민족 고유의 특색을 지닌 '성화의 길'을 걸어 '전국 문명촌', '제2진 전국 향촌 관광 중점촌', '중국 소수민족 특색촌' 등 명예를 안았다.

견인불발하여 '성화정신' 전승

1948년 벼농사경험이 있는 조선족 농민 김백산(金白山)은 농민을 이주시키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짓자는 국가의 호소에 호응하여 길림성 돈화현 농민 70여가구와 전국 각지에서 모집한 290여 가구를 이끌고 화천에 와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농사를 지었고 혁신적으로 5농가를 조직하여 집단경작조(集耕组)를 구성했으며 합작화성격의 모태형 생산경영방식을 통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증산, 소득 증대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성화촌은 호도거리, 호조조, 집단경작 등 세가지 생산방식이 있었다. 소수의 농민들은 '사람이 많으면 마음이 일치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농장에서 해당 토지를 분여받아 호도거리를 하게 되였는데 그 결과 토지가 집중되지 않아 기계작업에 불리했고 위험 방지능력이 약했으며 수확량이 낮았다. 대다수의 농민들은 스스로 맞는 '상대'를 찾아 3-4가구 또는 5-6가구씩 '호조조'를 구성하는 생산방식을 취했는데 그 결과 평균 분배로 많은 사람들이 생산적극성을 잃고 로동력을 랑비했으며 생산이 발전하지 못하고 산업 및 부업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김백산은 부분적으로 로동력이 적은 가구를 조직하여 '집단경작조'를 구성했고 토지 통일생산을 실시했으며 토지에 의한 배당을 실시하고 각자의 특기에 따라 분업하여 로동효률을 높이고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켰다.

1951년 2월 당의 지도와 농장관리부의 지원으로 성화집단농장이 설립되였다. 김백산이 농장 주석에 당선되였고 리재근(李在根)이 농장의 부주석이자 당지부서기로 임명되였으며 이 두명의 '기술혁신팬'의 인솔하에 농장은 종자관리소(种子站)과 원예팀을 설립하고 과학적인 재배연구팀을 설립했으며 전통적인 벼 희식재배법을 이랑 밀식재배법으로 변경하여 1953년에 마침내 무당 593근의 전성 최고 생산기록을 달성했다.

농장에서 지속적으로 벼생산량을 늘리는 동시에 1952년부터 원예팀, 축산팀, 종자팀, 쌀가공공장, 철목공장, 목공장 등 부업항목을 련속 시작했다. 당시 농장사람들이 먹는 돼지고기는 북경에서 좋은 품종을 들여와 키운 것이고 어린이들이 마시는 우유는 네덜란드에서 전문 양식한 젖소에서 생산된 우유로 당시 싱화농장의 풍요로움을 알 수 있었다.

성화촌 새중국 제1집단농장 체험관에서 알아본데 따르면 1954년 김백산이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되였는데 당시 많은 농민대표들이 트랙터가 무엇인지 몰랐고 전등도 인민대회당에 도착했을 때 처음 보았다고 한다. 김백산은 성화사람들이 어떻게 트랙터를 사용하여 농사를 짓고 땅을 갈아엎는지 설명해 많은 농민대표들을 매료시켰고 성화농장에 대한 부러움을 샀다. 당시 성화농장의 명성은 오늘날의 화서촌과 같았다.

성화사람들은 근면과 실무집착에 의존하여 농장을 운영할 때 소 한마리와 수레 한대로부터1957년말까지 소 120마리, 말 39필, 수레 23대로 발전했다. 또한 공작기계(机床) 2대, 련합전동탈곡기 1세트, 벼타작전동탈곡기(打稻头电力脱谷机、) 1세트, 전기용접기 1대, 절초기 1대, 제초기 52대, 파종기 20대, 대형 쟁기 20대, 일 생산량이 80,000근에 달하는 정미기를 구입하여 기본적으로 경작, 탈곡, 절초, 정미 기계화를 실현했다.

한걸음 한걸음 혁신하여 '초요생활' 향해 매진

1950년대에 성화농장은 집단농업의 발전을 통해 한때 눈부시게 빛났다. 그러나 이후 '외지 로무송출'이 등장하면서 마을주민의 90% 이상이 외지 로무에 나갔고 집단경제는 점차 위축되였다. 2017년 촌에 남아 있는 40여 가구 중 22가구가 빈곤 가구로 지정되였고 년간 가구당 소득은 3,000원 미만이였다.

'전면적으로 초요사회로 가는 길에서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된다' 어떻게 하면 촌민들이 초요사회로 가는 길에서 락오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최철준 촌당지부서기와 촌민위원회는 여러모로 고민끝에 모두가 혁신만이 발전할 수 있다는데 공감했다.

2017년 성화촌은 태양광발전과 곡물줄기발전에 의한 빈곤퇴치사업을 현에 신청하여 각 빈곤가구는 4,000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으며 동시에 민족식품가공공장을 설립하여 김치를 담그고 떡을 만들어 조선족의 전통 솜씨를 계승함과 동시에 소득도 증가했다. 2년만에 빈곤가구 리태옥(李泰玉) 가족의 수입은 3,000원 미만에서 거의 20,000원으로 증가했다.

전성 빈곤퇴치 효과 평가에서 화천현은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년 련속 'A' 순위 상위권을 차지했으며 성화촌도 '빈곤'의 딱지를 완전히 벗고 일어섰다.

최근 몇년동안 성화촌의 변화를 언급하면 '80후' 출생인 '류화언니' 한류화(韩柳花)가 가장 발언권이 있다. "2018년 전 내가 청도에서 외식업을 하던 바로 그 해 성화촌이 집체토지를 자산으로 주식에 출자하여 총 7000만원을 투자해 '성화장원 1호 민속촌' 프로젝트를 실시하면서 귀촌창업에 대한 생각이 싹텄다."고 말하는 한류화는 "타향이 아무리 좋아도 고향보다 못하다"며 "곧 오픈하게 되는 '성화장원 1호 민속촌' 프로젝트에 매료됐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촌에 돌아온 후 '류화언니'는 촌 부녀주임의 중임을 맡아하며 성화촌에서 20여년만에 처음으로 귀촌한 촌민이 되였다. 촌에 돌아온 그녀는 로동력 부족으로 촌의 많은 경작지가 방치되여 있는 것을 보고 기름진 흑토를 보며 마음이 조급해났다. 그녀는 방치된 뜨락에 채소를 심어 가꿨고 온라인플랫폼을 통해 도시에 판매하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친환경적이고 실속 있는 농산물이 인기를 끌면서 한류화는 좋은 출발을 하게 되였으며 그 이후로 집집마다 로인들을 인솔하여 공터에 채소를 심고 통일적으로 판매했다.

촌민들의 지원으로 2019년 한류화는 촌민들을 이끌어 200제곱미터 이상이 되는 115곳 유휴 채소밭에 채소를 심고 '류화언니네 생태 채소밭'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푸르고 싱싱한 채소는 도시에 판매될 뿐만 아니라 마을의 농부산물 전문 합작사에도 공급하고 있다.

"우리와 합작사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무, 마늘, 배추 같은 건 조선족 김치의 필수 재료이고 옥수수는 막걸리를 만들 수 있는데 지금 합작사에서는 보내는 만큼 전부 요구하여 115곳 터밭에서 생산되는 채소가 공급이 딸리는 상황입니다." 한류화는 전촌이 뜨락경제를 통해 가구당 최소 1000원이상 소득이 증가되였다고 말했다.

올해 7월 '류화언니'는 촌어구에 '한류화조선족음식점'을 오픈하여 사장이 되였고 그녀의 인솔하에 더 많은 외지 로무자들이 귀촌하여 합류하고 있다.

문화와 관광을 융합하여 쟁쟁한 '성화명함장' 작성

"성화촌에 오는 친구들이 있는데 먼저 조선족 복장을 빌려주고, 련못에 가서 사진을 찍고, 농장체험관에서 그들에게 '새중국 제1집단농장'의 력사를 설명하고, 점심에는 민족식당에서 정통 조선족음식을 배불리 먹고, 조선족 특색 스포츠항목인 '게이트볼'을 치고, 채집원과 낚시터에서 편안한 오후를 보내고 저녁에는 민박집에서 불고기와 카드놀이, 휴식으로 즐거운 한루를 보냅니다." 마을 관광항목 하면2022년부터 성화조선족향에서 사업하는 조선족 녀성 최금선(崔锦善) 씨가 거침없이 이야기주머니를 푼다.

최금선 씨는 '00후' 출생으로 할빈상업대학을 졸업하고 향에서 민정과 주택건설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토박이 '성화사람'으로서 가끔 관광객을 상대로 홍보와 해설에 출연한다.

"예전에는 집 앞에 일자리가 없어 촌민들이 외지 로무를 나갔지만 지금은 마을 내 조선민족식품공장이 마을의 '베테랑'을 부자가 되는 '대박'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식품공장의 떡, 김치, 막걸리, 순대 등 제품은 공급이 딸리는 상황이며 촌의 20여명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농업과 관광이 융합된 채집원은 19동의 온실하우스를 건설하여 작은 감, 딸기, 채소 등 경제작물을 생산함과 동시에 민족식당과 식품공장에 록색 유기농제품을 공급하며 년간 생산수익은 6%의 비률로 빈곤 가구에 배당됩니다. 2023년 성화촌은 550만원의 국가자금을 신청하여 조선족 전통 된장공장을 건설하고 청도동현(东炫)식품유한회사와 협력하여 제품을 한국으로 수출하며 현재 300만 근의 수출주문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프로젝트가 완공되면 성화촌은 년간 30만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으며 가구당 평균 2,000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습니다." 최금선 씨는 점점 더 많은 프로젝트가 락착됨에 따라 앞으로 더 많은 촌민들이 '집앞'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성화촌을 어떻게 건설할지에 대해 성화조선족향 당위서기 주홍(朱虹)은 속셈을 터놓았다. 성화향은 특색 제품, 고품질 서비스로 인기를 모으고 브랜드를 강화하며 효익을 높이고 농업, 관광 및 문화의 융합 발전모델을 만들 것이다. 성화농장, 중성촌 '소명동', 료원슬로시티(慢城)를 성화문화관광지로 삼아 산업사슬을 확장할 것이다. 성화촌에는 전원종합체를 위주로 성화농장을 조성하고 중성촌에는 '소명동' 문화 관광개념을 도입하여 특색 포인트를 조성하며 '료원슬로시티'를 주제로 오량(五良)농업원, 조선족목조가옥 등 관광요소를 우수하게 조성하여 '1선3유(一线三游)' 코스를 조성할 것이다. 현재 싱화촌과 중성촌은 이미 전국 관광 중점촌이며 다음 단계에 싱화향은 전국 관광 중점 향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성화를 화하동극관광(華夏東極遊)의 쟁쟁한 명함장으로 만들어 '새중국 제1집단농장'에서 '신시대 제1 집단농장'으로 나아갈 것이다.

래원: 인터넷흑룡강신문(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