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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송에 묻힌 천년 고성(古城)

세월의 흐름속에서 사라지고 농가사이 성벽터만 남아

2009년 06월 03일 08:36【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사람들은 하룡(河龍)이라고 하면 곧바로 세그루의 로송을 눈앞에 떠올린다. 하룡은 연변 부르하통하와 해란강의 합수목 마을로, 연길에서 동쪽으로 10여킬로메터 상거한 동네이다. 하룡의 동쪽 산자락에는 로송 세그루가 있는데 나무마다 천년의 년륜이 새겨져있어 “삼태송(三胎松)”이라고 불린다.

삼태송은 청나라말기(1904년) 조선 함경북도 명천의 밀양박씨 박중근 형제와 길주의 양천허씨 허웅범 삼형제가 정착하면서 최초로 발견한것으로 전한다. 천년 력사를 가진 로송은 이때부터 마을의 당수나무로 성스럽게 모셔지고 있다. 지금 삼태송은 현지에서 특이한 명물로 되여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있다.

천만 아쉽게도 사람들은 이 천년의 로송을 보러 가면서 도중에 해란강의 기슭에 있는 천년의 고성은 그냥 무심히 스쳐지난다. 어쩌면 그들을 무덤덤하다고 탓할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 천년의 고성은 무정한 세월속에 진작 이전의 형태를 잃어버렸기때문이다.

기재에 따르면 고성은 하룡촌 제5촌민소조에 위치하고있다. 속말에 “락타는 굶어죽어도 배 터져 죽은 쥐보다 크다”고 했다. 솔직히 고성이 황페화되여도 그 흔적을 어련히 찾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산기슭에 오밀조밀 들어선 이 동네를 보자 금방 한숨부터 새여나왔다. 농가사이에 바자굽도 아닌 성벽이 그대로 남아있으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웠던것이다. 보아하니 명색이 고성이라고 할 곳을 카메라에 한장도 담을수 있을것 같지 않았다.

다행히도 현지인 김해(46세)씨가 일루의 희망을 던져주었다.

“…아직 성벽터가 한군데 남아 있긴 한데요”.

김해씨는 우리를 마을북쪽의 큰길에서 수십메터 떨어진 한 농부의 저택으로 안내했다. 이 농가의 구새목부근에는 너비 10메터의 나지막한 둔덕이 무릎을 치고있었다. 뒤부분에 있는 흙둔덕은 키를 넘고있었는데 둔덕에 세워놓은 덕대를 타고 포도넝쿨이 줄줄이 드리워있었다.

“이건 마을에 남아있는 유일한 성벽터입니다”.

이 성벽은 마침 집과 밭을 경계로 자리하고있었다. 집주인은 성벽이 담 맞잡이로 되자 내친김에 그대로 남겨둔것 같았다.

김해씨가 삽으로 몇번 칼질하자 둔덕에는 금세 두세뽐 크기의 계선들이 나타났다. 일부 학자들은 성벽이 판축(版築) 즉 흙을 다져서 쌓아졌다고 하는데 이런 흔적으로 미뤄 흙벽돌로 쌓은걸로 보는 견해도 있다. 흙벽돌은 중국대륙에서 서주시기에 처음으로 사용되였으며 당나라시기에는 민간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였다고 한다. 김해씨에 따르면, 하룡고성의 성벽은 바로 이런 “흙벽돌”로 겉면을 쌓고 가운데에 돌과 흙을 꽉 채웠다. 고성은 이렇게 흙으로 쌓아졌다고 해서 옛날에 토성(土城)이라고 불렸으며 따라서 하룡촌도 토성자촌이라고 불리웠다고 전한다.

하룡 고성은 부르하통하과 해란강 합수목의 강기슭 평지에 위치한다. 크기가 약 5만평방메터인 고성은 약간 불균형적인 네모모양이다. 전반 고성은 해란강의 기슭을 따라 약간 동북쪽으로 기울어졌기때문에 마름형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성은 성안에 별다른 성벽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걸로 미뤄 내성이나 기타 성이 없는 단일한 성으로 보인다. 고성남쪽에는 산꼭대기가 뾰족하다고 해서 현지인들이 소뿔봉이라고 부르는 화첨자(鏵尖子)산이 우뚝 솟아있으며 북쪽에는 수십메터 폭의 해란강이 소리내며 흐르고있다. 고성의 서북쪽 1.5킬로메터 되는 곳에는 부르하통하를 사이 두고 유명한 성자산 산성이 있다. 성자산 산성은 고구려시기에 축조되고 그후 발해, 금나라말의 동하국시기에 계속 사용된 옛 성이다.

하룡 고성은 불과 30여년전까지 사면에 모두 토성이 있는 등 온전한 모양새를 갖추고있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토성우를 둔덕길로 삼아 걸어다녔다. 토성아래에 무성한 오미자나무는 고성에 한 점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때 고성안에는 옛 우물터만 여섯개나 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성에 새로 집을 짓다보면 땅밑에서 차곡차곡 쌓인 돌들이 나지기도 했단다. 옛날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였다.

이 천년의 고성에는 또 아이러니한 비화가 숨어있었다. 1960년대 말, 중국에서는 구쏘련과의 전쟁을 대비해 “방공굴을 깊이 파고 식량을 많이 비축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때 토성의 밑에는 촌민들이 방공용으로 판 지하갱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20세기에 이르러서도 계속 고성을 사용한 셈이다.

“겨울이면 성벽우에서 눈썰매를 타고 미끄럼질을 즐겼어요”. 김해씨는 어릴 때 성벽부근에서 늘 숨바꼭질을 했다고 회억한다. 그의 말을 빈다면 너비 10메터, 높이 2메터 남짓한 성벽 그리고 성벽에 둘린 고성은 어린 그들에게 디즈니랜드와 같은 놀이터였다. 그러나 고풍스런 이 천년의 “놀이터”는 결국 종지부를 찍었다.

현지에서는 고성의 동쪽에 집들을 지으면서 토성을 허물었고, 남쪽과 서쪽에 논밭을 개간하면서 토성을 허물었다고 한다. 또 북쪽에 대로를 닦으면서 토성을 허물어버렸다. 남쪽성벽가운데 있던 성문자리와 옹성 역시 허물어지는 토성과 더불어 흔적조차 없이 말끔히 훼손되였다. 그때는 바로 지난 세기 70년대 중반이였다고 한다. 그런 살풍경속에서도 고성 일부 구간의 토성은 그 후의 80년대까지 잔존하고있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천년의 상아탑이 일시에 와그르르 내려앉은 순간이였다. 거물처럼 산기슭에서 꿈틀거리던 약 1000메터의 고성성벽은 그렇게 단 몇년 사이에 평지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지금 농가들 사이에 있는 동쪽 성벽터가 그나마 옛날의 모습을 얼추 더듬게 할뿐이다.

“그때는 마을에서 오히려 토성을 거추장스럽게 여겼어요.” 그 시기를 지나온 김해씨도 몹시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성벽터우에 지은 뒤간과 돼지우리가 흉물스럽게 안겨와 저도 몰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고성은 진작 쓰레기 취급을 받는 버려진 “고물”로 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고성에는 출토된 유물이 아주 적은걸로 전한다. 일찍 동쪽 성벽부근의 돌무지에서 돌도끼가 발견되였으며 고성북쪽의 부르하통하와 해란강 합수목 일대에서 고대의 석관묘들이 발견되였다. 이 무덤들이 소영자의 고분과 같은 시기에 있었는지는 아직도 고증이 필요하지만 아무튼 고성이 원시사회시대의 유적지우에 세워졌다는게 분명하다.

사실 고성부근의 유적지는 이밖에도 적지 않다. 현지인들은 소뿔봉의 북쪽 산등성이에 사찰유적지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산등성이에서는 기와조각, 도기 등 일부 유물이 발견되였을뿐이며 사찰은 흔적도 찾을수 없다. 일각에서는 또 석촉 등 유물로 미루어 소뿔봉 산등성이를 고대 전장이라고도 전한다. 구경 어느 설이 유력한지는 발굴된 유물이 적어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그리고 고성에서 서쪽으로 2,3킬로메터 정도 떨어진 산등성이에서 천여년전의 보루유적지가 발견되였다. 위치상 연길분지에서 고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이 보루는 고성을 지킨 요새인걸로 보인다.

“모두 옛날 얘기입니다. 언제 그런게 있었는지도 몰라요”. 김해씨는 지레 손사래를 젓는다.

그건 그렇다 치고 육안으로 피뜩 보아도 고성과 성자산 산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형제처럼 가지런히 서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고성과 성자산 산성을 일체화된 “쌍둥이”성으로 주장한다. 옛날 주민들이 전쟁이 없을 때에는 평원성인 고성에서 생활하고, 전쟁 발발 시에는 험요한 요새인 성자산 산성으로 이동하였다는것이다. 짜깁기식의 억지주장은 아닌듯 했다. 사학계에서도 하룡 고성 역시 부근 성자산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였다는게 통설로 자리잡고있기때문이다. 하룡고성 토성에서는 고구려시기의 특유한 그물무늬모양의 기와조각이 발견되는 등 성자산 산성과 거의 비슷한 유물들이 출토되였다. 고성 역시 부근의 성자산 산성처럼 고구려유적지우에 축조되였다는것을 보여주는 단면도라고 하겠다.

어찌하든 하룡고성은 여러 조대에 걸쳐 계속 보수, 사용되였다는게 지배적인 설이다. 적어도 발해, 료나라, 금나라 말의 동하국시기에 계속 이 성을 사용했다는것이다. 또 일부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명나라시기 녀진족의 일부가 이 부근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때 문화재이고 그렇게 값지다는걸 알았더라면 굳이 토성을 허물었겠어요?” 김해씨의 말에는 아쉬움이 물씬 젖어나고있었다.

우리는 고성북쪽으로 1킬로메터쯤 떨어져있는 삼태송을 찾았다. 삼태송부근에 삼삼오오 모여선 관객들은 공연히 흥분해서 오구작작 떠들고있었다. 천년의 풍상세월을 헤쳐 온 이 로송이 무척 흥미로왔던 모양이다. 이 로송 근처까지 뻐스가 반시간 간격으로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시내와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인데도 택시가 심심찮게 보였다. 잠간 세어보니 로송 근처에는 토닭곰, 토끼구이 등을 경영하는 음식점만 해도 무려 20여개 되였다. 천년 로송의 치솟는 인기를 실감케 하는 부분이였다. 그러나 정작 이 로송이 파수군처럼 천년을 지켜온 부근의 고성은 슬픈 옛말로 외롭게 남아있었다(중국국제방송국 기자 김호림).

래원: 연변일보 (편집: 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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