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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청춘약전》(1)

제3차 "아리랑"문학상

2011년 10월 19일 16:01【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빠드득, 빠드득……”

절주 있게 들려오는 눈 밟는 소리에 수호는 잠에서 깼다. 창밖이 희붐히 밝아오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는 잠깐 멎었다.

수호는 옷을 주워 입으면서 창밖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또다시 눈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누군가 문밖에서 거니는 모양이었다.

설옥이가 왔는가? ……

수호는 베개 밑에서 손목시계를 꺼내 보았다. 시침과 분침은 5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설옥이가 올 때는 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앞서 수호는 서둘러 옷을 주어 입었다.

농부산품연합경영회사의 비서이자 타자수인 설옥은 이 보름째 매일 아침마다 꼭꼭 6시면 출근했다. 그의 말마따나 지배인인 수호에게 아침체조를 배워주기 위해서였다. 그 아침체조란 시체에 유행되는 사교무였다. 산하에 숱한 상점과 식당을 가지고 있는 나, 젊은 회사 지배인이 80년대에 살면서 사교무를 모른다면 남들이 웃을 일이라면서 설옥이가 굳이 배워주겠다고 자진해 나서는 바람에 수호는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수호는 저녁마다 찾아오겠다는 설옥에게 출근하기 반 시간 전에 와 달라고 시간을 정했던 것이다. 그때 설옥은 해죽이 웃으며 이렇게 물었었다.

“저녁에 누구와 약속이라도 있나요?”

“없소.”

“오, 그럼 알 만해요. 남들의 말밥에 오를까 봐 그러지요. 전 그런 우려가 없는데요. 사교무를 배우는데 저녁이면 어떠나요? 누구의 말마따나 밤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엉큼하다던데요. 호호호…….”

수호는 서둘러 이부자리를 개켰다. 사업의 편리를 보아 사무실에 숙소를 정한 수호로서는 설옥이가 오기 전에 잠자리를 그대로 거두어야만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처녀에게 총각의 잠자리를 보인다는 것은 실례니까.

한번은 수호가 늦잠에 빠져 6시가 넘도록 일어나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날 설옥은 얼어드는 두 발로 언 땅을 콩콩 구르면서 문밖에서 기다렸다. 발 구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수호는 바삐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설옥이가 찬 기운을 맞아 발갛게 된 볼을 두 손으로 싹싹 비비면서 집 안에 들어오자 수호는 이내 외투를 가져다 그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외투면 되나요? 발이 얼었는데…….”

그러면서 설옥은 수호한테 곱게 눈을 빨았다.

“그럼 저, 어서 신을 벗고 저 이불 안에 발을 넣소.”

그 말에 설옥은 깔깔 웃어댔다. 그때 수호는 마구 꿍쳐 놓은 이부자리를 보고 설옥이가 웃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바삐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개켰다.

“지배인 동무, 처녀한테 잠자리를 그대로 보인 것도 실례겠지만 그 이불에 발을 넣으라고 권한 건 더 큰 실례가 아닐까요? 호호호…….”
이 말에 수호는 적이 무안해났다.

“자 오세요, 언 발이야 녹여줘야지요.”

수호는 주저했다.

“뭘 주저할 게 있어요. 손으로 문질러 달라지도 않는데요. 자 그 오른발과 나의 오른발을 마주치고 그 왼발과 나의 왼발을 마주치자요. 시작! 하나 둘, 하나 둘…….”

설옥은 제법 구령까지 쳐 가며 수호와 발을 마주쳤다. 이 정경을 그 누가 봤으면 어김없이 그들 둘을 한 쌍의 연인으로 단정할 것이다. 사실 그들은 연인이 아니었다. 하긴 설옥이한테는 그의 성격에 따르는 사랑의 고백이 가끔 수호한테로 날아올 때가 있었다. 설옥의 고백은 여느 처녀들처럼 알 듯 말 듯한 몽롱 시에 가까운 고백이 아니라 구름을 찢고 내리꽂히는 번갯불 같은 고백이었다. 너무나도 당돌하고 진공적인 고백일 때엔 흔히 사람들은 그것을 그 사람의 성격다운 농담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수호도 많이는 설옥의 고백을 농으로 받았다.

수호는 밖에서 들려오는 눈 밟는 소리에 귀를 강구며 유리에 붙은 성에를 입김으로 녹였다. 성에를 녹인 후 눈을 유리에 바싹 가져다 대고 내다보니 그의 시야엔 고개를 숙인 채 무겁게 걸음을 옮겨놓고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안겨왔다.

누굴까? 날 찾아왔는가?

수호는 눈을 유리에 더 바싹 가져다 댔다. 머리에 흰 털실 목도리를 둘러친 그 여자가 얼핏 고개를 들어 집 쪽을 보는 그 순간 수호의 집요한 눈길은 그 여자의 얼굴에 가서 박혔다. 그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수호는 저도 모르게 냉소에 가까운 웃음을 입가에 실으며 창문에서 물러섰다.

문밖에서 거니는 여자는 바로 난희였다. 그는 일찍 수호에게 즐거움도 가져다주었고 짝사랑의 고통도 안겨주었었다. 한마디로 수호는 사랑에서 난희에게 거절당한 패배자였다. 하기에 며칠 전에 난희가 한번 만나자고 전화를 걸어온 것을 수호는 대답 한마디 없이 송수화기를 놓아버렸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사랑을 거절한 사람과는 될수록 만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사랑에서 거절당한 사람은 왕왕 자기를 거절한 사람을 얼핏 보기만 해도 반발심을 앞세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희가 수호를 찾아온 것을 보면 필경 그 어떤 급한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수호는 문밖에서 서성대는 난희를 다시 내다보면서 속으로 네가 제 발로 찾아들어오면 들어왔지 절대 내가 나가서 맞아들이지는 않으리라는 모진 생각을 굴렸다. 하긴 왜 나를 만나려고 할까 하는 호기심은 없지 않았지만 그런 호기심이 동할 때마다 수호는 사나이의 존엄과 도고한 자존심으로 그 호기심을 깔아버렸다.

난희의 출현이 수호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불쾌한 추억뿐이었다. 허나 아무리 불쾌한 추억이라 해도 그 속엔 희로애락만은 뒤섞여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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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원: 인민넷 (편집: 김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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