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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미향이》(1)

《수도권의 '촌놈'들》 계렬소설 제1편, 2000년 장백산 계렬소설상

2011년 10월 25일 15:29【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녀자의 수난사는 대체로 밤에 시작된다

나와 그녀의 첫만남을 기억에 떠올려보면 그 어느 첩보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련상시켜 지금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5년전, 몽골로부터 갑자기 들이닥친 한류가 앙상한 가로수 나무가지에 처절하게 매달린 몇 안되는 말라버린 나뭇잎의 림종을 재촉하던 그런 계절의 어느날이였다.

그날 나는 서재에 죽치고 앉아 우리 민족녀성운명사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 전날까지만해도 나는 한 잡지사의 청탁으로 쓰게 될 정기칼럼을 구상했다. 처음에 난 칼럼이 뭔지도 몰랐다. 그게 뭔가고 잡지사의 친구한테 물으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칼럼이란 신문, 잡지에서 시사문제, 사회와 풍속, 인생 등 문제를 다룬 글을 전문 기재하는 특별란인데 칼럼을 다루는 사람을 칼럼니스트라고 한다면서 나보고 한번 잘 해보라고 했다. 혼탁한 세상에서 자기 인생도 설계할줄 모르는 사람이 일약 세상은 어떻고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거창하게 운운하는 지성인으로 일약 변신한 셈이다.

세상과 인생을 운운하자면 우선 선인들의 명언록이나 잠언록 같은걸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세계격언록을 뒤적이다가 눈에 쑥 들어오는 글 한줄을 발견했다.

"녀자의 수난사는 대체로 밤에 시작된다."

가석한 것은 이말을 대체 누가 했는지 책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녀자의 수난사는 대체로 밤에 시작된다는 이 말의 뜻을 되새기노라니 언젠가 보았던 한 소설이 떠올랐다. 조선조시대 씨받이운명을 그린 소설이였는데 그 소설의 주인공인 씨받이처녀는 씨를 받기위해 처음으로 사내를 받아들인 그날밤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나의 운명은 바로 그날밤에 결정지어졌다."

말하자면 씨받이로서의 그 후 비참한 운명이 바로 첫 사내를 대하던 그날 밤에 결정지어졌다는 얘기다. 말을 바꾸어 말하면 그 녀인의 수난사는 바로 그날밤부터 시작되였다는 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강하게 쳤다.

가난으로 씨받이 신세가 되던 증조할머니 세대의 녀성들의 수난사, 망국의 설음을 안고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 세대의 녀성들의 수난사, "정치몽둥이"가 날아다니던 그 시절 우상정치, "무산계급독재정치"의 순장품으로 된 어머니 세대 녀성들의 수난사, 격변하는 시대에 가치관념의 혼란으로 방황하고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지금 세대 녀성들의 수난사 이런식으로 쭉 선을 그어내려 가노라면 녀인의 수난사로 민족의 비극을 재조명할수 있지않을가.

기발한 생각같아서 나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바로 그거다. 녀자의 수난사가 시작된다는 밤을 재조명하자. 그 밤이 숙명적인 밤이던 치욕적인 밤이던 녀자로 다시 태여나는 성스런 밤이던간 그 밤을 그리면 녀성의 수난사가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내가 제풀에 흥분해가지고 해당 자료들을 열독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송수화기를 드니 가녀리지만 약간은 귀맛좋게 들리는 젊은 녀성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안녕하세요? 송철선생님 계십니까?"

"네. 바로 접니다. 누구신지?"

"외람된 물음이지만 글 쓰는 송철선생님 맞죠?"

"글 쓴다기보다 글장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뉘신지?"

"저의 이름을 대도 선생님께선 모르실거얘요. 그저 선생님을 숭배하는 팬이라고 생각해주시고 저의 청을 들어주시면 고맙겠어요."

"청이라니?"

"언제부터 선생님을 한번 찾아 뵙고 싶었어요. 귀한 시간이지만 한번 짬을 내서 저를 만나주시면 큰 영광으로 간주하겠어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팬의 목소리다. 한번 만나만 줘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이런 말을 상급지도자에게 한다면 아첨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라 하겠지만 문학팬들에게 있어서는 아첨이라고 하기보다 경모의 마음이 다분히 깔린 소리라고 표현해야 한다. 한것은 팬들의 말은 진솔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니까. 10년전만해도 이런 말을 너무나 많이 들어왔다. 그때 나의 팬들은 내 작품이 나가기만 하면 전화를 걸어왔고 편지를 보내왔으며 어떤 극성팬은 사랑을 고백해 오기도 하였다. 지어 한 극성팬은 울면서 내가 비록 처자식을 둔 사람이지만 영원히 문학의 우상, 사랑의 백마왕자로 마음에 모시고 일생을 나만 지켜보고 살겠다고 했다. 그 때는 찬사를 보내주고 열광하는 팬들이 귀찮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의 60년대 후반기처럼 인간령혼을 정화시키는 작가가 "피고름 짜는 의사"나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졸부보다 못한 그런 세월이 오면서 글쟁이들이 머리를 잡아뜯으며 쓴 글을 내주는 이가 없어 자기 호주머니의 돈을 털어 출간하고 또 그 책을 보아주는 이가 없어 창고에 묵여두는 그런 가련한 신세로 전락했다. 누군가 이런 현상을 두고 작가의 타락이라고 했고 또 누구는 작가의 타락이 아니라 문명의 타락이라고 했다. 진짜 누가 타락하고 또 누가 누구를 타락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두문분출하고 글을 쓰는 글쟁이들이 12억 인구 모두 돈을 벌라는 세상에서는 어딘가 정신상태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문학팬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듣기에도 성대에 이상이 생겨 병원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같아 보이는 사람이 목갈린 소리로 내지르는 단발마적인 괴성도 열광하는 가수팬들의 눈물, 코물, 오줌까지 짜내게 하는 세월에 내가 한 번 만나주면 큰 영광으로 간주하겠다는 팬이 나타났으니 반갑다기보다도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말씀 고맙습니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신기루같이 나타난 팬을 깍듯이 대했다.

"용건이라기 보다도 선생님께서 시간을 짜내 저의 얘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얘요."

"무슨 얘기신데?"

"저의 얘긴 선생님한텐 좋은 글감이 되실거예요. 정말이예요. 흑…"

나의 팬은 말을 맺지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송수화기로 울려나오는 녀자의 흐느낌소리를 들으니 내가 별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같이 느껴졌다.

"울지마시고 차근차근 얘기하십시오."

한참만에 나의 팬은 오열을 그치고 울음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전화로는 도저히 얘기가 될것 같지 않아요."

글감이 된다는 나의 팬의 이야기, 더군다나 오열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그 이야기가 무척 궁금스러웠다.

"지금 어디서 전화를 거십니까?"

내 말에 팬은 대뜸 반색한다.

"여긴 공중전화인데 선생님 지금 나와주실래요?"

"그러지요. 그런데 만날 장소를 어디로 정하면 좋겠습니까?"

"전 어제 북경에 오다나니 지리를 잘 몰라요. 제가 안다는 것은 천안문밖에 없어요."

"천안문앞엔 관광객이 많아 만남의 장소로 정하기는…"

"그러시면 천안문광장 중심에 있는 인민영웅기념비앞에서 만나는게 어떨까요?"

"그런데 어떻게 서로 알아볼수 있겠는지…"

"제가요 아래우를 까만색으로 정장을 했는데 손에 〈연변녀성〉 잡지를 들고 있을께요. 시간을 몇시로 정할까요?"

"오전 11시로 하지요."

"선생님 정말 고마워요."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에 이르니 5분전 11시였다. 어떻게 생긴 녀성인지 또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조금은 궁금한 마음으로 기념비 주변을 눈빗질했다. 까만색 정장을 하고 손에는 "연변녀성"잡지를 쥔 녀인을 찾아 기념비 주변을 돌았다. 그러나 그런 녀인은 없었다. 담배 한 대 붙여 입에 무는데 한 녀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까만색 정장을 하고 손에 잡지를 말아쥔 한 녀인이 기념비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얼핏봐서 나이가 40대 초반에 가까운 녀인이였다. 전화로 들은 젊은 목소리에 비해 조금은 상상이 빗나갔음을 느끼면서 나는 그 녀인을 향해 마주 걸어갔다. 전화로 약속한 내 팬이라면 적어도 주변을 두리번 거리겠건만 그 녀인은 고개를 약간 숙인채 내처 걸어왔다. 나는 그 녀인의 곁을 지나치면서 그 녀인이 손에 말아쥔 잡지에 시선을 모았다. 그러나 그 녀인이 잡지를 너무 돌돌 말아쥐였기에 그것이 무슨 잡지인지 알수 없었다.

"저 미안하지만…"

내가 우리말로 그 녀인을 향해 말을 건넸지만 그 녀인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가버렸다. 그 어느 첩보영화에서 보았던 접선에 실패한 한 장면이 떠올라 절로 멋적은 웃음이 힉 나갔다.

담배 한 대를 거의 다 피웠을 때 인민대회당쪽에서 바삐 뛰여오는 까만색 정장을 한 녀성이 눈에 잡혔다. 갸날프리만치 쪽 빠진 몸매를 봐선 처녀로밖에 볼수없었다. 그러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또 실망했다. 그런데 나와 가까운 거리까지 달려온 그 녀성이 멈춰서더니 어깨에 멘 가방에서 잡지 한책을 꺼내는것이였다.

제발 그 잡지가 "연변녀성"이기를…

기대와 맞아떨어졌다. 그 녀성이 가슴앞에 펴든 잡지표지엔 전통 한복을 입은 조선족녀성의 사진이 찍혀져 있었다. 접선 성공이다. 내가 희미한 미소를 입에 단채 그녀한테 다가가자 그녀도 대충은 짐작이 가는지 마주 다가왔다.

내가 그녀가 쥐고있는 잡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웃어보이자 그녀는 인차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나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래 기다렸죠? 차가 밀려서…"

그녀는 흘러내려 눈을 가리는 머리칼을 뒤로 쓸어올렸다. 조금은 넓은 하얀 이마와 쌍거풀이 질가말가한 반짝이는 두눈이 드러났다. 작은 눈이였지만 새물새물 웃는듯한 그런 눈이였다.

"나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아직은 식사전이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식사나 합시다."

우리는 천안문광장 남쪽켠에 있는 맥드날도로 가서 빈자리가 많이 남은 구석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본 화제에 들어가기전에 나로선 우선 그녀가 나의 전화를 어떻게 알았는가가 궁금했다.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그녀의 대답이 기막혔다. 북경역 지하철입구에 있는 쓰레기통곁에서 나의 명함을 주었다는것이였다. 필경 언젠가 나의 명함을 받은 어느 녀석이 북경을 떠나면서 버린 모양이였다. 그저 간단히"자유기고가"라고만 달랑 밝힌 나의 명함이 그 무슨 사장이요 리사장이요 주석이요 하는 사람들의 명함처럼 정히 명함첩에 모셔질 명함은 아니지만 믿기어려울 정도로 쓰레기취급을 받았다는 것은 억장이 막히는 일이였다. 하긴 돈이나 권세를 가진 사람에 비해 별볼일이 없는 글쟁이의 명함이니 그런 "대접"을 받을만도 하다. 스스로 마음이 비참해지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내 명함을 발견하는 순간 얼마나 행운스러웠는지 몰랐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다소 위안을 느낄수 있었다. 그녀가 주은 것이 명함장이 아니라 뭇사람들에게 짓밟힐번한 나의 자손심이였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고마움의 표시로 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나 돌리던 휴대폰전화번호와 팩스번호까지 밝힌 명함장을 그녀에게 정중히 내밀었다.

우리는 인차 본 화제로 들어갔다.

"하실 얘기가 뭔데 지금 들어볼까요?"

"선생님 말씀 낮추세요. 선생님께서 말씀을 낮추시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지고 죄송스러워요."

"미안하지만 성함은?"

"아이참. 여직 제가 선생님한테 제 이름마저 알려드리지 않았군요. 죄송해요. 저의 이름은 최미향, 올해 나이는 26살, 취미는 독서, 특기사항은 리혼녀입니다."

초면에 나이뿐만아니라 리혼녀라는것까지도 당당하게 밝히는 그녀의 솔직함이 아주 인상적이였다.

그녀는 무작정 고향을 떠나 일가친척도 없고 별로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도 없는 북경에 오고보니 마치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프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 허두를 떼고는 본론에 들어갔다.

"선생님을 찾은건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의 글을 통해 저의 기구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데 있었어요. 여느 소녀들처럼 꿈많고 웃음이 많던 저는 하루밤사이에 꿈을 잃고 웃음을 잃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밤이 바로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 된셈이지요."

그러고보면 녀인의 수난사는 대체로 밤에 시작된다는 격언이 아주 적중한가보다. 미향은 아래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달래면 달랠수록 더 울어버리는 것이 녀자와 어린애들이다. 녀자나 어린애들이 울때면 스스로 울음을 그칠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상책이다. 나의 안해도 이러저런 일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설음을 받을 때는 곧잘 울어버린다. 그럴 때 달래면 안된다. 달래면 더 울어버리다가 나중엔 나를 상대로 스트레스를 푼다.

한 번은 친구의 아들 돌생일에 우리 내외는 단돈 백원만 가지고 갔다. 아이의 돌상에 사업을 하거나 과장이나 처장같은 장자나 가진 다른 친구들이 몇백원씩 척척 꺼내놓는 것을 보고 안해는 가지고 간 백원을 꺼내놓지 못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안해는 울었다. 곁에서 내가 달래니 안해는 그 설음을 나한테 쏟아부었다.

"맨날 그런식으로 살고 있으니 마누라 체면 하나 세워주지 못하지요. 글 만들어내는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뭔들 못하겠어요."

그러면 나는 말없이 서재로 들어간다. 더 곁에 있었다간 좋은 일이 없다. 살아오면서 설음받던 일들이 다 쏟아져나오고 나중엔 아예 나를 바보로 만든다. 글과 씨름하면서 애들과 대화할줄도 모르는 아버지, 안해에게 미용원에 가서 얼굴 한 번 만지라고 몇십원도 쥐워주지 못하는 남편, 남보다 더 잘 살아보겠다는 의욕마저 없는 사내,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술로 화풀이 하는 어리석은 사람, 하여간 나는 지구라는 이 땅덩어리우에 발붙일 자리가 없는 사람으로 되어버린다.

내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두눈을 지그시 내려감고 서재에 앉아있으면 조금후 안해는 언제 투정을 부렸는가 싶게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앞에 김이 몰몰 피여오르는 커피 한잔을 놔준다. 그러면 나는 씩 웃으며 안해의 엉덩이를 툭 친다. 안해도 웃어버리면서 내 코를 한 번 비틀어놓고는 나가버린다.

안해생각을 하고 나니 오열하는 미향의 어깨라도 한 번 다독여주고 싶다. 40대 남자가 울고 있는 20대 녀자와 마주앉아 있는것이 볼거리나 된 듯 주변의 시선들이 따갑게 맞쳐온다. 나젊은 정부의 고운 투정을 받아주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이윽고 미향은 울음을 그치고는 잠간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떴다. 그 사이 나는 울지않고서는 꺼낼수 없는 미향의 기구한 인생이야기가 시작되였다는 그 밤이 대체 어떤밤이였을가에 대해 추측해 봤다. 폭력에 의한 굴욕의 밤? 아니면 그 어떤 비루한 거래로 이루어진 계약적인 밤? 혹시 그 어떤 피치못할 사정으로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친 밤?

언제 울었나 싶게 새로 화장을 하고 다시 내앞에 앉은 미향이는 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추측을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미향의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라는 그 밤은 시인들의 말을 빈다면 천지간의 화합과 령혼과 령혼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황홀한 밤이였다. 한마디로 미향이가 녀자로 새롭게 태여나는 밤이였다.

미향의 기구한 생을 미향이가 말한대로 대충 적으면 이러하다. 평소에 백마왕자로 흠모하던 학교의 체육선생과 그 학교 고중졸업생인 미향은 소낙비가 억수로 내리는 밤에 학교 체조련습실에서 육체와 령혼의 향연을 가진다. 그것을 계기로 둘은 나중에 부부가 된다. 미향은 고향마을에서 유치원선생으로 일하고 남편은 체육학원으로 연수를 간다. 그 사이 사랑엔 금이 실리고 미향은 그 금을 메우려고 애를 쓰다가 나중에는 포기해 버리고 만다. 배속에 커가는 아이를 낳아서 키우려던 미향의 일루의 희망마저도 남편의 잔혹한 발길질에 꺼져버린다. 희망의 잿더미속에서 단 하나의 불찌라도 찾으려고 미향은 무작정 고향을 떠나 북경으로 온다.

어디서 많이 들었고 또 녀성잡지에서 많이 보아온 이야기다. 별로 감흥이 가지않았다. 그렇다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수없어 미향앞에서 진지하게 듣는 모습을 꾸미느라고 애썼다. 가끔 하품이 나오는 것을 참느라고 곤경을 치뤘다. 미향이가 이야기를 마치자 나는 그 이야기를 정리해서 녀성잡지에 보내보라고 했다.

"녀성잡지에 나오는 글은 너무 짧고 깊이가 없어요. 선생님께서 저의 이야기로 장편소설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면 그 반응이 대단할거얘요."

단편소설감으로도 안되는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만들라니 어이없었다. 그러나 글감이 안된다고 말할수 없었다.

"오늘 들은 이야기만 가지고서는 감이 잘 서지않는데 이러면 어떻소? 미향이가 오늘 할 말을 채 못한 것 같은데…"

미향이가 내말을 잘랐다.

"맞아요. 저의 이야기는 며칠을 새면서 말해도 다 하지 못할거얘요."

"그러니 그 이야기를 차근차근 정리해보오. 록음기가 있소?"

"없어요."

나는 호주머니에서 취재용으로 쓰던 자그마한 록음기를 꺼내놓다.

"미향이가 겪은 일과 하고싶은 말을 이 록음기에 록음해주오. 며칠이든 한달이든 천천히 생각나는대로 록음해주오. 할 이야기를 다 했다고 생각되면 그 때 나한테 다시 련락을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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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원: 인민넷 (편집: 김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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