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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자치주와 중국 조선족

황유복 중앙민족대학 교수,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경제사회발전고문

2011년 07월 26일 14:41【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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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에서 태생하였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경상북도이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나는 경북억양이 풍기는 우리말을 한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까지도 나는 연변이란 이름을 모르고 커왔다. 길림시조선족중학에 진학하면서 연변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거의 절반 정도의 선생님들이 연변대학졸업생들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생님들도 “연변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연변” 은 나에게 있어서 막연하고 신비스러운 곳이었다.

길림시조선족중학을 졸업하고 나는 북경에 있는 중앙민족대학 역사학부에서 민족사를 전공하게 되었다. 그때 배운 학과목가운데 <중국 소수민족지>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연변에 관한 지식을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대한 소개에서 습득하게 되었다. 강의를 담당하신 강사님은 한족출신이었지만 연변에 가서 사회조사를 하신분이였기 때문에 연변의 자연, 지리 상황은 물론 조선족들의 사회생활, 가정생활과 풍속습관, 문화예술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강사님이 “연변조선족들은 문화수준이 높고 깨끗하고 위생적이며 노래와 춤에 능해 예술적인 민족”이라고 조선족을 칭찬할 때 막연하지만 나의 가슴은 긍지로 부풀어났다. 60명이 정원인 반에서 나는 “유일한 조선족”이었기 때문에 한족동학들은 나를 “연변사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가짜이긴 하지만 나는 “연변사람”이란 호칭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조교로 선택되어 대학에 취직되었다. 문화대혁명와중에 “공, 농, 병 대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한 1971년에 평생 처음 연변에 출장으로 잠간 다녀오고 그 이듬해 1월에 대학에 조선어문학전공을 설치하기 위하여 나는 연변대학에 가서 6개월간 연수를 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연변에서 1주일이상 체류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했다. 그때 난생처음으로 조선족아줌마들이 물건을 팔고 있는 재래시장과 조선족음식점을 구경할 수 있었고 자치주 주장의 가정에서부터 시골 농민의 집에까지 손님으로 초대되어 “연변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체험을 통해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들어오던 “연변사람”들에 대한 풍문들이 허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중국조선족은 어디에서 살던지 한겨레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연변에서 북경으로 돌아와서 나는 “연변처녀와는 결혼하지 말라”는 경상도마을의 금기를 깨고 연변태생인 지금의 아내와 연애과정을 거쳐 결혼하게 되었다.

“10년 동란”으로 정의된 “문혁”이 막을 내리고 개혁개방의 시대를 맞이하여 나는 당시 중국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영문지로부터 중국조선족문화를 소개하는 논문을 부탁받았다. 나는 논문제목을 "Home Koreans in China" 라고 정했다. 물론 내 마음의 고향인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대한 글이었다. 그 논문은 지 1983년 제3기에 발표되었고 몇 달 후부터는 독일, 영국, 미국 학자들의 편지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동아일보>가 1984년 3월에 “중국속의 코리아 연변자치주” 라는 제목으로 나의 논문을 번역해 게재하였다.

그 논문과 1981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Home on the Range”등 논문 때문에 나는 밀폐되어 있다가 금방 개방하기 시작한 중국에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있던 서방학자들로부터 북방민족연구학자로 인식되어 1983년 말부터 미국, 일본, 캐나다, 소련, 한국, 몽골 등 나라 대학에 교환교수로 초청되어 가게 되었다. 1972년 비연변태생인 내가 연변에서 체험하고 확인했던 조선족정체성이 나를 국제학술무대에 서게끔 뒷받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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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 30주년을 맞이하는 중국은 30년 전에 비해 GDP 67배의 성장을 이룩하여 GDP기준으로 세계 제3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이는 단순한 경상지수의 대폭상승만이 아닌 일련의 광범하고 심각한 변혁이다. 농촌으로부터 도시에 이르기까지, 경제영역에서 정치영역에 이르기까지 경제가 고속 장성한 동시에 중국의 경제구조, 사회구조, 제도구조도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 30년의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은 고도로 집중된 계획경제체제로부터 활력이 넘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전변, 폐쇄 반 폐쇄상태로부터 전방위로 세계경제에 융합하는 위대한 전변을 성공적으로 실현하였다. 개혁개방 30년은 중국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운명, 생활방식과 사회적 관념에도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족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의 거대한 변화에는 우리민족의 기여도 포함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 중국조선족사회에는 30년 간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중국 조선족사회는 미증유의 충격을 받으면서 80년대에 이루어진 농민들의 도시진출을 경험하게 된다. 개혁개방을 맞이하면서 그들은 상품경제 시대에서는 제한된 땅에서 얻는 수확으로 도저히 더 잘살 수 있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수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본금이 충족하지 않은 그들은 도시에서 상대적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보다 넓은 지역으로 분산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1992년 중한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조선족 사회는 새로운 기회를 접하게 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던 마을들을 떠나 부(富)를 찾아 나섰고 한국 경제인들의 중국진출 붐에 따라 조선족들은 북경, 천진, 심양, 대련, 청도, 상해, 광주 등 연해개발지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90년대의 또 다른 추세는 한국 노무의 붐이었다. 수많은 농민들이 "코리안 드림"의 유혹에 끌러 한국으로 몰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법체류 외국인 노무자가 사회문제로 비화되자 조선족들의 한국입국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고 그들 노무 희망자들은 미화 6천 달러에서 1만 달러 정도의 수수료를 노무 중개업자들에게 지불하면서 "기회의 나라"에 입국하기 위해 온 가족의 생계와 심지어 그들의 사활을 내 건 "도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악덕 브로커들의 사기가 빈발하면서 90년대 후반기에 한국과 조선족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노무사기 사건들이 속출했다.

"코리안 드림"으로 시작된 조선족 사회의 한국노무 붐이 여성들의 한국으로 시집가기 붐으로 이어지면서 2000년 말 현재, 약 6만 명의 조선족 여자들이 한국으로 시집갔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 낳아 조선족 공동체를 유지해 가야 하는 조선족 여성 3명 중 1명이 한국으로 가 버렸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중국조선족 출산인구는 급 하강선을 타게 되어 1999년 말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신생아 출산 수는 1989년의 1/4밖에 안 되는 3,800명이였다.

조선족 사회가 전통적인 농업경제를 탈피하고 도시경제에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우선 일인당 평균 경제수입의 증가를 실현할 수 있었다. 조선족 전체의 경제수입 실태를 추출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러나 개별지역 통계에서 우리는 그 전반을 감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2006년, 연변자치주에서 외국에 노무나간 사람들이 연변에 부쳐온 돈은 10억 달러에 육박했고 휴대해 들여온 돈까지 합치면 20억으로 추산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수입의 증가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족사회는 많은 귀중한 것들을 상실하게 되었다. "조선족의 문화영토"로 인정되던 조선족 마을의 공동화(空洞化)와 해체, 그리고 그에 따르는 조선민족학교의 폐쇄, 민족 정체성의 혼돈, 그리고 민족공동체의 존망과 직결되어 있는 전통적 가치관을 잃어가고 있다. 급변하는 중국조선족 사회는 지금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여러 가지 위기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사회는 발전과 해체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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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개혁개방이래 중국 조선족은 전통적인 거주지역인 동북 3성을 떠나 중국의 연해지역 대도시로 대거 진출하게 된다. 현재 중국 조선족의 거주판도는 동북 3성 대도시에 40여만 명, 현, 시 이하 농촌에 45여만 명 그리고 산해관 이남지역에 60만 여명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조선족의 해외진출도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법무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5년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인구수가 23만 여명이었는데 2007년 초부터 방문취업제를 실시함에 따라 지금은 한국진출 조선족인구가 35만을 넘어서고 있다. 그 외에도 일본에 8만 여명, 러시아에 5만 여명이 진출해 있으며 미국과 유럽, 동남아시아, 중동, 호주, 남미 등 지역에 진출한 조선족까지 합치면 50만 명을 넘어섰다.

지난해부터 나는 길림성 서란현 조선족사회에 대한 사회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서란시 조선족의 상황과 발전>(<舒兰市朝鲜族现状与发展>,中国社会科学出版社,2008年9月,北京)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다. 서란시 각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10년 안으로 분산주거지역 조선족마을은 심양시 만융촌과 같은 대도시부근의 집중촌외에는 모두 소실될 것이라는 판단이 나온다. 그렇게 된다면 분산주거지역에서 국내 대도시나 국외로 진출한 조선족들은 고향이 없는 “나그네”로 될 수밖에 없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연변사람”들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나그네”들의 고향으로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연변은 명실공이 모든 중국조선족의 고향으로 되어야 한다.

흩어져버린 조선족사회가 하나의 민족사회로 생존하려고 한다면 부동한 자연환경과 문화 환경에 노출되어있는 민족구성원들이 계속 조선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과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해가야 한다. 분산된 조선족사회를 유지하는 대안으로 일부학자들이 ⟪이산(离散) 유대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Diaspora)⟫민족론을 제시하고 있다. 혈통과 언어가 바뀌어도 디아스포라가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 데는 끈질기게 작용해온 유대교가 디아스포라들의 민족정체성과 전통적 가치관의 기반으로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강한 결집력을 가진 민족종교가 없는 조선족사회에 디아스포라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디아스포라보다는 이민자들이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에 가깝다. 중국국적을 취득했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진입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이론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여러 가지 위기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지속적으로 흩어진 조선족들이 공유할 수 있는 조선족문화를 창출해야한다. 그러한 문화는 흩어진 조선족들이 계속 하나의 민족으로 될 수 있는 민족정체성 자체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민족 문화사업종사자들은 조선족사회가 오늘의 환경에서 살아남을수 있는 키워드로 될수 있다.

현제 조선족들이 흩어져 사는 중국의 대도시들에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된 조선족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동북지역 도시들에는 ⟪심양시조선족련의회⟫와 같이 현지정부의 민정국에 등록된 법인단체도 있지만 관내지역의 절대다수 단체들은 무허가상태에서 어렵게 조선족문화관련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다. 지역운동회, 설맞이 모임, 노래자랑모임, 장학회 모임, 동호인 모임, 경로행사 등 활동내용도 다양하다. 이러한 기성세대가 주도하는 문화 활동들은, 조선족들이 바다에 뿌려진 모래알같이 흩어져 있지만, 조선족사회는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행사는 지역사회의 친목활동이라는 의의를 훨씬 뛰어 넘는다.

이제 각 지역 조선족단체들은 현지 정부의 민족사업을 협조하는 위치에서 NGO의 합법적 지위확보에 힘을 기울려야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더 효과적으로 민족문화의 계승과 창출을 통한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높은 차원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언어교육과 민족문화교육을 실시해야한다. 전통과 현대화,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함께 고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옛 전통만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사물을 접수하려 노력해야하고 젊은 사람들은 현대에만 집착하지 말고 민족문화전통을 이어가야 한다. 문화전통과 세계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이러한 대도시 조선족단체들을 위한 항공모함이 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조선족문화 활동에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할 수 있어야하고 그들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어야 한다. 연변의 연출단체들은 그들을 위한 순회공연을 당연한 책임으로 생각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150년 이상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기정체성을 확보했다. 이제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성장과정에서 어머니의 정신과 정서를 마음의 보금자리로 삼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 보금자리를 심리적 구심점으로 만들어 간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조선족구성원 모두의 어머니 품이고 심리적 구심점이다(2008년 10월 4일 북경에서).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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